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9일
성 파코미오 아빠스
St.Pachomius of Tabenna
San Pacomio Abate
Alto Egitto, 287 - 347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b/1751/0509San%20Pacomio%20Abate.jpg)
'왕의 독수리'라는 뜻을 지닌 성 파코미우스(또는 파코미오)는 290년경 북이집트 에스네(Esneh)에서 이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310년경 군대에 징집되어 이곳저곳에서 복무하던 중 라토폴리스(Latopolis)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인 자선활동에 매력을 느껴 1년간 군복무를 한 후 셰네셋(Sheneset)으로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좀 더 완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은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은수자 성 팔레몬(Palaemon, 1월 11일)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성 파코미우스는 몇 년 동안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스승과 함께 머물며 은수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그는 이집트 상부 테베(Thebes, 오늘날의 룩소르 Luxor 근방)의 타벤니시(Tabennisi)라는 황폐한 마을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에 머물며 기도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너를 찾아와 수도자가 될 것이니 그곳에 머물러 집을 한 채 지어라" 하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하느님의 뜻은 그가 인류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320년경 그곳에 움막을 세웠다. 그러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후 그는 테베에만도 6개의 큰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한 수녀원도 세웠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를 철저히 배격했고, 라토폴리스의 주교회의를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그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 3천 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346년 또는 347년 9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 파코미우스는 공주(共住) 수도생활(vita coenobitica)의 창시자로 꼽히며,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역시 그의 규칙을 여러 번 인용하여 자신의 규칙을 만들만큼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다. 그의 수도생활은 영성적인 요소가 강하면서도 성사적 생활과 전례에 충실하였다. 성사적 생활과 전례는 성 파코미우스 수도자들의 영성을 담는 그릇이자 수도생활에 힘을 불어넣는 활력소였다. 그리고 각자의 영적인 부(富)는 공동생활에 있어서 전체를 위한 선물로 이해하였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파코미오 규칙서',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816-8818쪽.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1권 - '파코미오',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5년, 8813-8816쪽.
(가톨릭홈에서)
![](http://home.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300&maingroup=1&filenm=0509San+Pacomio+Abate2%2Ejpg)
성 안토니오와 같은 이집트인이었으나, 안토니오와는 다른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292년 테베에서 조금 높은 지역인 나일지역 스메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기록상 적어도 한 형제와 자매가 있었다.
그 당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치하에 있었고
312년 Maximin Daia 황제는 Licinius와 싸울 병사를 필요로 하였다.
사람들은 강제로 징집되었고, 병사들은 파코미오 마을에 와서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그를 생포해 갔다.
그는 20세이었는데 좋든 싫든 병역에 종사해야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보내졌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나일에서 테베로 내려갔고
그 도시의 감옥에 밤 동안 갇혀 있었다.
거기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이교인인 파코미오는 이 신자들의 애덕에 감동하였고 이 추억은 그의 전 생애 동안 함께 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에게나 애덕을 베푸는 자였다.
이 확신은 그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개념이 크나큰 중요성을 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파코미오는 안티노에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나일에 돌아갔으나 집에 가지 않고 안토니오처럼 하느님께 봉사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가 세례를 받은(313) 마을 센셋 가까이에 정착하였다.
그는 인류에 봉사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그가 할 수 있는 한 주위의 사람들을 도왔다.
다음에 그는 가까이에 살고 있던 팔레몬이라 부르는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나일강의 타넨니시에 수도원을 세우라는 환시를 보고, 320년경에 그곳에 움막을 세웠다.
그러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므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후 그는 테베에만도 6개의 큰 수도원을 세웠고, 자매들을 위한 수도원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아리아파를 철저히 배격했고, 라토폴리스의 주교회의를 공공연히 비난하였었다.
그가 임종할 즈음에는 그의 수하에 약 3천명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2개의 수녀원도 있었지만,
사제로 서품받지는 않았다.
그는 수도원 공동체 설립의 창시자로 꼽히며,
성 베네딕또 역시 그의 규칙을 여러 번 인용하여 자신의 규칙을 만들만큼, 서방 수도원사의 아버지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b/1751/019line.gif)
아빠스. 라틴어 abbas.영어 abb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