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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이선유

* 이는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6) 이선유 판소리(고수:한성준)' 음반(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06, 1CD, 1995년 제작. 노재명 기획/해설/사설 채록)
해설서 1~11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1930년대 중반 판소리 명창 이선유 모습.

판소리 명창 이선유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이선유(1873∼1940?, 李善有 또는 李善裕)는 송만갑, 전도성, 유성준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편제 판소리 명창이다.
  이선유의 음반과 가사지, 1930년대 『매일신보』, 조선가요연구소의 『정선조선가요집』(일본 콜럼비아사, 1931)에는 ‘李善有’로 기록되어 있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에는 ‘李善裕’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창극사』에만 ‘李善裕’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기록에는 모두 ‘李善有’라 했으므로 이선유의 한자 이름은 ‘李善裕’보다 ‘李善有’일 가능성이 높다.
  구한말과 일제 때에 활약한 동편제 명창 가운데 녹음을 남긴 대표적인 이는 송만갑, 이선유, 유성준, 장판개, 김정문, 박중근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이선유는 송만갑 다음으로 많은 음반을 남겼다. 이선유의 녹음은 유성준의 녹음과 함께 동편제의 대명사격인 송만갑의 소리와 가장 잘 비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이선유는 음반뿐 아니라 자신의 판소리 다섯 바탕을 담은 창본 『오가전집』도 남겼다. 김택수가 펴낸 이선유 창본 『오가전집』(경성:대동인쇄소, 1933)은 한자 없이 거의 모두 한글로만 기록되어 있고 각 대목에 장단까지 명시되어 있으며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오가전집』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오가난 츈향가, 심쳥가, 화용도, 수궁가, 박타령을 일음이니 츈향의 열졀과 심쳥의 호셩과 화용도의 신의와 수궁가의 졍츙과 흥보가의 우애가 죡히 천추에 감흥될만 하며 왼세상을 격발케 할만한지라. 륜이난 사람의 소품이니 누가 양심이 읍시리요. 만일 우부우부로 한번오가를 듯게하면 본연의 승품과 고유지심이 부지불각지즁에 알연자발하리니 읏지풍화의 도음이 되지아니하리요 교남리선유씨가 젹근고공 삼십여년하야 가사의 은부함과 음죠의 화창함이 신묘지경에 일으러 죠선셩악에 잇서서난 거의당세에독보라 할만한지라 사셜의 졍묘한것과 음죠의증확한거슬 추리여 오가일편을 수집하니 거의 읍서질지경에잇난 죠선재래성악에 특색이될거시며 일반성악가의 도음이될가하노라. 著者識”

  이와 같은 글을 보면, 김택수가 없어져 가는 판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선유의 판소리를 창본으로 정리하여 『오가전집』을 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택수가 쇠퇴해 가는 판소리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창본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이선유의 판소리를 표본으로 삼은 것은 그 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오가전집』이 발간될 당시, 송만갑이 개발한 신 동편제가 크게 유행하여 옛 동편제는 배우려 하는 이가 드물었고 없어져 버릴 위기에 놓여 있었다. 김택수는 그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옛 동편제를 간직한 이선유의 판소리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생각된다.
  김택수는 『오가전집』의 머리말에서 “가사의 은부함과 음죠의 화창함이 신묘지경에 일으러 죠선셩악에 잇서서난 거의당세에독보라 할만한지라” 하며 이선유의 판소리를 극찬했다. 그 만큼 김택수는 이선유의 판소리를 높게 평가하고 좋아했다고 하겠다. 이선유가 송만갑처럼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명창은 아니었으나 당시 고제 판소리를 좋아했던 몇몇 귀명창들에게는 상당한 갈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2월, 콜럼비아 음반회사는 이선유의 음반(Columbia 40268-A  B)을 발매하면서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 “當代一人인李善有名唱의入神의技”이라는 문구를 넣어 홍보한 바 있다.(1931.11.21.『동아일보』, 1931.12.1.『매일신보』)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광고에 있는 ‘入神의技’, 『오가전집』의 머리말에 있는 ‘신묘지경’이라는 찬사는 당시 이선유의 판소리에 대한 귀명창들의 평가가 어떠했는가를 나타내 주는 삽화다. 이선유가 당시 인기가 없는 옛 동편제를 고수했으면서도 동편제 명창 중에서는 송만갑 다음으로 많은 음반을 남긴 것은 남다른 예술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오가전집』의 범예 기록 중에서 ‘고죠’, ‘즁고죠’, ‘신죠’라는 중요한 언급이 있다. 판소리의 유파를 시대별로 구분한 고제(古制), 중고제(中古制), 신제(新制)라는 기록은 판소리가 고제, 중고제, 신제(동편제와 서편제) 순서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필자가 이선유의 녹음을 듣고 채록한 사설을 『오가전집』과 비교해 본 결과, 일부의 토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설이 일치했다. 일부는 『오가전집』에 기록된 사설과 전혀 다르게 녹음되었거나, 『오가전집』의 사설이 녹음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오가전집』에는 아니리로 기록된 것이 녹음에서는 장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오가전집』에 기록된 장단과 전혀 다른 장단으로 녹음된 경우도 있었지만 사설 전체가 완전히 다른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판소리는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편곡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토는 말할 것도 없고 장단과 사설도 즉흥적으로 바꿔 짤 수 있기 때문에, 일부의 토와 장단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 『오가전집』의 정확성을 크게 좌우하지는 못한다. 특히 유성기음반은 약 3분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는 시간 제약이 있으므로 명창들이 짧은 시간 내에 많이 녹음하기 위해 아니리를 줄이고 급하게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해 볼 때 『오가전집』은 이선유의 판소리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창본이라 생각된다. 옛 명창이 불렀던 판소리를 장단까지 명시하면서 사설을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해 놓은 창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오가전집』은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선유의 사진은 총 세 장이 확인되었는데 『정선조선가요집』(1931), 『오가전집』(1933)에 실린 것과 박귀희가 가지고 있던 사진(1930년대)이 남아있다.
  이선유의 약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선창극사』(215∼216쪽)의 기록이 유일하다.

  “李善裕는 距今六十七年前에 慶尙道晋州郡에서 出生하였다. 十餘歲부터 소리工夫를 始作하여 十五歲時에 宋禹龍門下에 이르러 三年間 薰陶를 받은後 獨工으로 繼續하다가 金世宗의 指針을 받어서 차차 方向을 알게되었으니 그때에 나이은 三十고개를 바라볼 時期였었다. 이리하여 金昌煥 朴基洪等 先輩를 從遊하여 實際的見聞을 넓혀 소리는 完域에 達하게 되었다. 그後 京鄕間을 다니면서 名聲을 들치었고 技倆은 더욱 熟達하여졌다. 至今은 故鄕晋州에서 後進을 養成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한다. 그所長은 兎鱉歌라 한다.”

  『오가전집』(1933년 발행)의 머리말에 “리선유씨가 젹근고공 삼십여년하야”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오가전집』의 발행 시기를 기준하여 계산하면 이선유가 판소리에 입문한 시기는 1903년 경이 된다. 『조선창극사』 215쪽의 “十餘歲부터 소리工夫를 始作하여”는 기록을 그의 출생 시기인 1873년에 맞춰 계산한다면 입문 시기는 1883년 경이 된다. 따라서 상기 두 문헌의 기록에서 이선유의 판소리 입문 시기가 서로 약 20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입문 시기를 알 수 없다.
  『조선창극사』 215쪽에 “十五歲時에 宋禹龍門下에 이르러 三年間 薰陶를 받은後 獨工으로 繼續하다가 金世宗의 指針을 받어서”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선유가 송우룡에게 배운 것은 주로 수궁가였을 것이고 김세종에게 배운 것은 주로 춘향가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창극사』(1940년 발행) 215∼216쪽에 “李善裕는 距今六十七年前(1873년)에 出生하였다. 至今은 故鄕晋州에서 後進을 養成하기에 힘을 쓰고 있다한다”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이선유는 1873년에 태어났고 1940년 무렵에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된다.
  현존 최고령 명창 정광수(現 86세)는 1991년 2월 12일에 필자에게 “이선유를 본 적이 없고 잘 알지 못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대부분의 국악인이 이선유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한승호, 김소희, 이윤례, 김수악이 이선유에 대해 몇가지 알고 있었다. 한승호는 1993년 9월 29일 이선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나 한승호는 17세(1940년) 무렵에 이선유 명창을 처음 보았는데 당시 80세(1860년 출생) 가량 된 노인이었다. 당시 이선유 명창은 판소리를 그만두고 진주 감옥 간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이선유 명창은 안경을 썼으며 콧수염을 길렀고 작은 키에 몸이 외소했다. 성 군수가 나 한승호에게 후원금을 주며 이선유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라고 추천하였고 이선유 명창에게 잘 가르쳐 주라는 편지까지 써 주었다. 나 한승호는 성 군수의 편지를 가지고 이선유 명창을 찾아갔으나 너무 연로하여 판소리를 배울 수 없었다. 대중가요 작곡가 이재호 씨는 이선유 명창의 아들이다.”(1993.9.29.13:30∼16:30.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교통반점에서 한승호 증언)

  한승호가 증언한 이선유의 아들 이재호(李在鎬)는 대중가요 작곡가로 활동했는데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 황문평의 『이야기 가요사, 돈도 명예도 사랑도』(서울:도서출판 무수막, 1994) 160∼167쪽에는 이재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60년 6월 4일 한국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던 이재호가 세상을 떠났다... 본명이 이삼동... 이재호는 1919년 10월 9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일찍 조실부모한 그는 고모와 누나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진주고보에 다닐 때 트럼펫을 잘 부는 형님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하여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후 이재호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동경 니카노에 있는 일본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하여 장차 바이올린 연주자로 대성해 보겠다는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콘체르트 같은 작품은 손도 못 대고 소품 정도밖에 소화시키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루에 5시간 이상 연습에 몰두하다가 드디어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건강도 회복할 겸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진주에서 무료하게 지내던 이재호는 당시 크게 유행한다는 각 레코드사의 가요를 들으면서 이러한 멜로디들이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다면 가요곡을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골 생활의 단조로움에서도 벗어날 겸, 서울에 올라온 이재호는 오케 레코드사 문예부 방예정을 통해 오케 레코드사에 정식으로 작품 몇 곡을 선보였다. 이때 그는 예명을 스스로 지었는데 무적인(無笛人)이라는 아호를 즐겨 썼다... 1981년 MBC 방송국에서 전국 남녀를 대상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요 베스트 20곡’ 선정을 실시했다. 당시 처음 등장한 컴퓨터 시스템을 동원한 과학적 산출 방법이었다. 가수 중심이 아니고 곡 중심으로 측정해 본 결과 각계각층에서 뽑은 곡 중 이재호의 작품이 80곡이라는 최고의 기록이 나왔다. 그래서 한국 가요계에서는 슈베르트라는 별명을 추서했다. 유가족으로는 김정선 여사와 큰아들 범승, 범용, 범수, 범익 그리고 막내딸 하나를 남겼다... 큰아들 이범승은 비엔나 국립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전공하고 1984년 귀국했다. 그의 딸은 70년대 ‘사랑은 눈물의 씨앗’, ‘먼데서 왔수다’의 히트 곡을 불렀던 가수 이상열과 결혼했으며 김정선 여사는 불교에 입문, 미국에서 교포들을 위한 불교 포교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박찬호의 『한국가요사』(서울:현암사, 1992) 297∼300쪽에는 이재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호의 본명은 이삼동(李三童)이다. 1914년 진주 풍류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누이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자랐으나 트럼펫 주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일본의 고등 음악학교에 유학하여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는 20세 때부터 ‘무적인’이라는 필명으로 작곡을 시작하여 오케에 입사했다... 태평으로 옮겨간 뒤 ‘이재호’라는 펜네임을 쓰면서 가수 백년설(白年雪)을 만나 단연 그 두각을 돋보이게 되었다... 동향(同鄕)의 김정선(金貞瑄)과 결혼했다... 이재호는 1960년 7월, 숙환을 이기지 못하고 43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하여 로스앤젤리스에서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가요사』에 언급되어 있는 이재호의 아버지인 ‘진주 풍류객’이 바로 이선유이다. 이선유의 장남(트럼펫 연주)과 차남 이재호(대중가요 작곡, 바이올린 연주), 손자 이범승(클래식 작곡 및 지휘)이 서양음악을 했고 이선유의 후손 중에 국악을 한 이는 없다. 이재호의 생몰연대에 대해서 여러 문헌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선유가 1940년 무렵까지 살아있었기 때문에 이재호(1910년대 출생)가 조실부모 했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김소희는 1991년 6월 26일에 필자에게 “이선유가 진주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리고 『조선창극사』 215쪽을 보면 “李善裕는 距今六十七年前에 慶尙道晋州郡에서 出生하였다” 하며, 1930년 9월 28일자 『매일신보』와 1934년 6월 22일자 『조선중앙일보』에 ‘晋州 李善有’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선유의 고향과 주된 활동지역은 진주였음이 확인된다.
  이국자의 『판소리 예술미학』(서울:도서출판 나남, 1989) 285∼286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선유,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운 바 있는 김수악... 이윤례... 이윤례의 외삼촌 이선유... 이선유는 하동출신이라는 것, 70여년 전 열댓살무렵(1919년의 난리. 3·1운동?) 하동서 난리가 나서 진주로 넘어왔다는 이야기.”(이윤례 증언)

  1992년 1월 18일자 『세계일보』의 ‘전통藝脈을 이어가는 사람들  才人(69) 굿거리춤 金壽岳씨’에는 “(김수악은) 李선유씨를 스승으로 모시고”라는 기록이 있다.
  방금선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가 이선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한다.(노재명, “오비취의 생애와 예술” 『오비취 판소리  가야금병창 음반 해설서』 엘지미디어 LGM-AK004, 1CD, 1995)
  다음은 이선유에 관한 문헌 기록으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것을 모두 정리한 것이다.

● 1930년 9월 22일, 이선유가 JODK 라디오에 출연하여 단가와 적벽가 등을 방송(1930.9.22.『매일신보』)
● 1930년 9월 28일, 이선유가 JODK 라디오에 출연하여 단가와 적벽가를 방송(1930.9.28.『매일신보』)
   이 방송 프로그램에 ‘晋州 李善有’라는 기록이 있다.
●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단가 <편시춘>과 심청가 중
   <승상 부인 찾아가는 데> 음반(Columbia 40132-A  B)이 1931년 1월에 발매되었다.(1931.1.17.『동아일보』)
●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수궁가 중 <녹수청산>과 <팔란세계>
   음반(Columbia 40173-A  B)이 1931년 4월에 발매되었다.(1931.3.21.『동아일보』)
●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심청가 중 <소상팔경> 음반(Columbia 40192-A  B)이 1931년 6월에 발매되었다.(1931.5.22.『동아일보』)
●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수궁가 중 <수궁에 들어가는 데>와
   <토끼 배 가르는 데> 음반(Columbia 40263-A  B)이 1931년 10월에 발매되었다.(1931.10.10.『동아일보』)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수궁가 중 <새타령>과 춘향가 중
   <이도령이 광한루 구경하는 데> 음반(Columbia 40268-A  B)이 1931년 12월에
   특별 신보로 발매되었다.(1931.11.21.『동아일보』, 1931.12.1.『매일신보』)
   당시 콜럼비아 음반회사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이선유의 음반을 홍보하였다.
  “苦待하시던콜럼비아特別新譜發賣
   當代一人인李善有名唱의入神의技
   兎公傳 새타령
   春香傳 廣寒樓景(안젓다니러서) 一枚”
● 朝鮮歌謠硏究所의 『精選朝鮮歌謠集』(日本콜럼비아社, 1931)에 이선유의 사진이 실려있다.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단가 <천지광탕>과 춘향가 중
   <홍로의 불> 음반(Columbia 40276-A  B)이 1932년 1월에 발매되었다.(1931.12.15.『동아일보』, 1931.12.17  25.『매일신보』)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단가 <월하몽>과 심청가 중
   <곽씨 부인 품팔이> 음반(Columbia 40292-A  B)이 1932년 2월에 발매되었다.(1932.1.20.『동아일보』, 1932.2.11  14.『매일신보』)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춘향가 중 <이별가>와 흥보가 중
   <비단타령> 음반(Columbia 40340-A  B)이 1932년 9월에 발매되었다.(1932.8.15.『동아일보』, 1932.8.18  23  26.『매일신보』)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수궁가 중 <팔경> 음반(Columbia 40353-A  B)이
   1932년 10월에 발매되었다.(1932.9.13.『동아일보』, 1932.9.15  25  28.『매일신보』)
● 이선유가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수궁가 중 <상좌 다툼>, <수궁 경개>
   음반(Columbia 40433-A  B)이 1933년 6월에 발매되었다.(1933.5.20.『조선일보』)
● 1933년, 이선유의 판소리 다섯 바탕 창본이 발간됨(金澤洙, 『五歌全集』 京城:大東印刷所)
● 이선유가 1934년에 폴리도르에서 녹음한 단가 <월하몽> 음반(Polydor 19145-A  B)이 1934년 7월에 발매되었다.(1934.6.22.『조선중앙일보』)
   이 신문 광고에 ‘晋州 李善有’라는 기록이 있다.
●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단가 <편시춘> 음반(Regal C146-A),
   심청가 중 <소상팔경> 음반(Regal C181-A  B),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녹음한
   단가 <천지광탕> 음반(Regal C178-A), 춘향가 중 <홍로의 불> 음반(Regal C146-B),
   수궁가 중 <팔경> 음반(Regal C129-A  B)이 1934년 7월에 발매되었다.(『리-갈레코-드 콜럼비아大衆盤 第一回 七月新譜 1934』
   發行所 京城府 長谷川町一一一 日本蓄音器商會 京城支店 文藝部, 昭和九年七月十日 發行 / 각 유성기음반의 가사지 참고)
● 정노식, “李善裕”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 215∼216쪽.
● 이국자, 『판소리 예술미학』(서울:도서출판 나남, 1989) 285∼286쪽
   김수악과 이윤례가 이선유,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운 바 있다 하며 이선유는
   이윤례의 외삼촌이라 한다. 이선유는 하동 출신이며 70여년 전 열댓살 무렵
   하동서 난리가 나서 진주로 넘어갔다 한다.
● 노재명, “李善有의 音盤에 關한 硏究” 『韓國音盤學 창간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1) 225∼242쪽.
● 노재명, “한국전통음악의 이해와 감상(6) 이선유” 『뮤직피플 1992.5』(서울:월간 뮤직피플) 72∼73쪽.
● 김수악이 이선유에게 판소리를 배운 바 있다 한다.(1992.1.18.『세계일보』
   ‘전통藝脈을 이어가는 사람들  才人(69) 굿거리춤 金壽岳’)
● 노재명, “판소리 명창들의 생애와 예술(6) 이선유” 『핫뮤직 1993.1. 통권 27호』(서울:마인기획) 194∼195쪽.
● 노재명, “이선유의 생애와 예술” 『동편제 판소리 음반 해설서』
   (한국고음반연구회/서울음반 SOER-069, 1LP. SRCD-1064, 1CD, 1992)
● 강예원, “이선유의 판소리 음악어법”(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4)
● 유영대, “이선유” 『판소리 명창 이선유 음반 해설서』(신나라레코드 SYNCD-081, 1CD, 1995)
● 노재명, “오비취의 생애와 예술” 『오비취 판소리  가야금병창 음반 해설서』(엘지미디어 LGM-AK004, 1CD, 1995)
   방금선의 증언에 의하면 오비취가 이선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한다.
● 노재명, “판소리 명창 이선유” 『이선유 판소리 음반 해설서』(엘지미디어 LGM-AK006, 1995)

  이선유는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유성기음반 8면을, 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유성기음반 12면을, 1934년에 폴리도르에서 유성기음반 4면을 취입했다. 유성기음반 24면에 약 1시간 20분 분량의 녹음을 남긴 셈이다. 이 가운데 콜럼비아에서 취입된 20면 분량의 녹음은 이번에 이 콤팩트디스크에 모두 복각되었다. 이선유가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것은 단가와 판소리이다. 다음은 이선유의 유성기음반 목록으로서 지금까지 확인된 것을 모두 정리한 것이다.

[1930년 콜럼비아 녹음]

Columbia 40132-A
短歌 片時春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132-B
沈淸傳 丞相夫人차자가는데 李善有 鼓韓成俊
초판 발매: 1931년 1월
재판: Regal C146-A
      短歌 片時春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발매: 1934년 7월

Columbia 40173-A
水宮歌 톡기타령(上) 李善有
Columbia 40173-B
水宮歌 톡기타령(下) 李善有
발매: 1931년 4월
(앞면에는 수궁가 중 <녹수청산>이,
뒷면에는 수궁가 중 <팔란세계>가
담겨있다. 고수는 한성준이다)

Columbia 40192-A(21107)
沈淸傳 瀟湘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192-B(21108)
沈淸傳 瀟湘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초판 발매: 1931년 6월
재판: Regal C181-A(21107)
      沈淸傳 瀟湘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81-B(21108)
      沈淸傳 瀟湘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발매: 1934년 7월

Columbia 40263-A(21111)
水宮歌 水宮景致   李善有
Columbia 40263-B(21112)
水宮歌 토기비는데 李善有
발매: 1931년 10월
(‘水宮景致’는 토끼가 수궁에
들어가는 대목이다.
고수는 한성준이다.)


[1931년 콜럼비아 녹음]

Columbia 40268-A(21438)
兎公傳 새타령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268-B(21407)
春香傳 廣寒樓景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1년 12월

Columbia 40276-A(21405)
短歌 天地廣蕩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276-B(21410)
春香傳 洪爐의불 李善有 鼓韓成俊
초판 발매: 1932년 1월
재판: Regal C178-A(21405)
      短歌 天地廣蕩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46-B(21410)
      春香傳 洪爐의불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발매: 1934년 7월

Columbia 40292-A(21433)
短歌 月下夢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292-B(21441)
沈淸傳 郭氏夫人품파리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2년 2월

Columbia 40340-A(21439)
春香傳 離別歌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340-B(21415)
興甫傳 비단타령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2년 9월

Columbia 40353-A
沈淸傳 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353-B
沈淸傳 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초판 발매: 1932년 10월
재판: Regal C129-A
      沈淸傳 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29-B
      沈淸傳 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발매: 1934년 7월
(유성기음반에는 ‘심청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수궁가이며
토끼가 수궁에서 나오는 대목이다)

Columbia 40433-A(21408)
兎公傳 坐席닷툼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433-B(21406)
兎公傳 水宮景槪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3년 6월


[1934년 폴리도르 녹음]

Polydor 19145-A
南道短歌 月下夢(上) 李善有 鼓韓成俊
Polydor 19145-B
南道短歌 月下夢(下)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4년 7월

Polydor 19183-A
赤壁歌 孔明配軍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4년

Polydor 19301-B(7268 BF) 34.5.3
春香傳 退令後 李善有 鼓韓成俊
발매: 1934년 5월

  이선유는 단가 5면, 수궁가 9면, 춘향가 4면, 심청가 4면, 적벽가 1면, 흥보가 1면을 녹음했다. 이선유는 수궁가를 가장 많이 녹음하여 “수궁가에 장기가 있었다”는 『조선창극사』 216쪽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이선유의 녹음 중에서 수궁가는 그가 가장 장기로 하던 것이므로 그의 기량이 가장 압축되어 있다. 수궁가는 동편제에서 송우룡, 박만순, 김찬업의 장기로 유명했다. 그 뒤를 이은 송만갑, 유성준, 이선유, 박중근도 수궁가를 잘했고 음반에 많이 취입했는데 이들 중 이선유가 수궁가 음반을 가장 많이 남겼다.
  적벽가는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장판개, 조학진과 같은 동편제 명창들의 장기였다. 그러나 의외로 동편제의 적벽가 음반은 무척 적은데 송만갑, 이선유, 유성준, 장판개, 조학진이 녹음한 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전부이다. 따라서 이들의 음반을 모두 합한 양이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중 한 사람만의 적벽가 음반 양과 비슷한 셈이므로 적벽가에 장기를 보였던 동편제 명창들의 명성에 비하면 녹음량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그 이유는 녹음을 기피했던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선유는 적벽가 중에서 유일하게 <공명 배군>만을 음반 한 면에 남겼는데 유성기음반 중에 전집이 아닌 독집으로는 유일한 녹음이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이선유의 실제 활동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적벽가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두 차례 불렀다는 것이 전부이다.(1930.9.22  28.『매일신보』) 수궁가를 잘했고 수궁가를 가장 많이 녹음한 이선유가 방송에서 수궁가를 부르지 않고 적벽가만 두 번 방송한 점은 미흡한 근거지만 적벽가도 잘했음을 반영해 준다.
  이선유가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유성기음반의 초판은 1931년 1월부터 10월까지 발매되었고 1930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유성기음반의 초판은 1931년 12월부터 1933년 6월까지 발매되었다. 그리고 1934년에 폴리도르에서 취입한 유성기음반의 초판은 1934년에 발매되었다.
  일제 때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콜럼비아’ 레이블로 발매하여 인기가 있는 음반은 보급반인 ‘리갈’ 레이블로 재발매한 바 있다. ‘콜럼비아’와 ‘리갈’ 레이블로 모두 발매된 경우에는 원반(동판)을 리갈 음반 관리번호에 맞춰 보관했고 지금도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는 그렇게 관리하고 있다. 당시 판매량이 많아 자주 생산해야 했던 음반의 경우에는 원반의 소릿골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남아있다.
  이선유가 1930∼1931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유성기음반 가운데 인기있었던 음반은 1934년에 다음과 같이 재발매 되었다.

Columbia 40132-A
短歌 片時春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Regal C146-A
      短歌 片時春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192-A(21107)
沈淸傳 瀟湘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192-B(21108)
沈淸傳 瀟湘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Regal C181-A(21107)
      沈淸傳 瀟湘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81-B(21108)
      沈淸傳 瀟湘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276-A(21405)
短歌 天地廣蕩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276-B(21410)
春香傳 洪爐의불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Regal C178-A(21405)
      短歌 天地廣蕩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46-B(21410)
      春香傳 洪爐의불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353-A
沈淸傳 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Columbia 40353-B
沈淸傳 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재판: Regal C129-A
      沈淸傳 八景(上) 李善有 鼓韓成俊
      Regal C129-B
      沈淸傳 八景(下) 李善有 鼓韓成俊

  신나라레코드에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선유의 원반 녹음을 복사하여 불법으로 제작한 ‘판소리 명창 이선유’ 음반(신나라레코드 SYNCD-081, 1CD)이 있다. 신나라레코드가 복각한 이선유 음반에는 이선유의 콜럼비아 녹음 가운데 두 장의 유성기음반 녹음만 제외하고 모두 담겨있다. 신나라레코드가 복각하지 않은 이선유의 콜럼비아 녹음은 단가 <월하몽>, 심청가 중 <곽씨 부인 품팔이> 녹음(Columbia 40292-A  B)과 단가 <편시춘>, 춘향가 중 <홍로의 불> 녹음(Regal C146-A  B)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선유와 함께 녹음한 고수는 모두 한성준이며 녹음방식은 모두 전기녹음이다. 소리와 북의 녹음이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비교적 균형있게 녹음되었으며, 이선유의 육성과 한성준의 북가락이 생생하고 분명하게 담겨있어 당시의 녹음기술로는 최상의 녹음으로 평가된다.
  이선유의 녹음에서 사설이 일부 와전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사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1991년 7월 10일 이선유의 녹음을 들은 김소희는 “이선유의 녹음을 처음 들어보는 것인데 아주 맑고 좋은 목청을 지닌 명창이며 유성준보다 동편제에 가깝다”고 했다.
  이선유는 동편제 특유의 들고 나가는 성음이 돋보이며 소리 끝을 힘있게 끊어서 매듭을 짓는다. 상성이 약해서 송만갑처럼 높히 질러내지는 못하지만 오랜 시간 연마한 중성과 하성은 아주 구수한 맛이 있다. 빠른 중모리 장단에서 박을 밀고 당기는 붙임새는 가히 신의 목놀림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선유는 너무 고지식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소리를 원칙대로 한다. 그의 판소리는 극도로 절제된 소리이고 양념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추임새를 끌어 내려고 온갖 재주를 부리고 자극적인 양념을 가미해서 화려하게 꾸민 요즘 판소리에 비하면, 이선유의 판소리는 나름대로 지닌 참맛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이끌리는 소리가 바로 이선유의 소리이다. 아무런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쌀밥을 자꾸 먹다 보면 그 깊은 맛을 잊지 못하 듯이, 이선유가 진양조 장단에서 우조 성음으로 진중하게 부르는 담백한 소리는 누룽지, 숭늉 맛처럼 질리지 않는 깊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선유의 녹음을 들어보면 고제의 모습이 많이 발견되는데 지금은 물론이고 65년 전, 녹음 당시에도 상품성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제에 밀려 고제가 도태되던 당시 이선유의 판소리는 팔릴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뚜렷한 제자를 남기지 못했고 그의 판소리는 결국 전승이 끊어졌다. 지금은 이선유의 창본과 녹음이 일부 남아, 귀명창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진 그의 예술을 조금이나마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