이 글은 아래에도 잠깐 언급되는 "둥글이 세상"이란 단체의
홈피에서 일부를 옮겨온 글입니다.
- 잡 글 : 성당과 교회의 포용력의 차이에 관하여 -
[둥글이의 유랑 교본]에 따르면 ‘야영지’의 가장 ‘기본’은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이지만,
가끔 부득이한 때 ‘교회’와 ‘성당’을 찾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교회의 경우에는 (아무리 크고 부속 건물이 많더라도) 묵어가게 해 주는 경우가 없는 반면,
성당의 경우에는 그곳에 텐트를 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돌아다니면서 경험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의 공통된 반응이다.
예외적으로 소개를 통해서 알게 된 교회를 제외하면,
여지껏 단 한 개의 교회에서도 텐트 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역사적인 맥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16세기까지 ‘성당’은 교황청의 재산과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온갖 ‘왜곡된 믿음과 교리를 실천-강요’하는
‘하늘의 섭리’를 집행하는 독보적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한답시고 패를 갈라놨다.
물론 루터는 성경의 교리를 충실히 실행하여 없는 자/약한 자를 대변하고 사회적,
종교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종교개혁을 이뤘던 것이 아니다.
개신교도들의 경우에는 루터의 치적이 없었으면 운영하는 교회가 세워지지도 못했을 것이었기에 수시로
‘루터 탄생 몇 주년 기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떠받들지만, 루터는 절대왕정 시대에 신흥 중간계급의 입장을 대변하여
그 지배세력들에게 좀 더 ‘유리한’ 믿음의 형식을 창출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절 유럽의 각 나라에는 막강한 교황권에 기반해서 교회(성당)가 세워져 있었는데,
각 나라의 국민들이 헌금이다, 면죄부다 해서 받치는 모든 돈은 로마의 교황청으로 곧바로 공수되었다.
이렇다 보니 이제 서서히 기반이 갖춰가는 [절대왕권]과 봉건주의를 깨트리고 자유로운 상행위를 통해서
자본을 축적한 [신흥중간계급]의 경우에는 교황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국가의 힘을 굳건히 하여 부를 확대할 수 있는 재화가 로마로 빨려 들어가는데 유쾌할 수 있겠는가?
교황의 내정간섭 역시 거슬렸다. 그들은 교황권으로부터 자신들의 독립적인 입지를 굳건히 할 필요를 느꼈다.
이렇게 과거의 봉건질서의 토대가 무너져가면서 뭔가 큰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에 이를 적절히 포착해서
그 뇌관의 정점을 내려 친 사람이 바로 루터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혁명’을 이뤘던 이들이 흔히 겪는 협박이나 위기를 경험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왕권과 신흥 중간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왕권과 신흥중간 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그가 등장했다는 말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는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그 자신의 교수로서의 자실을 십분 발휘하여, 그 당시 독일의 지배세력들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는
‘논리’를 만들어서 ‘신학적으로’ 교황청을 공격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과정에서 그는 성경의 교리를 그대로 실행하고, 예수가 그리했던 것 처럼 없는자/약자를 대변하며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호할 수 있는 기능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개혁은 실패했을 것이다.
[...초기의 종교 개혁가들은 루터, 칼뱅, 녹스와는 달리 종교 이상의 것을 개혁하려고 한 ‘실수’를 저질렀다.
영국의 위클리프는 농민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으며, 보헤미아의 후스는 로마에 항거했을 뿐 아니라,
귀족의 권력과 특권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적 농민 운동을 고무했다. 이 때문에 당연하게도 교회 뿐 아니라 세속의 당국도
이런 운동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런 운동은 분쇄됐다. 루터와 그를 따른 종교개혁가들은 지배 계급의 지지를 잃게 되는 일,
즉 위험한 평등주의의 교리를 설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루터는 결코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1525년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다’고 브르짖었을 때,
루터는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귀족들에게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귀족들을 격려했다.
“폭도를 죽이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때려 죽이고,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귀족)이 폭도들(굶주린 농민)과의 이런 투쟁에서 죽는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보다 숭고하게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발췌]
이를 바탕으로 도식은 간결하게 정리된다.
[... 이 새로운 집단, 즉 신흥중간계급은 시대에 뒤떨어진 봉건제가 더 이상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흥중간계급은 카톨릭 교회가 더 이상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으며,
카톨릭 교회야말로 봉건제의 요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는 신흥중간 계급의 공격에 맞서 봉건질서를 방해했다.
교회는 그 자체가 봉건구조의 강력한 일부였다.
교회는 그 자신이 봉건 영주로서 토지의 약 3분의 1을 소유했으며, 교회 재산의 대부분을 나라 밖으로 유출했다.
신흥 중간 계급은 각 나라에서 봉건제를 쓸어버리기 전에 먼저 그 핵심 조직,
즉 ‘교회’를 공격해야만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햇다. 그 투쟁은 종교의 가면을 썼다. 그것은 종교개혁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흥중간 계급이 봉건제에 맞서 벌인 최초의 결정적인 전투였다. -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발췌]
자 이렇게 생성된 개신교...
문제는 애초에 이 개신교가 ‘없는자/고통 받는 자’를 위한 반발로서의 종교개혁을 통해서가 아닌,
앞서 봤던 대로 봉건주의가 무너지는 시점에서 강력해진 [왕권]과 자본을 축적하게 된
[신흥중간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측면에서 생성된 종교이다보니,
즉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만들어진 종교이다보니,
이후의 ‘청교도원리’에 입각한 ‘재물의 축적’ ‘상행위’ ‘이자놀이’를 지극히 권장했고 결국 이로 인해서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적 기반을 가진 개신교가 ‘자본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한국교회의 ‘세 불리기’ ‘울타리치기’ ‘헌금/십일조강요’ ‘승리주의’는 그럴만한 ‘근거’를 갖는다.
‘부자가 천국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는 얘기가 교회에서 금언이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외국의 교회가 이러한 역사적인 한계를 인식한 후에 반성을 통해서 이를 극복해가면서 점차
종교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된 기반을 갖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교회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했을 당시의
아주 원초적인 믿음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를 탄생시킨 루터의 고향 독일에서는 400년 후에 니체가 나타나 통렬한 자기반성 끝 (그런)신을 죽였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그런 신’에만 매달려 있다.
‘자본을 대변하는 신’을 믿는 이들이 그들의 교회에 자신의 소유임을 ‘경고’하는 ‘경보장치’를 당당히 달아놓고,
울타리를 치며 괜히 손해 볼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리라.
이렇다 보니, 길가는 유랑객(거지)에게 텐트 칠 곳 한 평 마련해 주지 못하고 박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둑 맞을 것을 오죽 많이 쌓아 놨으면 그리하겠는가?
반면 카톨릭 성당의 (그나마 개신교에 비교해서 나은)포용력은 어디서 오는가?
과거 종교개혁기 이전에 교황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에게 마저
‘욕심을 버려라’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받쳐라’ ‘돈을 쌓아두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외치면서
그렇게 농민들이 헌납한 돈으로 자신들의 재산은 끝없이 축적해왔던 표리부동함을 보였다.
하지만 교황권은 스스로 그것을 지키지 못했음과는 별도로 ‘자본’과 ‘권력’을 구하지 말 것에 대해
줄기차게 ‘교리적’으로 요구해왔다.
그들은 돈을 축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계속적으로 금기시 하면서
상대적으로 ‘자본의 관성’을 어느 정도는 피해갈 수 있는 ‘교리’와 ‘가치’를 고수했다.
이렇다 보니, 종교개혁으로 개신교와 분리된 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있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보다는 자본의 속성에 의한 폐해가 덜하다.
대부분의 기독교회와 달리, 성당의 정문이 늘상 열려져 있고, 어느 성당이나 ‘경보장치’가 붙어 있는 곳이 없으며,
길가는 나그네(거지)에게 항시 ‘텐트 칠 한 평의 땅’이라도 제공해 주기 위한 성의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거쳐 온 흔적이다.
사회적으로도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님 등이 큰 일을 하시기는 했지만,
그 규모와 신도수에 비하면 훨씬 규모가 적은 천주교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의 활동이 돋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역사가 내포된 결과이다.
개신교 이름난 대형교회들의 목사들이 ‘사기’와 ‘세습’ ‘헌금을 가지고 벼라별 추잡한 사업’을 하는 등으로
그 ‘자본주의 속성을 고도화한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추태를 보이는 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엄청난 사회적 기회(자본/젊은이들의 노동력)가 교회로 빨려 들어가고 있지만,
그들은 그 중에서 단 5%라도 사회에 환언하는지 되새겨볼 일이다.
그들 개신교도들이 예수님께서 항시 실천으로 보이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방법은 자신들의
신도들 관리를 위한 경조사비 지출과 공개적으로 생색낼 때 뿐이다.
그들은 그 기회의 대부분을 교회 건립비용 등으로 이용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일에 너무 열중한 그들에게는 거지(유랑자)를 돌볼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보다 정확히 얘기를 하지면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떠돌이 거지를 성전에 받아주면 안 되는 것이다.
철저히 ‘대차’를 따져서 되돌아올 이익이 있을 곳만 투자하고 득이 되지 않을 일에는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
그들의 집중된 사고방식은 기업가들의 그것과 한 치가 다르지 않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교회와 성당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랑의 과정에서 내가 거치는 성당과 교회... 그리고 문을 두들기면 각자의 표정을 가지고 나타나는
‘그들’을 대면하면서, 나는 그들을 받치고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그렇게 종종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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