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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의 생각~/우리문화엿보기

성군의 리더쉽(세종vs정조)

 

 

▶세종은 권한 위임을 통해 즉위 초기의 기싸움을 신하들끼리 해결하도록 하고 자신은 개혁 프로젝트에 매진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마시고, 대의를 지키소서!"

세종 5년(1423년) 2월 19일,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꽃 향기가 퍼질 무렵 경복궁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염이 허연 대신들부터 새파란 초급 관료까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영의정의 선창에 따라 비장한 외침을 거듭하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업무를 거부한 채 벌이는 '파업' 상황이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관숙과 채숙의 일을 기억하옵소서!"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외침을 들으며, 텅 빈 편전을 홀로 지키고 있던 젊은 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관숙과 채숙을 기억하라니! 반역을 꾀한 형제들을 사형에 처한 주공(周公)을 본받으라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더 이상은 이렇게 내버려둘 수도 없겠지….

"젊은 왕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5년 전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아버지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통치는 태종이 사망한 후인 바로 전해 5월에야 시작한 '초보'였다.

그런데 자신보다 먼저 용상을 예약했던 친형 양녕대군이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켰다. 나라에서 금지한 사냥을 하거나 술판을 벌이는 정도는 예사고, 남의 첩을 훔치거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기까지 했다. 이런 난행은 아버지 태종이 죽고(세종 4년 5월) 아우인 세종이 실질적인 통치를 막 시작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사실 양녕이 자신보다 뛰어난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전설이고, 실제의 양녕은 세자 자리를 빼앗긴 것을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나 세종은 적당히 얼버무렸고, 양녕의 꾐에 빠져 함께 소란을 벌인 사람들만 애꿎게 처벌하고는 했다. 이렇게 되니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공의를 우선해야 할 임금다운 처사가 아니라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양녕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까지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다.

 

당연히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나오더니 급기야 온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동맹파업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었다.

태종이라는 냉혹하고 노회한 군주 밑에서 숨도 못 쉬고 지내온 신하들은 이제 막 홀로서기에 나선 젊은 군주를 "잘 길들여서 기 좀 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고 있었다. 이것이 법 질서 수호라는 명분과 합쳐져 대대적인 항명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젊은 군주와 기 싸움이라는 일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권위를 내세워 신하들을 가차없이 처벌할 수는 없었다. 자신도 이제 막 수습 딱지를 뗀 초보 군주인 데다 사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여전히 불안정한 상황 아닌가. 이제는 태조와 태종 시대와 같은 칼과 모략의 시대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화와 이성의 시대가 되어야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마음을 얻고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야만 한다. 탄압정책을 잘 못 취했다가는 더 큰 반발을 불러올 것이고 더 나아가 왕조 자체가 뒤집힐지도 몰랐다.

어찌 하나? 저들의 말대로 형을 중벌에 처한다? 그 역시 안 될 일이었다. 형제 간의 사적인 정을 떠나서, 몇 년 전 아버지 태종이 장인의 가문을 무참히 도륙하는 모습을 보며 했던 다짐, 새 시대의 정치는 더 이상 폭력의 정치가 되지 않게 하겠다, 정치범을 양산하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일이 이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해야 했다. 막상 저들 말대로 형을 처단하면 어떻겠는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친형을 죽였다"고 두고두고 손가락질하지 않겠는가?

세종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실질적인 왕이 된 후 처음 맞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노론이라는 강력한 반대세력에 맞서야 했던 정조는 강력한 공포정치로 신권을 억눌렀다.
"잡아라, 저놈 잡아라!"
"저쪽 지붕 위다! 놓치지 마라! 화살을 쏴!"

정조 1년(1777년) 7월 28일 한밤중이었다. 즉위한 지 1년이 좀 넘은 왕이 잠시 머물고 있던 경희궁에 별안간 소란이 벌어졌다. 누군가 궁궐에 침입했고 지붕을 타고 정조가 묵고 있던 존현각까지 접근했던 괴한은 호위무사에 의해 발각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괴한은 한 사람도 아닌 20여 명에 이르렀다. 범인을 현장에서 잡지는 못했지만 전말은 곧 밝혀졌다.

이른바 '삼대 역모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정조의 반대파였던 노론 벽파의 홍계희 가문에서 주도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동생이자 정조에게는 외삼촌인 홍낙임까지 연루되어 있으며, 궁궐을 수비하던 군졸, 하급관료, 궁녀 등이 줄줄이 역모에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정도면 언제 임금의 목이 소리 소문 없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위기였다.

"전하의 친족이라도 사정을 두셔서는 아니되옵니다! 관숙과 채숙을 기억하소서!"

동생을 죽여야 한다니…. 신하들을 잠자코 지켜보던 젊은 왕 정조는 자못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처벌 요청을 일단 물리치고 침전으로 돌아가던 그의 입가에는 그러나 얼핏 알아보기 힘든 엷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조선의 왕들과 신하들은 즉위 초기 치열한 기싸움을 벌였다. MBC 대하사극 '이산'.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신변의 위협을 많이 받았다.


조직의 리더가 되면 한동안은 진통과 갈등을 겪는다. 새로운 리더에게 쏟아지는 변화의 기대와 열망에 부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방식에 안주하거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충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산통이다. 그런데 조선의 두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과 정조는 판이하게 다르게 대처했다.

흔히 세종에게는 태종의 '희생'이 있었다고 한다.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덕분에 세종이 마음 편히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세종이 목숨을 걸고 쓰러뜨려야 할 상대는 딱히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절로 신하들의 신뢰와 충성을 얻고 성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종을 위해서였다고 했지만 태종이 외척과 공신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높아지는 것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의 권위였다. 그 권위가 없어지자 세종은 스스로의 힘으로 리더가 되어야만 했다.

세종이 신하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던 것은 늘 공부하는 자세였다. 성군이라면 모름지기 호학(好學)해야 한다는 상식이 통하던 시대에, 어릴 때부터 책에 묻혀 살았던 세종은 신하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집현전을 확충하고 날마다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에 임함으로써 무인 기질이 넘쳤던 태조나 태종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했다. 말만 잘한다고 기업의 CEO가 될 수 없듯 책 좋아하는 왕이라는 호의적 평가만으로는 신하들을 마음으로부터 복종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신하들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세종은 먼저 신하들의 태도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 결과 '일치단결'해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아도 사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일단 신하들의 뜻에 굴복하는 듯 양녕을 처벌했으나, "전답을 몰수하고, 청주로 보내 살도록 한다"는 미온적인 조치에 그쳤을 때 나온 반응에서도 뚜렷했다.

젊은 신하들은 이게 무슨 처벌이냐, 이럴 바에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핏대를 올렸지만 나이 지긋한 대신들은 이제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젊은 신하들은 기존 체제에 연연할 것도 없고,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이상주의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나이가 든 축은 이제껏 쌓아 놓은 것도 있고 해서 과격함에는 한계가 있다.

세종은 이 차이를 이용했다. 대신들에게 업무를 대폭 위임한 것이다. 위임을 해 놓으니 국정에 대한 불만은 1차적으로 대신들 선에서 처리됐다. 욕을 먹어도 대신들이 먼저 먹었고, 싸움이 나도 대신과 신진들 사이에서 먼저 났다.

▶KBS '대왕세종'의 한 장면.
그러면 세종은 이를 즐기고 있었던가? 아니었다. 세종은 위임을 통해 얻은 여유를 이용해 오히려 전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세종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찬란한 업적인 한글 창제, 자격루 제작, 갑인자 주조, 아악 정리 같은 '혁신 프로젝트'를 앞장서 밀어붙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단하게 보이는 이런 프로젝트들은 참신한 비전이었고 혁신적이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격루나 혼천의 같은 것은 대부분의 신하에게는 책으로나 보던 것이었다. 아악을 새로 정리한다는 것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성인의 사업이라 하여 평소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런 꿈같은 일이 지금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세종은 신뢰와 존경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지엄한 왕과 긴밀하게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이들은 박연, 장영실, 신숙주 같은 새파랗게 젊은 중하위 공직자였다. 이는 젊은 신하들에게 '이번에는 나도…'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임금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힘써 보자고 다짐했을 만하다.

이렇게 세종은 절망적인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양녕대군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말썽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조정은 논란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웬만한 불만은 대신들 선에서 무마됐고 어쩌다 어전까지 비판의 목소리가 올라와도 한창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우선순위가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세종은 이런 상황을 유도했다.

"아직도 그런 자잘한 문제에 연연하고 있느냐? 봐라, 위대한 시대가 보이지 않느냐? 나와 손잡고 그 시대로 달려가지 않겠느냐?"



"은전군 이찬에게 자결하도록 명한다!"

마침내 냉혹한 왕명이 떨어졌다. 정조 1년 8월 11일, 궁궐 난입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불과 보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끝까지 형을 감싸주었던 세종과 달리 정조는 배다른 동생을 가차없이 죽음의 길로 보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세종에 대한 신하들의 기 싸움은 왕권을 한번 떠보는 것이었다면 정조는 실질적인 위협 속에 놓여 있었다. 최대 파벌인 노론이 반대파였고 아버지는 자신을 지켜주기는커녕 먼저 희생돼 버렸다. 친인척들도 적이 더 많다. 현명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자칫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 초유의 궁궐 습격 사건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너무도 상식 밖의 일이다 보니 대소 신료가 모두 임금 앞에 납작 엎드렸다. 주동자들이 가장 많이 연루된 노론은 입장이 더욱 곤란했다. 정조는 이 기세를 몰아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은전군을 제거하고, 홍계희 가문을 거의 멸문시켰다. 노론, 아니 신하들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강경 일변도의 정책은 그만큼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완전한 승리'를 꿈꾸다가 도리어 '완전한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정조는 '불완전한 승리'를 거두기로 했다. 은전군과 홍상범 등은 죽이되 홍낙임 등은 죽이지 않았다.

또 다른 반대세력인 김귀주는 죽여도 그 배후에 있던 정순왕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문숙의는 처단했지만 화완옹주는 처단하지 않았다. 이 같은 선택적 숙청은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우선 최대 세력인 노론 벽파에게는 '이 싸움을 끝까지 벌이면 모두 다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겠느냐'는 메시지였다. 또 '처단해야 마땅할 역적'을 남겨 둬 사실상 조정을 계속 비상상태로 유지하려 했다.

기강이 해이해질 만하면 "아직도 역적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라며 신하들을 긴장시킬 수 있고, 반대파에게는 예전의 잘못을 지적하며 은근히 경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은 성공했다. 정조 지지파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노론 벽파나 정순왕후 등은 명분도 없고 실력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섣불리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성군이 되려면 억지 복종이 아닌 자발적인 복종이 필요했다. 정조는 이 문제를 자신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실력으로 해결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 군주였다. 엉겁결에 세자가 되고 곧바로 임금이 되었던 세종과 달리, 18년간이나 세손 생활을 하며 제왕에 필요한 학업을 이미 완성한 상태로 즉위했다.

그래서 학문 토론장인 경연 등에서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임금을 가르쳐야 할 경연관이 임금보다 아는 게 없으니 면목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리면 선생이 학생의 작문을 채점하듯 여기는 한자가 틀렸다, 이 표현은 이런 경우에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면서 돌려주곤 했다.

이러다 보니 웬만큼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왕 앞에서 말 꺼내기를 두려워했다. 세종은 원로들의 권위를 높임으로써 신권의 결집을 막았지만, 정조는 그들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었던 것이다.

정조는 또 경희궁 습격 사건 후 오른팔인 홍국영에게 직급은 낮지만 실권이 있는 많은 직책을 겸임시켰다. 홍국영을 통해 조정 전체를 속속들이 감시하고 지배하는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습격 사건이 자작극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생긴다.

20여 명에 이르는 괴한이 한 명도 잡히지 않았고 사건의 전말이 너무나 신속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조는 기회를 잡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위기를 통해 칼자루를 잡자 다시 놓지 않았다. 어쨌든 정조는 즉위 직후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를 최대의 기회로 활용했다.

처음 찾아온 위기에 대처하는 세종과 정조의 방식은 판이했다. 그들이 처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종은 신하들의 요구에 굴복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며 '나약한 풋내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정조는 잠재적인 적들을 무장해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단단히 잡아 나갈 필요가 있었다.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는 자신이 처한 상황,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려는 가치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함규진·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출처 : [이코노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