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토니오의 생각~/우리문화엿보기

[스크랩] 경복궁



              경복궁

 

 

      경복궁(사적 제 117호)

*북궐은 경복궁의 별칭으로 고종때 제작된 북궐도형을 근거로 한 조감도*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선조25년 (1592) 임진왜란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없어졌고, 그 후 273년간 재건되지 못하였다. 정궁을 중심으로 한양의 도시계획과 도로망이 형성되었다.경복궁은 정궁이므로 외전, 내전의 배치가 남북으로 정연하고 동서남북에 네 궁궐문이 있다. 경복궁의 의식을 행하는 정전은 근정정이며 정치를 하는 편전은 사정전이다. 왕의 침전은 강녕전이며 왕후의 침전은 교태전이다.대비의 침전은 자경전이며 세자의 동궁은 비현각이다. 세종 때에는 자격루 같은 시계를 발명하여 설치한 보루각,흠경각이 지어지고 , 한글창제를 위한 정음청이 설치되어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경복궁의 집현전에서 세종 25년(1443)에 한글이 창제되었으며 자격루와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가 이 궁궐안에 있었다.경복궁에는 조선의 건축을 대표하는 국보 건물인 근정전(국보223호)과 경회루(국보224호),보물로 지정된 근정문및 행각(보물 812호), 자경전(보물 809호),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의 굴뚝(보물 811호),자경전의 십장생굴뚝(보물 810호)과 풍기대(보물 846호)등 중요한 문화재가 잘 보전되어 있다. 고종 2년(1865)에 흥성대원군에 의하여 중창되기 시작하여 4년간의 공사 끝에 7225칸의 건물이 웅장하게 건립되었고,고종 5년(1868) 7월에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시해 당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고(아관파천) 그 후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경북궁은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간악한 침략정책에 의하여 무참하게 파괴되었고,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안에서 개최하면서 궁궐을 헐어내기 시작하였다. 1917는 창덕궁의 침전이 불타자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교태전 등을 헐어다가 창덕궁의 대조전과 희정당을 복구하는 데 이용하여,궁궐 전각 200여 동이 파괴시켜, 경회루와 근정전 등 10여동만 남았고, 1926년에는 조선총복부 청사가 근정전을 막아서는 위치에 건립되었다.이는 근정전이 대한제국 국권의 상징적 건물이므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궁권 경역은 장방형에 가까우며,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북쪽에는 신무문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내의 아미산과 향원정주변은 자연과 인위적 건조물이 적절히 조화된 아름다운 궁중 후원이며 정전인 근정전 ,경회루와 그 연못은 웅장한 규모와 함께 궁궐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경회루와 연못및 향원지의 연못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의 대표적인 명원도 볼 수 있다 광화문의 해태조각상과 근정전의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들과 경회루 다리 및 영제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조각물들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조각 미술품들이다. 경복궁의 복원의 1990년부터 추진되어 강녕전,교태전 등과 세자궁인 비현각이 건립되었고,1996년에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2001년에 흥례문을 복원하였다.
      사적배치도



      광화문

광화문 정면

광화문 동측면

광화문 후면으로 우측의 빨간천은 대사례의 왕의 과녁(웅후)

광화문 해태상

*해치가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라 백관들이 궁궐을 출입할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해치는 요임금 시대에 세상에 태어났다는 상상의 동물로 해천, 신양, 식죄, 해타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고,무사암을 사용하여 석축 홍예문(무지개모양의 문)을 쌓고 그 위에 3간 2면의 중층 문루를 세운 궁문이다 . 그리고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가운데의 중앙문은 임금의 전용 출입문이고 오른쪽은 문관이, 왼쪽 문은 무관의 출입문이다. 조선시대 광화문 밖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축인 육조거리로 이어져 있었고, 그 육조거리는 경제의 중심축인 종로와 맞닿아 있었다. 광화문은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의 정치와 경제가 만나는 곳에서 위치함으로써 왕조사회에서 궁궐이 갖는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성도 매우 컸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경복궁 부지의 소유권을 조선총독부로 인도하여 이후 경복궁을 임의대로 처리할 바탕을 마련하였다. 그 4년 뒤인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 까지 50일 동안 경복궁에서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전시회같은 것)를 열었다. 시정 곧 새로운 정치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개선되고 진보한 상업 기타 문물을 한곳에 모아 보여줌으로써 상업자를 고무 진작시키고 한편으로는 조선 민중에게 신정의 혜택을 자각시키기 위한 자리였다. 식민통치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0년 통감부를 총독부로 개편하면서부터 남산에 있던 통감부 청사가 비좁아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바로 착수하지는 못하다가 1912년에 조선 신궁 조영에 관한 조사와 함께 총독부 청사를 지을 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총독부는 남산에 있었다.) 1915년 8개년 사업으로 확정짓고 '시가 중요 위치에 있는 광대한 면적'을 찾아 경복궁 근정전 앞 약 3만 평을 부지로 결정하고,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공사에 착수한 것이었다. 이에 광화문 뒤편 흥례문 일대를 없애고, 1926년 조선총독부청사를 완공하여, 광화문은 또다시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처럼 일제의 조직적인 훼손으로 헐려나간 무수한 전각들은 방매되어 일본인들의 사저 등으로 이용되었고, 전각이 있던 빈자리에는 궁궐과 관계없는 불탑, 사리탑 등 유물들로 채워지게 된다.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조선총독부청사 앞을 가로막고 있던 광화문을 없애려 시도하여, 1926년 7월 22일 해체되기 시작하였으나 극심한 반대여론에 부딪혀 마지못해 이듬해인 1927년 9월 15일 경복궁 내의 동북쪽,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로 옮겨졌다. 일제는 총독부 청사를 그 선상에 놓기는 하되 방향은 일치시키지 않고 남산에 맞추었다.(실제 방향은 관악산 방향) 남산은 원래 단군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여러 신들을 모신 국사당이 있었다. 일제는 이것을 헐어 내고 일본의 국가 조상신을 모신 조선 신궁을 세웠다. 그리고 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졸개 노릇을 하면서 조선신궁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 결과 경복궁은 총독부를 뒤따라 일본의 국가 조상신을 향하여 다소곳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음흉한 경복궁 기죽이기였다. 그 결과 경복궁의 축과 약 3.5도 틀어져 버렸다. 총독부 청사 앞의 광화문도 없애버리고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길도 개수하여 태평로에서부터 총독부 청사가 정면에서 바로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 다시 말하자면 경복궁을 정면에서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그 축선을 비틀어 버리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해서 공사에 착수한 지 10년 만인 1926년 정면 71간 8분, 측면 39간, 건평 2,115평 연건평 9,604평의 5층 르네상스식 석조 건물이 완공되었다. 당시 총독부를 짓기 위하여 흥례문, 영제교등
수 많은 건물을 헐어 버렸다. 광화문은 1865년에 중건된 지 60년 만에 경복궁의 정문도 아니요, 동문도 아닌 그저 유배당한 문, 죽은 문이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330여 년이 지나 일본인이 광화문에 가한 두번째 학살이었다. 해방이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석축만 남고 문루가 완파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시절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의 축에 맞추어서, 3.5도 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 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광화문의 현판은 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친필로 '광화문'이라 써서 걸게 되었다. 5대 궁궐의 문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이 궁문은 철근 콘크리지트로 흉내만 내어져 국보도, 보물도 아니고 지방문화재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또한 14미터 가량 뒤쪽에 밀려나있고 방향도 관악산이 아닌 남산을 바라본 3.5도의 축이 벗어나 있다.) 현재의 광화문은 높다란 석축 위에 우진각지붕으로 된 정면 3간 측면 2간 규모의 다포계 양식으로 문루를 세웠다.

영귀(서쪽위치)

천마(동쪽위치)

주작(중앙위치)

*석축에는 3개의 홍예를 둘렀는데, 가운데 문의 천장에는 남쪽의 방위신인 주작(朱雀)이 그려져 있다. 주작은 남쪽의 일곱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또한 좌우측의 협문 천장에는 각각 천마(天馬)와 영귀(靈龜)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나름대로 추정을 통해 다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곧 광화문 - 근정전 - 사정전 -강녕전 - 교태전은 일직선상에 놓여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화문 문전을 흐르는 개천에는 돌다리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개천에는 항상 북악산에서 맑은 물이 흘러 내려 인근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지금은 도로자리.)
현재의 건물은 1968년에 석축을 모아 현재 위치로 옮기고 문루 (門樓) 부분은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으며, 현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바꾸었다. 2006.11월부터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볼 수 없게 된다. 1990년부터 20년 역사(役事)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의 마지막 사업으로 광화문이 철거되고 새 광화문이 건립되기 때문이다. 1층인 돌기둥 육축(76.2평)과 문루(연면적 84평)를 합친 광화문은 11월 공사에 돌입해 내년 3월까지 철거가 완료된다. 2009년 12월 새롭게 선보일 광화문은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위치 (지금 자리에서 남쪽 14.5m 지점)로 전진 배치되며 경복궁 동쪽 담장도 5.6도가량 비스듬히 남쪽으로 내려와 경복궁 전체 면적이 더 넓어진다.

조선 총독부 일본 제국주의는 왜 조선총독부를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앞에 지었을까 근정전 앞을 가로막으며 ....(광화문은 그 당시 헐어 버렸다.) 총독부는 남산의 조선신궁을 향하고 있다. 그 뒤에 서 있는 근정전
      동십자각


경복궁 내외를 경계하고 주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궁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동남쪽 모서리에 있던 망루에 해당하는 건조물이다. 석단은 한양천도 직후인 1395년 조선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할 때 만든 것이며 단상의누각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며 추측된다. 동십자각만 아니라 서십자각도 있었는데 그것은 없어지고 동십자각만 남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궁장(宮長)이 축소되면서 경복궁의 남동쪽 길 가운데에 외롭게 떨어져 나가 있는 건물이 혼자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동십자각은 원래 경복궁 남쪽 담장의 동쪽 모서리에 해당한다. 광화문도 물러 앉고(14미터정도) 경복궁도 물러 안게 되었다. 역사의 수난을 한 번 안으니 문화 유산마저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제 우리는 주어진 것을 새롭게 고치고 다듬어야 하고 올바른 역사를 알고 가야 할 것이다. 고종 2년(1865) 경복궁 재건시 서십자각(西十字閣)과 함께 마주보고 대칭이 되도록 만들었으나, 1926년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서십자각은 헐리고 동십자각만 떨어져 나가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광화문 앞 도로 확장으로 광화문이 뒤로 물러앉으면서 불쑥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 동십자각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경복궁의 수난사를 말없이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옛 기록사진 등을 보면 원래 동십자각의 서편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이곳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 역시 이 무렵 잘려 나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지금은 왜곡된 모습으로 남았지만, 동십자각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궁궐(宮闕)이란 말뜻의 유래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이 합성어인데, 궐은 궁의 입구에 높이 세운 망루(望樓)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 군사를 배치해 망을 보며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망루의 기능보다는 '양식화'되어 궁궐의 입구에 세워지게 된다. 경복궁의 동십자각은 그런 궁궐의 말뜻과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부는 장마루가 깔린 1간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사모지붕에 정면 측면 모두 3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규모는 작으나 공예 기법이나 조각 ,건축 수법이 잘 조화되고 또한 광화문 좌우의 날개 누각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어서 경복궁 건물 가운대 뛰어난 것 중의 하나로 평가 된다. 1972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6년 1월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궁성 서남쪽에 있던 서십자각은 1932년에 건물마저 헐려 현재 볼 수 없다.

      흥례문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으나 세종 8년(1426) 10월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처음에는 홍례문(弘禮門)이라 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흥례문(興禮門)으로 문 이름을 고쳐 짓게 되었다. 이는 당시 청나라 乾隆帝(건륭제)의 이름자인 '弘曆(홍력)'을 피휘(避諱)해서 지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알 수 있는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소장)에 의하면 흥례문은 주변 행각 없이 문만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흥례문 일곽에 행각을 두른 것은 고종 2년(1865) 재건 때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왕비 ,세자의 책봉,외국 사신 접대 ,과거시험 장소등으로 활용되었으며 흥례문에과 연결된 좌우건물에서는 임금이 거동할 때 질서를 바로잡고 군사훈련,의장(儀仗) 등을 담당했던 부서가 있었고, 중앙으로 통하는 금천교는 임금과 백성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통로이다. 이곳 행각은 방과 마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철거 당시 고증자료를 남기지 않아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현재와 같이 고증이 확실한 행각 외형만을 복원하였다. 흥례문일곽은 1910년 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2년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주변행각과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하여, 1915년 일제에 의해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듬해 조선총독부청사를 흥례문 자리에 짓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철거된다. 한편 흥례문을 철거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완공되어 해방이후 정부종합청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철거되기 시작한다. 이후 흥례문 복원계획에 따라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1996년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2001년 10월 흥례문과 주변행각,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등이 복원된다. 흥례문이 일제에 의해 완전 철거된지 85년만의 일이었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중층으로 되어있으며,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문은 왕의 출입문으로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흥례문 현판 글씨는 2001년 10월 새로 지으면서 서예가 정도준 선생이 쓴 것이다.

흥례문의 처마 선과 산줄기를 보면 흥례문이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움을 더욱 만끽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산줄기와 이어진 흥례문은 마치 산줄의 한 능선 같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영제교



 

 

 


궁궐에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갖추는 명당수의 의미로 궁궐 서북쪽 물을 끌어들이도록 만든 것이 금천(禁川)이고,금천은 물만이 아니라 북악산 정기를 궁 안으로 끌어오는 구실도 하였다 금천은 명당에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구실도 하였다. 마치 적군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목책을 두르거나 해자를 파듯이 , 또한 이곳이 왕이 사는 성스러운 명당임을 알리는 구실도 하였다.금천은 저 너머에는 신성한 궁궐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 시키기 위한 상징이라고 하겠다. 태종 11년(1411) 명당수를 궁궐 서쪽 모퉁이로 끌어들여 파고, 왕의 공간과 외부공간을 구분짓는 상징적인 돌다리를 두었다. 경복궁의 이러한 상징적인 돌다리가 바로 영제교에 해당한다. 지금의 영제교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세종 8년(1426)에 와서다. 왕명을 받들어 집현전에서 영제교라는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공식 명칭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3미터, 너비는 너비 9.8m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중앙이 3.4m, 양쪽이 3.2m이다. 다리는 홍예를 둘렀으며, 하엽동자(荷葉童子)로 돌난간을 장식하여 격식있게 지어졌다. 영제교의 가운데는 어도를 만들어 왕의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로 삼았으며, 다리의 동서방향으로는 수각(水閣)을 설치했다. 또 영제교 일대는 조정의 큰 의식이 행해질 때 관원들이 도열하는 의식의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법전의 조회시 참석하는 문무백관은 일단 다리 남쪽에 정해진 위치에 도열해 있다가(문관-동쪽, 무관-서쪽) 시간이 되면 안내를 받아 근정전으로 들어섰다. 영제교 남쪽과 북쪽 좌우로는 네 마리의 상서로운 돌짐승이 조각되어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이 금천의 물길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몸에 비늘로 덮혀 있고 외뿔이 달린 이 돌짐승을 영조 때 지은 <경복궁유관기> 에 '천록(天祿, 天鹿)'이라 적고 있다. 천록은 <후한서(後漢書)> '영제기'에 나오는 상상의 짐승인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즉 '물길을 타고 잠입하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을 수호하려는' 뜻이 영제교의 돌짐승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1926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된 것을 2001년 10월 현재의 원위치로 재건하였다.

영제교 주변의 서수

도랑 바닥을 삼엄한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잡귀들이 얼씬거리지 못할 것 같다. 금천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도 '다리'로 들어오는 잡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금천 위에 놓인 영제교 난간과 개천가에 흥례문과 금천을 노려보고 있는 영험한 동물들을 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근정문


광화문을 들어서서 수문장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잡은 흥례문에 이른다. 흥례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근정문이 있다. 근정문은 근정전(勤政殿)의 정문이다. 근정문은 3문으로 되어있는데,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답도가 있고 큰 가운데 문으로는 왕만이 드나들었다.

월화문(근정문서쪽의 작은문) 과 일화문(근정문동쪽의 작은문)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근정문 양 옆 동서로 난 문으로는 문관과 무관의 전용 출입문이었는데, 동쪽의 일화문(日華門)으로는 문관(文官)이,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으로는 무관(武官)이 드나들었다. (음양으로 볼때 文은 태양이고 武는 달에 해당) 한편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소장)에 의하면 일화문과 월화문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근정전 좌우행각 앞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현재의 일화문과 월화문의 위치는 고종 2년(1865) 재건할 당시 재배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근정문에서도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다.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에 근정전 옥좌에 앉는 절차를 밟았다. 이곳 근정문에서 왕위에 오른 역대 국왕으로는 단종(1452년), 성종(1469년), 선조(1567년)가 있다. 근정문은 궁궐의 법전(정전)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중층으로 된 건물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다포계 양식에 우진각 지붕이다.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여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고종 4년(1867)에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 현재 근정문은 근정문 일대 행각과 더불어 보물 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화문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에 이르기 전에 왼편으로 기별청(奇別廳)과 유화문(維和門)이 보인다. 기별청은 2간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온돌을 깔았는데, 승정원에서 처리한 일을 아침에 기별지(奇別紙)에 적어서 알리는 일을 맡아보았다. 기별청 옆 유화문을 열고 나가면 경복궁의 남서쪽 공간에 위치했던 궐내각사 영역으로 통한다. 궐내각사는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국정의 전반을 논하고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관원들의 활동공간이다. 궁궐에 들어와 있는 관서가 바로 궐내각사 였으며, 관원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이곳으로 출퇴근을 했다. 경복궁의 궐내각사는 역할과 성격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학문과 정치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정무관서로 춘추관(春秋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 등을 두었다. 그 다음 궁궐내에서 왕과 왕실 가족의 생활과 활동을 보좌하는 실무관서로 내반원(內班院), 상서원(尙瑞院), 사도시(司導寺), 상의원(尙衣院), 내의원(內醫院), 사옹원(司饔院), 전설사(典設司), 전연사(典涓司), 사복시(司僕寺) 등을 두었다. 또한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기구로 흠경각(欽敬閣), 보루원(報漏院), 관상감(觀象監), 간의대(簡儀臺) 등을 두었다. 그리고 궁궐을 수비하며, 경비업무를 맡아보던 군무관서로 도총부(都總府) 등을 두었다. 이 궐내각사들은 각자의 역할과 업무에 맞게끔 궁궐내에 자리했었다.

유화문 밖은 고위관료들이 왕을 만나러 가기에 앞서 모여서 국정을 논하던 빈청을 비롯해 수많은 궐내각사들이 밀집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공터로 남아있다. 국정의 주요현안을 처리하던 자치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이곳이 한일합방을 전후로 일제에 의해 모두 헐려나갔으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핑계와 더불어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흥례문 일대의 유화문과 궐내각사들 역시 철거되었고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정면에서 가로 막으며 흥례문 영역에 지어졌다.

유화문과 궐내각사

      근정전(국보 제 223호)


근정전은 경복궁의 으뜸 전각인 법전(法殿, 正殿)이다.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서,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태조 3년(1395) 10월 경복궁 창건 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임금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동서남북 네방향으로 행각이 감싸고 있으며 근정문을 통해서 들어서게 된다.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왕위 즉위식이나 외국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역대 국왕 가운데 정종(1398년), 세종(1418년), 세조(1455년), 명종(1545년)이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조선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石欄)으로 둘려지고, 전후좌우면에는 쌍봉운무늬[雙鳳雲文] 를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되며, 정원 좌우에는 정1품 에서 종9품까지 품석(品石)을 세웠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쌍사자가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는데 사방신은 남주작,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로 각 방위에 맞게(오행사상에 따라) 중앙의 황룡을 보좌하고 있으며 십이지신상 또한 각 방위에 맞게 위치해(개, 돼지는 없음, 용은 중복되므로 생략) 조각되어 있다. 또 근정전의 앞쪽 월대 모서리에는 새끼를 안고 있는 쌍사자가 새겨져 있는데 각각 근정전 처마와 동십자각, 서십자각쪽을 바라보고 있게되어 근정전 앞쪽의 공간을 상서로운 공간으로 만들고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오봉산일월도는 이 곳 근정전은 물론 임금이 거동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설치되었던 그림이다. 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 그림이 있지만 이처럼 늘 임금 가까이에 장식되었던 그림은 아마 드물 것이다. 임금이 과거 시험장에 나가 앉을 때면 그 뒤를 둘러쳐졌고, 다른 행차시에도, 거실에 있을 때에도 그 주변에는 이 그림이 항상 설치되었다. 붉은 해와 흰 달은 음과 양을 상징하기도 하고 왕과 왕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섯 봉우리는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한다. 이 다섯 산은 오악이다.-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을 가르킨다. 해 달 산은 물과 소나무 등과 함께 하늘과 땅, 생물계에서 가장 힘찬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는 천계, 지계, 생물계 모든 신들이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를 보호하여 번창케 하리라는 바람을 나타내고,
또한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바로 임금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어좌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쌍룡을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발톱의 숫자 5개는 황제,4개는 왕인대 7개는 대원군의 숨은 뜻이 (?)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30 m). 측면 5칸 (21 m)의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하여 넓고 높다. 다포양식(多包樣式)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內陣)과 주위를 도는 외진(外陣)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方形)의 보좌(寶座)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御座)와 그 뒤에 오악일월(五嶽日月)을 그린 병장(屛障)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寶蓋)를 달았다. 두공(枓)은 상·하층이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垂舌)이나 앙설(仰舌)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雲宮)으로 되었고, 살미[山彌] 표면의 초화각무늬[草花刻文]이나 단청(丹靑)·금색쌍룡(金色雙龍)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낸다. 전체적으로 장식적 의장(意匠)을 마음껏 담고 있어, 다소 과식(過飾)의 감이 있기는 하나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중앙의 높은 단의 의자가 용상이다. 용상뒤 세폭의 나무 병풍 삼곡병이 용상을 옹위하고 있다. 물결치는 바다, 소나무, 대나무가 우거진 사이에 기암괴석이 들어서 있다. 다섯봉우리와 폭포가 떨어지고 있다. 해와 달, 일월오악병이 놓여 있다. 그 위로는 조각을 더욱 정교하게 한 나무로 된 지붕 모양의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왕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갖가지 상징들이 베풀어져 있다. 실내에 가득 의장기물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근정전 둘레는 2칸 넓이의 긴 집채인 행각으로 쌓여 있으며 남행각 중앙에 다락문인 근정문이 있다. 옛날엔 근정문 남쪽에 흥례문, 그 남쪽에 정문인 광화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행각에서 남행각으로 꺾이면서 두 번째칸 기둥 앞에 서서 약간 굽힌 자세로 바라다 보면, 근정전의 우람한 자태와 처마곡선이 북악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되어 선율을 이룬다. 근정전을 바로 이 자리에 자리잡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임진왜란 이전에 근정전은 청자기와가 이어져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 근정전 기단에는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상과 십이자상 조각이 방위에 따라 새겨져 있다.

  *해태상은 암수 한 쌍씩 조각되었는데 어린 새끼를 거느리고 있어 인자한 모성을 보여준다.* 근정전 기단의 석조 조각물들은 조선시대 조각사의 귀중한 국보유물이다.
    근정전의 내부와 천정

바깥에서 보기엔 중층이지만 안에 들어와 보면 훤히 트여서, 방전(方塼)을 깐 바닥에서부터 소란반자한 천장까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임금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장엄이다. 고주의 내진주(內陣柱)들이 용립하여 숲을 이루어 법전 내부를 깊은 듯이 의도하고 중앙간 고주 주간을 막고 어좌를 마련하였다. 아래 위층이 구분되는 곳에 별창방을 돌리고 창방 위로는 머름을 두고 운궁(雲宮)으로 치장하였으며, 아래로는 낙양각을 하였다. 법전 내의 텅빈 공간은 이 어좌의 장엄을 꾸미기 위한 의장물(儀杖物)들의 배설을 의도하고 설정한 것이어서 내부의 초점은 어좌에 있다. 아득하게 솟아오른 고주 위에서 대들보를 걸고 그 양 볼에 의지하고 우물천장을 꾸몄다. 우물천장 중에는 소란반자가 제일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반자틀과 소란과 청판에 아름답게 치장하는 단청을 하여서 올려다보면 장관을 이룬다. 중앙간 천장 중심부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따로 만들고, 거기에는 채운간(彩雲間)에서 황금빛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장식하였다. 치솟은 붉은 기둥의 천정을 더욱 높게 치켜올려 용들이 마치 천상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처럼 보인다. 황룡은 비늘까지도 그대로 세각(細刻)하였다. 이는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신과의 어떤 소통을 위한 대화로 보인다 . 이곳의 황룡은 근정전 주위 사방신의 정점, 경복궁 사대문 방위신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행의 중앙에 위치한 굉장한 상징적 의미의 용이다.

    근정전의 월대(月臺)

 

근정전 월대 섬돌 월대의 남쪽 중앙 상하에 각각 섬돌을 설치하고 소맷돌을 해태가 허리를 펴고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답도의 봉황무늬,봉황(봉-수컷, 황-암컷)은 성군이 출현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나타난다는 상상속의 동물로 답도에 봉황이 새겨 졌다는 것은 월대 위의 임금이 성군이다라는 상징적 의미와 그런 성군이 되길 바란다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위로 용연이 지나갔다.

 


월대(越臺)라고도 한다. 근정전을 높직하게 올려세우기 위하여 상하 이층으로 돌기단을 구성하여,월대를 만들었다. 근정전은 이 월대에 다시 첨계라는 외벌대 댓돌을 구성하고 건축되었는데, 월대의 뒷부분 넓이보다 앞쪽이 훨씬 넓게 되어 있다. 월대는 박석을 깔아 포장하였는데, 배수를 고려하여 물매를 세게 두어서 근정전이 서 있는 부분보다 돌난간이 설치된 가장자리가 현저하게 낮다. 위치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근정전 월대 남쪽면 중앙 상하에 각각 답도를 설치하였다. 답도 좌우로 좁은 계단석이 놓이고 그 끝에 큼직하게 소맷돌을 설치하여 큰 계단은 세 구역을 이루게 되었다. 소맷돌은 해태가 허리를 펴고 길게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었고, 답도에는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며 노니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답도 좌우 층계석 전면에는 당초무늬가 부조(浮彫)되었다. 좌우로 해태와 같은 벽사의 신이 강역을 수호하여 주는 가운데 넝쿨같이 어울려 사는 백성들이 봉황 같은 왕족을 중심으로 떠받들고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근정전처마

기단의 주위에는 동서남북 네 방면 남과 북에는 하나씩, 동과 서에는 둘씩 계단을 냈다. 그 기둥 끝에는 돌기둥을 세웠다. 돌 기둥위에는 각종 돌짐승들을 앉혀 치장을 하였다.
    신령스런 짐승의 세부류

1. 사신 : 중앙의 나를 전후좌우에서 지켜주는 신령스런 짐승. 좌측의 청룡 우측의 백호 전면의 주작, 후면의 현무를 가리킨다. 사신은 이미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부터 힘과 아름다움을 뽐내며 우리 문화에 깊숙이 스며 들어 있었다. 근정전의 계단 기둥에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각각 있다. 2. 십이지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십이지는 방위와 시각을 나타낼때 많이 쓰인다. 근정전 12계단의 4계단은 사신이 이미 차지하였다. 아래쪽 난간을 따라 북쪽 쥐, 남쪽 말, 동쪽 토끼, 서쪽 닭이 자리 잡았다.양 원숭이도 자리잡았다. 그러나 뱀, 용, 개, 돼지는 없다.이는 사신은 방위및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신 하나는 2시간을 나타내며 중국쪽 황제 방향인 11시 방향쪽의 사신이 빠졌다는 것이다(?) 3.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해태인지 분명하지 않은 서수들이 있다.

  

 

2층 월대의 좌우에 있는 넓적하게 생긴,큰 물동이 드므(순수 우리말) 궁궐에서 드므는 주요 전각의 월대 모퉁이에 설치하여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이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동료가 이미 와 있는줄 알고 다른데로 간다는 설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화재를 막기 위해 놓여졌다.

 

 

품계석 뒤 박석에 박혀 있는 쇠고리, 차일을 칠 때 끈을 매기 위한 것

 

 

 

2층 월대의 좌우에 있는 왕을 상징하는 솥(정)

    관직 서열
문반 쪽 정일품 품계석에는 의정부의 좌의정,우의정을 비롯하여 홍문관.예문관, 춘추관 등의 영사 또는 감사 등이 선다. 종일품석에는 의정부의 좌우 찬성과 의정부.돈영부의 판사등이 도열한다. 정이품석 옆에는 의정부 좌우 참찬, 육조의 각 판서, 한성부의 판윤 등이 선다. 종이품석에는 육조의 각 참판, 사헌부의 대사헌,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 등이 도열한다. 정삼품석에는 육조의 참의, 승정원 도승지, 성균관의 대사성 등이 선다. 정사품석 이하로는 한성부의 서윤을 비롯해서 돈영부의 첨정, 육조의 각 정랑, 홍문관의 교리와 종구품인 각 부의 참봉이 자리한다. 무반의 경우를 보면 정일품석에서 정삼품석까지는 영사, 판사, 동지사, 첨지사, 도총관 등이 차지한다. 종삼품석부터 종구품석까지 오위장, 상호군, 호군을 비롯하여, 정부의 사직, 사정, 사맹 등이 도열한다.
    행각에 관하여
대원군 당시 중건한 경복궁 회랑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뻥 뚫린 복도 같은 구조가 있는 회랑이 아니라 사무실, 창고등이 있었던 행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도 회랑이 아닌 행각이었다. 다만 지금처럼 폭이 넓지 않았고 좁은 행각이었다. 경복궁 중건당시(대원군) 근정전 행각이 1칸이었던 것에서 2칸으로 넓어진다. 2칸이 된 동서 쪽 행각에서 마당 쪽 칸은 통로(복도)로 이용되었다. 벽 쪽에는 창고와 사무실, 다락방 등 여러 시설을 두었다. 행각 기둥은 둥근 것으로 둥근것은 궁에서나 사찰에서 사용하였으며 그 아래 주춧돌을 네모와 둥근것으로 나누어 져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이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우주관에서 나왔다. 또 중앙기둥엔 땜방한 자리가 있는데 이것은 원래 칸을 막아 안과 밖을 분리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때 뜯어다가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사용하였기에 그 자리에 땜방 조치 하였다.
    동쪽 행각

주춧돌이 원형,사각

융문루가 있다. 융문루 남쪽에 2층방이 있었다. 위층은 창고였고, 아래층은 서방색(書防色)이었다. 융문루 북쪽에는 상하고(上下庫)와 계인문(啓仁門)이 있었다. 계인문 북쪽 편에 다락방과 창고가 있었다. 서쪽(안쪽)다락방에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고, 동쪽(바깥쪽)에는 양미고(糧米庫)가 있었다. 융문루 남쪽에 있었던 서방색은 대궐 안 잡무를 맡고 있던 액정시(掖庭)소속으로 임금이 사용하는 필묵과 벼루를 책임지고 있었다. 예문관은 임금이 행사 때 하는 축사, 기념사, 명령문 등에 대한 일을 담당하였다. 향실은 행사 때 사용하는 향과 축을 맡은 관청이었다. 근정전에서 열린 행사들을 보면 이들 부서 사무실이 근정전 행각에 있었던 까닭을 쉽게 짐작된다.
    서쪽 행각

천정부분

융무루가 있었다. 융무루 북쪽에 내삼청(內三聽)과 협의문이 있었다. 협의문 북쪽에 예문관(藝文館)과 향실(香室)이 있었다. 융무루 남쪽에는 내삼청과 충의청이 있었다. 충의청은 종친부와 충훈부에 소속된 하급 관리인 충의가 근무하던 사무실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종친부와 충훈부가 왕실과 공신에 대한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충의청을 행각에 두었을 것이다. 내삼청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를 통틀어 일컫는 것으로 금군삼청이라고도 한다. 금군은 왕실 친위 부대로 궁중을 지키고 임금이 거둥할 때 호위와 경비를 맡던 군대였다. 이 때문에 내삼청 사무실이 융무루 남쪽과 북쪽 두 곳에나 있었을 것이다.
    금군

조선 시대 처음 설치된 금군은 1407년(태종7)에 설치된 내금위였다. 내금위는 정규군인 오위에 소속되지 않은 별도 부대였다.주로 양반 가운데 무예가 탁월한 젊은이 190명을 뽑아 편성하였다. 이는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호를 맡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높은 충성심이 요구 되었기 때문이다. 1409년에는 기마 부대인 겸사복을 두었다. 겸사복은 양반을 비롯한 승러, 양민 가운데 무재와 용모, 학식 등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다. 정원 50명으로 이성계의 출신 지역이 었던 북방인들이 우대를 받았다. 1492년(성종23)에 궁성 수비를 맡은 우림위가 설치되었다. 정원 50명인 우림위가 설치됨으로써 금군은 금군 삼청 또는 내삼청으로 정비되었다.
남쪽 행각

*남쪽 행각은 2칸이 모두 복도이며 주춧돌은 모두 원형이다.*

남동쪽회랑의주련

남쪽 회랑에는 기둥에 연꽃 무늬가 새겨진 주련이 붙어있다. 연꽃은 불교 뿐 아니라 유학자도 좋아하였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피어 나지만 깨끗한 모습에서 고고한 군자를 상징하는 표시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풍속화나 민화에 연꽃이 자주 나타나고 경회루나 향원지, 대갓집 앞 연못에 가득히 심은 연꽃이 이를 보여준다.
    북쪽 행각

사정전 남쪽 행각이기도 한 북쪽 행각에는 사정문과 함께 창고가 있었다. 활자를 보관하기도 하여서 활자고라 불리기도 하고 왕의 비자금 창고인 내탕고라 불리기도 했다.
    계인문과 협의문

[궁궐지]에 있듯이 동서쪽 행각에는 계인문과 협의문이 있었다. 문 이름에 인(仁)과 의(義)를 쓴 것은 동대문을 흥인지문이라 하고 서대문을 돈의문이라 한 것과 같이 5행설에 다른 것이다. 없어졌던 두 문 가운데 계인문은 지난 1998년에 복원되었다.
    오봉산 일월도의 정신세계

**오악 신앙 오악은 중국의 경우 동의 태산, 서의 화산, 남의 형산, 북의 향산, 중앙의 숭산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동서남북에 각각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그리고 중앙에 삼각산이 설정되어 있다. 이 산들에 신격을 부여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국 고래의 기본적인 신앙이었다. 그것은 천신 사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하느님의 아들인 황웅 천왕은 태백산에 강림한 산신이었으며, 그의 아들 단군 천왕은 아사달의 산신이었다. 삼국 시대 이래로 산신에게 제사 지내며 비 내리기를 빌기도 하고, 수호(守護)와 구병(求病) 등을 빌기도 하였다. 이처럼 오악은 우리 민족의 신앙의 대상이요, 국가를 외호하는 상징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 붉은 해와 흰 달은 음과 양을 상징하기도 하고 왕과 왕비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섯 봉우리는 오악으로 왕이 다스리는 국토를 상징한다. 해 달 산은 물과 소나무 등과 함께 하늘과 땅, 생물계에서 가장 힘찬 생명력을 상징 한다. 이는 천계, 지계, 생물계 모든 신들이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를 보호하여 번창케 하리라는 바람을 나타내고, 또한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주인이 바로 임금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만들었다. **-도교 사상 삼국 시대에 우리 나라에 전래된 도교에서는 오악을 인간의 길흉호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믿었다. 태산을 동악, 형산을 남악, 숭산을 중악, 화산을 서악, 항산을 북악으로 설정하여 신격을 부여하고, 또한 각각의 산을 복자(福子).상자(祥子),길자(吉子). 희자(喜子) 모양의 부적에 대입시켜 길상과 행복의 주재자로 간주하였다. 도교는 오악이 인간의 생사를 관장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동악의 부를 가지면 장수를 보전하고, 남악의 부를 지니면 타인으로부터 해침과 물의 재앙을 막고, 주악의 부를 가지면 많은 재산을 모으고, 서악의 부를 가지면 전쟁의 피해를 막고, 북악의 부를 가지면 물의 수난을 명하고 복록을 누린다고 하였다.
    해와 달과 음양오행설의 관계

음양론은 우주나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을 음양의 생성, 소멸, 변화로부터 설명하려는 이론을 말한다. 음양 사상은 당초에는 태양이 구름에 가린 상태를 음이라하고 , 구름이 걷혀 해를 볼 수 있는 것은 양이라고 할 뿐이었으나, 시대를 내려 오면서 음양을 만물의 근본으로 보게 되었다. 음양론은 우주론적 방면으로 발전하여 천도의 하나가 되고 도덕적인 의까지 얻기에 이르렀다. 하늘의 도를 따르고 민심을 살펴 백성들이 편하도록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도리이다. 해와 달에게 부끄럽지 않고, 하늘 아래 떳떳한 임금이야말로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임금이 아니겠는가. *산. 해. 달. 소나무. 파도 등 왕실의 무궁한 번영과 융성을 칭송하는 상징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오봉산 일월도의 파도는 '산수복해'라고 하는 동양 고래의 길상 관념과도 관련이 있다. 바다의 파도, 즉 조(潮)는 조정(朝廷)의 조와 발음이 같음으로 해서 조정을 상징한다. 백관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 파도 문양을 수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오봉산일월도는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과 오악의 숭배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그림이다. 이것을 병풍속에 조화롭게 용해 시켜 놓았으니 깊은 의미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정전


근정전의 뒷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근정전의 바로 뒤 일직선상에 위치하며, 왕이 공식집무를 보던 편전(便殿) 으로 쓰였다. 뿐만 아니라 사정전에서는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거나 종친, 대신들에게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사정전'이란 이름은 태조 3년(1495) 10월 경복궁 창건당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으로, '사정(思政)'의 뜻은 '임금이 깊게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살필 수 있도록 취해야 할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사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4년(1867)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정전 바닥은 온돌이 깔려있지 않다. 따라서 연중내내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무를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정전의 동서쪽에 위치한 만춘전, 천추전 등에 온돌을 깔고 사정전과 더불어 왕의 일상적인 집무실로 함께 쓰였다. 사정전은 왕의 편전이면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렸던 상징적인 중심 건물이었던 것이다. 사정전 내부에는 북쪽 기둥사이를 막고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운룡도(雲龍圖)'가 벽화에 그려져 있었으나, 2001년 초 보존처리를 위해 떼어내 별도 보관하고 있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용이 구름을 토하고 그 구름이 용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용과 구름의 관계, 즉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운룡도 밑의 빈 공간에는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일월오악병이 펼쳐져 있었다.

 

사정전 맞은편의 사정문 좌우에는 전체가 임금이 쓰는 온갖것들이 분류, 저장되어 있는 창고로 이용되었다.

남행각에 사정문, 동행각에 득영문, 서행각에 숭현문이 있었다.현재 득영문,숭현문은 없다.


    사정전의 용그림
발톱이 넷인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이 그림은 수묵화의 기법으로 채색을 하여 구름을 직접 그리지는 않았지만 마치 구름 속의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형상을 하여 그 신비함이 더하다. 용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과 관련이 있는 전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정전의 공간
근정전이 왕과 외부에서 들어온 관료들이 만나는 공간인 외전이라면 사정전부터는 왕과 왕비가 일상적으로 기거하며 활동하는 공간 내전이다. 사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 편전이다. 어전회의를 비롯한 최고통치자로서 공식 업무는 원칙적으로는 이곳에서 처리하였다. 왕은 인사권과 정무 결정권을 가졌으니 이곳에서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라는 것이다. 사정전과 죄우의 만춘전, 천추전은 예전에는 복도로 연결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무 상관없는 건물처럼 보인다. 임금은 지금 보면 맨땅을 밟고 갈수 밖에 없다. 사정전은 왕이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동안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다. 왕이 정무를 보는 것을 시사라고 한다. 시사에는 날마다 업무 보고를 받는 아침 조회같은 성격을 띠는 상참이 있고, 한 달에 정규적으로 갖는 회의인 차대,조참 및 비정규적인 회의 등이 있었다. 시사만이 아니라 사정전은 왕과 신하가 나라 일을 의논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때는 사정전 좌우에 있는 만춘전과 천추전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사정전은 온돌방이 없지만 두 건물에는 마루방과 온돌방이 있어 더 편하게 국정을 의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연
나라에 중대사가 발생했을 때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왕과 신하가 만나 함께 공부를 하면서 국정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이를 경연이라 한다. 왕이 바른 품성과 올바른 국정을 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실을 하였으리라. 경연은 해가 뜰 무렵인 식전에 주로 이루어 졌다. 경연의 횟수는 왕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왕의 경연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날마다 경연에 참석했으며,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날마다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하였다. 세조와 연산군은 참석은 커녕 아예 경연을 폐지해 버렸다. 경연의 강의 교재는 사서와 오경 등 유교 경전과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같은 역사책이 기본서였다.
    **어전회의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과 중요 국정을 논의하던 회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국정의 근본을 위민정치 에 두었으며 그것은 곧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였다. 이같은 바탕 위에서 나라의 중요 국사는 반드시 어전회의를 거쳐서 시행하였다. 임금의 親臨하에 三公(영의정,좌우의정)과 六卿(육판서)을 비롯하여 각기 안건에 따라 필요한 시임(현직)및 원임(전직)의 신하들이 동서로 정좌하고 검열,주서등 사관이 배석한 가운데 국사가 논의되었다. 임금이 직접 안건을 부의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이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각 소관부처에서 안건을 제기하였다. 임금은조신들로 하여금 의견을 충분히 피력하게 한 후 이를 수렴하여 그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이같은 어전회의에서는 공정한 국정심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가 뒤따랐다. 첫째 사관제도이다, 국법에 의하여 영의정과 같이 최고의 관리자라도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관의 입회없이 임금과 혼자서 대화하지 못하였다.그러므로 어전회의에서도 사관은 반드시 신하들의 발언과 행동은 물론 임금의 언행마져 낱낱이 기록하여 남겼다. 이를 사초(史草)라 하고 이는 후에 실록편찬의 기본자료가 되었으니 군신의 언행은 저절로 신중하고 綢密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言官제도이다.만약에 어전회의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내렸을 경우에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등에서 그 시정을 요구하였는데 이들 언관에게는 면책특권이 있었다.이는 선비(유생)들의 언론을 존중하고 잘못된 어전회의의 결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었다. 어전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이같은 정사처리는 민의에 바탕한 朝臣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제도로서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국정운영이었다.
    **사정전의 다른 역할
사정전은 왕이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우리 사신을 외국으로 보낼 때 하직 인사를 받던 곳이다.한양으로 돌아온 지방관을 맞아 그 지방의 소식도 듣고, 멀리 파견되는 지방관과 장수들을 격려하고 친히 당부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정전은 근정전에서 행해지는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 국왕이 근정전으로 나가는 시발점이기도 하였다. 사정전에서는 종친이나 노인들을 모시고 국왕과 중전이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천추전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보던 서쪽 편전으로,정전의 서쪽에 있고 동편의 만춘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천추전은 고종 2년(1865)에 사정전과 더불어 중건 되었다. 임란 이전의 천추전은 문화창조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 전각을 즐겨 이용하였다. 이 전각에서 1452년 문종이 승하하였다. 천추전은 평면이 24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공포는 무익공이고 기둥 높이는 9자이다. 사정전의 기둥 높이가 15자이고 공포도 내7·외5포의 다포계로 격조를 한껏 높인 것에 비하면 아주 조촐한 법식에 따라 지었다.
      만춘전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보던 동쪽 편전으로,사정전 서쪽의 천추전과 똑같은 규모로 동쪽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조선시대 임금들은 편전에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성현들의 책을 읽었으며 때로는 신하들과 연회도 열었다. 고종 4년(1867)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지었으나 이 건물은 6.25 때 피해를 입어 댓돌 위에 기둥을 세웠던 주초석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8년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 사정전에 비하면 그 양식이나 수법이 검소하게 꾸며졌다
      강녕전

*위오문 뒤로 강녕전이 보인다.*


왕의 침전(寢殿)으로, 사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있으며 내전의 중심건물이며,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그 문을 들어서면 정면 11간 측면이 5간 해서 55간의 초익공의 팔작 지붕되는 큰 건물이 보인다. 경복궁의 연침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태조 4년(1395) 경복궁 창건과 더불어 지어졌으며, 강녕전이란 이름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동서 양쪽에 각각 하나씩 거느린 건물들 동소침, 서소침과 함께 행각으로 둘러쌓여 있다. 동소침의 이름이 연생전이고, 서소침의 이름이 경성전이다. 또한 연생전 뒷편으로 연길당이 있고 경성전 뒷편으로 응지당이 있어 총 다섯의 건물이 있다. 왕이 강녕전을 침소로 쓰기도 했지만, 대신들과 만나 일상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거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가족들과 연회를 즐길 때는 강녕전 월대를 중심으로 임시 가설무대를 넓게 설치하여 이곳에서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전은 동서 양측에 井자 모양의 9개의 방을 두었고 그 중 가운데 방에서 임금이 주무시고 그 둘레 옆 8개 방에는 상궁들이 숙직하였다. 침전의 실내에는 가구를 놓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창덕궁 희정당을 짓는데 쓰여졌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강녕의 뜻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 →오복(五福) 수정 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가운데 늘 덕을 쌓고 황극을 세우면 오복을 누리게 되는데, 오복의 가운데가 바로 강녕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이후 강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되었다. 일재강점기시인 1917년 11월 창덕궁 내전 일대가 화재로 크게 소실되자,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강녕전을 비롯한 경복궁 내전건물 대부분이 일제에 의해 헐려 옮겨진다. 이로써 경복궁은 더욱 황폐해지고 만다. 현재의 강녕전은 각종 옛 기록 등을 토대로, 1995년 12월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녕전은 남쪽에 월대를 두고 정면 3간은 대청마루로 좌우 3간은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둘레에는 방과 마루로 구성된 퇴간을 두었다. 퇴간에 포함된 방에는 지밀상궁들이 왕을 보필하며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강녕전의 외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강녕전의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부분 왕 또는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또 올라갈 수 없기 때문' 이라는 등의 설은 세간에 떠도는 속설(俗說)일 뿐, 문헌적 기록을 따져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곳 강녕전에서 문종(1452)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기도 했다. 정면 11간 측면 5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이다. 왕은 늘 곤룡포나 면류관과 같은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복장을 하고 산것은 아니다. 평복으로 일상생활을 하고 쉬기도 하였다. 왕이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는 궁궐의 건물을 연침, 침전 또는 연거지소라고 한다. 왕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이 강녕전을 들어야 한다.그 중 연침은 가장 중심인 내전 구역이다.
    **강녕전의 역할
강녕전은 사랑방 구실도 하였다. 이곳에서 왕은 평상시 독서나 사색을 즐기기도 하고, 왕실 종친들이나 신하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이 때는 주로 소침을 많이 이용하였다. 왕은 내전에서 사사로이 신하를 볼 때도 혼자서 만나지 않았다. 사관 없이는 혼자서 신하를 만나지 않는 것이 궁중 법도였다. 장인도 혼자 만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공개하여 투명한 행정을 펼친 것이다. 강녕전에서는 잔치도 하였다. 왕은 통치자이면서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였다. 가장으로서 왕은 때때로 왕실 종친들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풀었다. 왕비나 세자가 생일을 맞으면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강녕전에는 넓은 대청 마루와 시원하게 펼쳐진 월대가 있다. 이 곳에서 왕은 잔치를 벌였다.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세종 대왕이 예조에서 좋은 술 50병과 소. 양. 기러기. 오리 등 물건을 진상하자 무희와 악공을 강녕전으로 불러 용비어천가를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강녕전의 뜻
정도전이 지었다. "홍범 구주의 오복 가운데 세번째가 강녕입니다. 무릇 백성의 왕이 된 분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에 -황극 왕으로서의 기준과 법도-를 세우면 오복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연침의 이름을 오복 가운데 하나인 강녕으로 붙였습니다." 강녕은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의 오복 가운데 세번째로서 전체를 대표한다. 왕으로서 왕답게 마음과 덕을 닦을 때 저절로 향유하게 되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강녕전 좌우의 연생전과 경성전으로 가면 왕이 천지 자연의 순리를 따라 인과의 덕을 지녀야 한다는 데로 확장된다. 천지 자연이 만물에 대해서 봄에는 생겨나게 하고 가을에는 이루게 하였습니다. 성인이 만민에 대해서 인으로써 생성하게 하고 의로써 제도를 갖춥니다. 그래서 동소침은 연생이라 하고 서소침을 경성이라 이름하여 전하께서 천지 자연이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본받아 그 정령을 밝히 하심을 드러내려 하였습니다

연생전(동소침)

경성전(서소침)

연길당(연생전뒷편)


*좌측 영생전,정면 강명전,우축 연길당의 추녀들 ,너무 곡선이 너무 아름답워서 한 컷*

      교태전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전의 건물로 강녕전 바로 뒤 경복궁의 중심축선상에 놓여 있고, 중앙에는 대청을 동서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교태전 천장*








음과 양을 말하는 양의문(兩儀門)을 지나면 교태전으로 들어선다. 음과양이란 만물의 근본으로 왕과 왕비를 만물의 근본으로 본다는 왕권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왕비의 침소 역할이나 혹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쓰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가 갖는 지위와 역할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총괄하고 왕실의 각종 공식업무 등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로 봐야 할 것이다. 교태전의 뜻은 주역의 원리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泰)는 주역의 괘인데 태 괘의 형상은 양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로 가있고, 음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로 가 있는 형상이다. 태는 아래가 건, 위가 곤으로 ,건은 하늘, 남자, 밝음, 위로 솟음을 상징한다. 괘는 땅, 여자, 어두움,아래로 가라앉음 등을 상징한다. 이것은 지나치지 말고 서로 합하라는 것이다. 교태전에 들어가는 문이름도 양의("교합")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 생산을 잘 하라는 뜻이 있다. 교태전 가장 은밀하고 중심부에 있는 이 곳이 중전이다. 이는 '하늘로 솟는 양(陽)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陰)의 교합으로 생성(生成)한다'는 뜻이다. 음과 양이 화합하고 통하는 가운데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공간이 바로 교태전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교태전을 세웠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교태전이 세워진 것은 세종 22년(1440) 무렵으로 추정된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경복궁전도> 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교태전의 모습이 보인다. 교태전과 강녕전이 복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교태전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 재건된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서 대화재가 나자 일제는 이를 "재건한다"는 핑계로 교태전을 포함한 경복궁 내전 일대를 헐어버린다. 이때 교태전도 함께 철거되어,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을 재건하는데 쓰이게 된다 강녕전 일곽에서 양의문을 들어서면 정면9칸, 측면 7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임금이 왕비처소인 이곳에 납시게 되면 왕비와 함께 침소에 드는데 왕과 왕비가 합궁하는 방의 옆방에서 상궁들이 숙직을 하게된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용마루가 없는 지붕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쓰이는 경우에 용마루가 없는 지붕을 얹게 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정확한 이유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그 까닭을 알기 어렵다. *침전은 용마루가 없다. 왕은 용이다. 다음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용이 위에서 이를 내리 누르면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속설에 '용으로 상징되는 왕이 머무는 침소에 용마루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역시 실증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다. 정면 9간 측면 4간 이익공의 겹처마에 무량각 지붕이다.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은 조형미가 뛰어나 보물 제8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아미산및 굴뚝

아미산

함월지

경복궁의 중전 교태전 뒤 이제 더 이상 건물이 이어지지 않고 산이 나온다. 이름은 아미산이다. 이것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조그만 둔덕이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이 아니라 경사면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고 단 위에는 매화 ,모란,앵두,철쭉 등의 꽃나무와 소나무,팽나무,느티나무 등을 심어 원림(園林)을 이루었으며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이 사이에는 石盆,日影臺,石蓮池,洗心臺등의 조형물을 두었다. 涵月池는 상부에 반구 모양으로 파내어 물을 담아 달이 물속에 출렁이는 것을 왕비는 즐겼 스리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마당에 화원을 꾸미지 않아 후원이 발달하였다. 아미산은 중궁전의 깊은 후원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하여 오다가 금강산 못 미친 평강 땅에서 남방으로 한 갈래 오니 이거이 한북정맥이다. 그리고 우뚝솟은 산이 북한산이요 남으로 내려와 솟은 봉우리가 백악산이요 그 끝이 아미산이다. 예전 왕비가 살때는 온각 기화요초를 심었으리라. 화강암으로 깎은 석분에 담아 놓은 것도 있다. 괴석이라 한다. 석지가 있는 윗단에는 굴뚝 네 기가 서 있다. 붉은 벽돌을 육각형으로 사람 키 한 길 반은 되게 쌓고 그 위에 둘레를 돌아가며 기와를 얹고 가운데에는 집 모양으로 연기 빠지는 구멍 연가를 만들어 놓았다. 면 마다. 귀면이나 봉황등의 벽사상,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 당초문 등을 길상을 구워 박아 넣었다.
    아미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


아미산 화계에 설치된 이 육각형 굴뚝들은 화계 앞에 있었던, 교태전의 굴뚝이다. 굴뚝은 말쑥하게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초를 삼고 그 위에 붉은색 벽돌로 축조하였다. 굴뚝의 높이는 지붕을 제외하고 2.6미터쯤 되며, 육각 한 벽면의 폭이 88센티미터쯤 된다. 지붕에 기와골까지를 나타낸 작은 집모양의 연가에는 사방으로 뚫는 창이 있어 연기를 뿜어내게 하였다. 각 면 중심부에 하얀색 삼화토로 직사각형의 액자를 만들고 매란국죽이나 길상의 무늬를 조성하였다. 무늬조성은 밑그림에 따라 흙을 빚어 형성하고 구워다 장치한 것인데 조금씩 색을 달리하며 멋을 부렸다. 각각의 면은 무늬구성을 달리하고 있어서 단순하거나 중복된 맛에서 벗어나 있다. 굴뚝 최상단 벽면에는 당초문이 새겨졌고, 그 밑에 용, 학, 박쥐 등의 문양전이 배치되었으며, 정남에는 용문전을 배치하였다. 문양전의 밑 벽면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국화 조형전이 배치되고, 북쪽면에는 희(囍)자 등 글씨가 새겨졌다. 이들 조형전의 밑 벽면에는 호랑이, 해태, 박쥐, 학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문양은 군(君), 신(臣), 절의(節義), 부귀, 장수, 벽사를 상징한다. 화계의 조형물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함원전 (교태전의 부속 건물,교태전 왼쪽에 위치 )*

이 건물들은 모두 궁궐의 왕이나 왕비의 침전,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희문

*이 문을 들어서면 교태전 후원 아미산으로 통하며 특이하게도 아취형이며 담장문양도 눈여겨 볼만하다*
      흠경각


강녕전 뒤편에서 경회루 쪽으로 난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흠경각이 나온다. 세종 20년(1438)에 장영실이 왕명에 의해 지운 건물로 시각과 방위 ,계절을 살필 수 있는 과학 기구인 옥루기륜을 설치하였던 곳이다, 흠경각에는 자동물시계인 옥루(玉漏)와 별자리의 위치를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설치하여 시간과 천체의 운행을 살피도록 하였다. 흠경각에 설치되었던 옥루기륜은 시각뿐만 아니라 방위,계절까지도 알 수 있는 자동 물시게라 할 수있다. 종이로 만든 7자(2M10cm)가량의 산 둘레를 황금 태양이 돌고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과주작,현무 ,백호,청룡 등의 방위신 인형이 시각에 맞게 움직이며 무사나 십이지신 모습의 다른 인형이 시간에 맞추어 목탁,북,징 ,종 등을 치는 아주정교한 장치이다.또 종이로 만든 산의 사방에는 농촌의 사계절 풍경을 그린 시경빈풍칠월편을 진열하여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고 그 위에 사람, 동물,풀과 나무의 모양을 나무에 새겨 절기마다 바꾸서 진열하였다. 하지만 이미 세종 16년(1434) 7월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으며, 그 이전에 경회루 북쪽에는 천체의 운행을 살피는 간의대(簡儀臺) 등을 설치하였다. 경회루와 내전 지역에 이처럼 천체의 운행과 기상의 변화 등을 살피는 과학기구를 가까이 두었다는 것은 농정(農政)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세종의 왕권이 보다 공고해지고 궁궐의 기능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명종 8년(1553)에 불탄 것을 이듬해 다시 지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1917년 창덕궁 대화재 이후 일제에 의해 이를 '복원한다'는 핑계로 1918~1920년 무렵 경복궁의 다른 내전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곳 흠경각 건물도 뜯겨진다. 현재의 건물은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95년에 복원된 것이다. 현판은 동강 조수호 선생이 쓰고, 제작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맡았다. 정면 6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자경전(보물 제809호)


자경전은 경복궁 영역 중 동북쪽에 위치한 생활공간으로 왕실의 웃어른이 거처한 여성공간이었다.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지었다.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 (1888) 에 완성하였다. 1908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을 통해 보면, 고종 무렵 경복궁 재건 당시 이곳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九重宮闕)의 깊숙한 곳에 꽤 큰 규모로 격식있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재건 당시 대왕대비이자 추존된 익종(효명세자)의 왕비인 신정왕후 조대비이다. 자경전은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에 오르도록 했던 조대비가 머물렀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종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누마루로 된 청연루 (정면 1간 측면 2간)와 협경당(協慶堂, 정면 6간 측면 2간), 복안당(福安堂, 정면 6간 측면 2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구성되어 있다.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협경당

*십장생 굴뚝 앞으로 협경당 ,자경전 뒷 모습*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자경전은 정면 10간 측면 4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자경전은 현재 보물 8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뒤켠 담에 붙어 있는 십장생 무늬 굴뚝은 담과 어울려 돌출되지 않게 축조한 기발한 착상과 모습이 빼어나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서쪽의 꽃담이 아름답다. **자경전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조대비이다. 고종이 왕위에 즉위하는 과정에서 조대비의 역할은 실로 막강했고, 고종 즉위후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정치적으로 화합된 조대비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결국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런 흥선대원군의 입지를 강화시켜준 경복궁 재건사업 역시 조대비의 명을 받드는 형식으로 실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경(慈慶)이란 자경은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이라 이름을 붙인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건물의 이름 또한 자친(慈親), 즉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분의 경사와 무병장수 등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지금은 남쪽의 행각만이 남아있으나 경복궁에 건물이 꽉 들어차 있을 때는 동, 서, 북에도 각각 행각이 둘러싸고 있었다. 자경전은 자체 40간이고 그 주위에 일군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다. 자경전은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가며 행각과 담장이 둘려 있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행각의 만세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부속건물인 협경당의 동쪽 담장에서 서행각까지가 탁 트인 하나의 마당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자경전과 협경당 사이 청연루 어간에는 작은 담장이 막고 있었다. 자경전 북쪽은 옹색하다. 본채와 북행각 사이에 화계를 설치할 만한 둔덕이 없다. 화계 대신 그곳에 담장을 쳤다. 이럴 때 굴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해결한 것이 "십장생 굴뚝"이다. 땅밑으로 연기 길을 내고 담장의 일부를 굴뚝으로 만들어 그위에 연기 빠지는 부분은 연가- 집 모양을 열 개 만들어 얹었다.

*자경전의 만세문* 만세문(萬歲門)은 남행각에 딸린 문으로 행각 서쪽에서 8째칸과 9째칸 2칸이 출입문으로 되어있다. 문은 각각 네짝씩 당판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행각은 다듬은 사각초석위에 각기둥을 올렸고 연목,도리,보 등에 모로단청을 이루고있다 .
자경전 동쪽 끝에서 한 칸이 앞쪽으로 두 칸 돌출하였다. 높직한 흘림의 방주에 의지하고 돌출 부분의 나무 기둥들이 섰다. 이렇게 돌출 구성되는 다락을 내루라 한다. 정면 1칸 측면 2칸, 정면 1칸 측면 1칸 또는 정면 2칸 측면 2칸, 혹은 정면 2칸 측면 1칸 등으로 구성되는 수가 많은데, 여기에선 정면 1칸 측면 2칸의 법식을 채택하였고, 지붕 처리를 고려하여 팔작지붕 합각이 앞쪽을 향하게 하였다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보물 제810호)


꽃담처럼 담에 붙여서 만든 굴뚝으로, 너비 381센티미터, 높이 236센티미터, 두께 65센티미터이다. 굴뚝벽의 상단 중앙에 나티(짐승모양을 한 일종의 귀신)문전으로 박고 좌우에 학문전(鶴紋塼)을 박았다. 그 아래 중앙벽 구간에 해, 산, 구름, 바위, 솔, 거북, 학, 바다, 사슴, 포도, 연꽃, 대나무, 불로초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밑에 불가사리 두 마리를 전(塼)으로 만들어 박았다. 굴뚝의 좌우 좁은 벽면에는 박쥐문과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불가사리는 벽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굴뚝은 조선시대 굴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다 기와지붕위로 연가를 나란히 설치해서 담장부분과 구분되며 붉은 담장으로 둘러친 데다가 석쇠문양, 채문양의 망이 둘러쳐 청정한 공간이 되었고 담의 한 면을 한 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윗부분 역시 모양을 낸 벽돌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새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물, 구름,바위 ,소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포도,대나무, 국화,새,연꽃(깨끗함을 상징하여 군자의모습) 등이며 둘레에는 학,나티 불가사리,박쥐 당초문의 등의 무늬전을 배치햐였다. 해,바위 ,거북등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복),나티 불가사리 등은 악귀(쇠를 먹는 동물로 불을 막는)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다. 꼭대기에는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인 연가(煙家)를 10개 올려놓아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담의 조형이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중 가장 아름답다 학과 사슴과 같은 십장생이 서기를 발하고 있으니 바로 신선세계가 이곳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의 서쪽 담은 큼직한 무사석 기초위에 사괴석으로 세켜 쌓아 및동을 단단히 다지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치쌓아 몸체를 만들고 머리위에 기와를 이어 완성한 구조가 기본 바탕으로 꽃담 중간중간에 글씨와 함께 삼화토로 액자를 만든 화판이 자리 잡는다. 도화서의 화원이 밑그림 그린것에 따라 구어서 만든 여러 무늬가 적당한 간격에 알맞는 비율로 자리잡으면서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있다.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格子紋), 육각문(六角紋), 오얏꽃 등이 정교 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여성이 사는 곳은 담장에 무늬와 글자 그림에 베풀어져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자경전의 꽃담과 십장생 굴뚝은 유명하다. 무늬는 만자나 격자 도는 육각형의 벌집 모양-귀갑문등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꽃을 넣기도 하였다. 그 안에 글자는 성,인,도,리,천,귀,만,수,낙,강,만,년,장, 춘,등이다. 이 집에 사는 분이 성인의 도리를 지키고, 고귀함과 장수, 즐거움과 정정함을 오래누리시라는 축원이다. 그 안에 그림은 화조 병풍이나 다름없다.

*꽃담 남쪽 행각의 벽으로 좌측에 조금 보이는 것이 꽃담이며 이 벽무늬도 예사롭지 않다.*

      수정전


천추전의 서쪽에 보루각과 흠경각, 집현전을 지었는데 돌로 높고 넓게 기단(월대)를 쌓고 그 위에 세운 이 건물 자리엔 원래 세종때 한글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세조 1년,1456) 건물은 임진왜란(1592)에 불타버렸다.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개념적으로 근정전 보다 크다. 기단도 어른 키만큼 쌓았다. 이유는 위엄과 지열(地熱)을 차단하여 여름에 시원하게 하려는 데 있고 냉방과 함께 난방도 대비된다. 기단은 월대라 한다.격이 높은 주요 건물에만 설치되어 있다.큰 행사를 거행할 때 대신, 종친 같은 사람들이 자리잡기도 하고 악공들이 연주를 하거나 무희들이 춤을 추기도 한다. 이 곳은 고종 초년에는 고종이 기거하는 연거지소로 쓰이기도 하였고 신료들을 만나 정무를 의논하는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서쪽 끝으로는 경복궁의 서쪽 문인 영추문이 서 있다. 세종 때 경회루의 남쪽의 수정전은 국왕이 일상적으로 기거하는 곳, 혹은 편전 등의 용도로 쓰였던 건물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세종 28년(1446) 9월 이곳에서 훈민정음 (訓民正音)이 창제되기도 한다.세조 때는 예문관(藝文館)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제 1차 갑오개혁(1894)때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로 사용된 바 있고, 1895년 1월부터는 내각청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08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궐도형>에수정전은 지금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수정전 건물의 좌우측으로 다시 복도를 내어 수정전 주변 행각과 바로 연결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정전 주위 행각은 사정전 천추전 방향의 행각과 복도로 연결했음도 볼 수 있다. 이웃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대전장방, 내반원, 수라간, 정원, 빈청, 선전관직방, 검서청, 옥당, 약방, 의관방 등의 여러 관청이 있었다.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 문서 등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홍문관)과 역대 임금들이 지은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줄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정전 주위의 행각을 모두 철거하고 박람회장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다가, 1966년 10월 이곳에 현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인 '민속관(民俗館)'을 우리 손으로 개관하기도 했었다. 현재는 수정전 건물 좌우측에는 당시에 복도를 연결했던 흔적만 남아 있다. 한편 수정전은 건물의 간수(間數)로 따졌을 때, 현존하는 경복궁 내 전각 중 규모가 큰 건물에 해당한다. 정면 10간 측면 4간의 총 40간 규모의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동복도 13칸, 서복도 9칸과 동행각 33칸, 서행각 33칸, 남행각 33칸, 북행각 30칸, 중행각 22칸, 동외행각 20칸, 서외행각 20칸반의 행각이 있었다.

*수정전 월대 앞 서쪽에 자격루를 설치 하였던 곳*

      경회루(국보 제 224호)

*경회루 서편에 있는 인공섬,뒷편에 하향전이 보인다*
중요한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경복궁을 창건 할 때 태조가 지은 누각이 있었으나 태종 12년(1412)에 그 건물이 기울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 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고, 주위에 네모난 연못을 팠다.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 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태종 당시 원래 이곳은 사신의 접대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열거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 또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성종 6년(1475)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이 때 경회루 아래층 돌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는 등 다소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였다. 이 화려한 모습을 보고 유구(오키나와)의 사신이 "용이 물 속에 비치어 그 모습이 장관"이라며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성현의 <용재총화>에 전하고 있을 정도로 경회루의 모습은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1592)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다시 지었다.경회루는 조선의 대표적 누각으로서 48개의 육중한 돌기둥이 지금까지도 침하현상없이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의 수준높은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했으며, 황룡주(黃龍舟)를 타고 만세산을 왕래하며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 그후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에 재건되었지만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린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회루 동쪽 담장이 복원되었으며 2층 경회루로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도록 특별관람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 밖에 경회루 부속 건물처럼 경회루 북쪽에 있는 육각정은 이승만 대통령시절 대통령을 위한 휴식과 낚시를 목적으로 지어진 하향정(荷香亭)이라고 한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조일강화조약(1876)'을 맺을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신헌(申櫶)의 글씨다.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 고종 2년(1865) 경회루 재건공사가 시작될 무렵 경회루의 평면과 세부형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한 정학순(丁學洵)의 <경회루전도>에 잘 나타나 있다. 정학순은 <경회루전도>를 통해 경회루의 원리를 밝히는 가운데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히면서 그 속에 깃든 뜻풀이를 시도했다. 즉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하고, 다리를 건너 경회루 기단 양끝에 있는 2개의 문은 음양(陰陽)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드러내 준다고 한다. 경회루의 상층은 3중으로 되어 있는데 정중앙의 1중 3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의미하며, 이 3간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8개의 기둥은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다음 1중을 둘러싸고 있는 2중의 12간은 일년 12달을 의미하고, 기둥 16개의 각 기둥 사이에 네짝의 문이 달려 있어 이는 64궤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2중을 둘러싸고 있는 3중의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 북쪽에 넣어 두었는데 이는 불을 막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를 하던 도중에 북쪽 못 바닥에서 동으로 만든 용이 출토되기도 했다. 경회루는 남북 113m, 동서128m의 연못 가운데 2층 누각을 지어 세웠으며 정면 7간 측면 5간 총 35간의 규모에 이익공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지붕은 앞 뒤 지붕면이 높이 솟아오르고 옆 지붕은 중간에 가서 붙고 그 윗부분은 삼각형의 단면).아래층은 돌기둥을 세우고 위층은 나무로 지었다. 2층 누각 기둥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테는 안에서 바깥경치를 구경할때 액자속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예전에 경회루는 연못 둘레를 따라 담장이 사방으로 둘려 있고 함홍문, 서쪽 담장에 천일문, 남쪽에 경회문이 있었다. 경회루는 경복궁의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에서 들어가는 것이 정식 경로다. 말하자면 경회루와 그 연못 일대는 경복궁 내전에 딸린 누각이요 정원이라 한다. 이것은 내전에 살던 왕과 왕실의 전용임은 그 구조에도 들어난다

    *경회루 2층
경회루 이층 경희루의 이층은 마루를 깔았는데 그 바닥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정면 7간, 측면 5간 해서 35간 가운데 중앙부 세 간이 가장 놓다. 그 세간을 둘러싼 12간은 한 뼘 남짓 낮고, 가장 바깥을 두른 20간을 다시 한 뼘쯤 더 낮다. 그 높이가 달라지는 경계 구역에 한 번 젖혀 들어올리게 되 있는 분합문을 달았다. 분합문을 내리면 안은 닫힌 방이 된다. 경복궁의 이치 우주의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 중앙의 가장 놓은 3간은 정당으로 천지인 삼재를 상징한다. 3간을 구성하는 기둥 여덟 개는 팔괘를 나타낸다. 12간은 정당을 보조하는 헌으로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기둥 16개는 각 기둥 사이에 네짝 문이 있어 64괘를 이룬다. 바깥의 20간은 회랑으로서 기둥은 24개 24절기를 이룬다. 기둥도 바깥 둘레의 기둥은 사각기둥이고 안의 것은 원기둥이다. 원과 사각형이 함께 있으면 천원지방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져 있다는 관 년의 표현으로 이해하면 틀림없다.
    경회루의 불가사리

옛날부터 불을 잡아먹는 불가사리란 짐승이 살았다고 한다. 얼른 보면 코끼리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코끼리와는 다른 여러 가지 신격(神格)의 조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한다. 목조건축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화기(火氣)인바, 경회루의 돌난간에 이 불가사리를 세워 불길의 접근을 막았다. 6.25 때 포탄파편이 난비한 중에서도 경회루가 무사하였음은 불가사리 덕분이라고 하는데, 불가사리 자신은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제몸으로 경회루의 재앙을 막은 것이다. 이 밖에도 경회루의 돌다리와 난간에는 여러 서수상(瑞獸像)들이 조각되어 있다



         

         

         

         


        경회루 방지(方池)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침전의 서쪽에 연결된 원지(苑池)로서 잔치도 하고 뱃놀이도 즐기며 때로는 외교사절을 영접하던 곳이다. 방지의 규모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이며, 못 속에 장방형의 섬이 세 개 있다. 동쪽의 큰 섬에는 세 개의 아름다운 돌다리를 설치하고 웅장한 경회루를 건립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경회루가 있는 이 섬의 둘레와 돌다리의 좌우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를 세우고 돌란대를 설치한 돌난간이 돌려 있고, 다리 앞뒤와 난간이 꺾이는 곳에는 해태석상을 배치하고 있으며 배를 타는 선창 시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이런 용두는 북쪽 지안(池岸)에도 하나 있다. 1506년 연산군 시대 기록을 보면,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어 화려한 꽃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 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또 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용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못의 서쪽과 북쪽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등의 숲이 있었다. 경회루 방지는 조선시대 원지(苑池) 중에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조형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꼽힌다
          향원정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 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령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 있다. 고종 10년(1873)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원래 다리 동쪽 못가에 담이 있었고 담장에는 인유문과 봉집문이 있어서 연못은 한층 더 깊숙하고 아늑한 정취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부서진 것을 복구하면서 지금의 남쪽으로 옮겨 가설(1953년)하였다.
        향원지와 취향교

      *향원지 뒷편으로 보이는 담장(공사용 칸막이)뒷편은 건청궁및 명성황후가 시해 되었던 곳으로 지금 복원공사 중임.*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래서 향원정 북쪽을 보면 고종 당시 다리를 북쪽으로 가설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2년(1456) 3월 경복궁 후원에 정자를 새로 짓고 취로정(翠露亭)이라 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어, 이 취로정 터에 고종 때에 이르러 향원정을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향원(香遠)이란 이름의 뜻은 <태극도설>을 지은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중 '香遠益淸(향기는 멀수록 맑다)'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향원정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온돌을 깔았고, 2층은 마루로 되어 있다. 향원정 1층에는 불을 때던 작은 아궁이가 서쪽에는 있으며, 2층에는 천장에 주작 등을 그려 넣어 그 화려함을 더했다.


      향원지 북서쪽 모서리에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 있는데 '차고 맑은 물의 근원' 이라는 뜻이다. 열상진원에서 물길을 따라 나온 물이 일단 둥근 수로에 모여 잠깐 멈추듯 반바퀴를 돌아 다시 동쪽으로(서류동입) 방향을 바꾸어 판석 밑으로 스며들어 남쪽의 좁은 수로를 타고 향원지로 스며든다. 이때 물의 속도가 줄고 살며시 연지에 스며들게 되어 파장이 생기지 않게 됨으로써 연지의 표면은 항상 고요함을 간직하게 하고이는 서쪽에서 흘러 동쪽으로 들어가는 명당수(明堂水)의 개념에 따른 것이다.
          집옥재

       

       

        집옥재원경

      향원정 뒤편 건청궁터 옆에 중국풍의 낯선 건물이 들어서 있다.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때는 없었던 건물로 고종 28년(1891)에 창덕궁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종 30년엔 집옥재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한 바 있다. 고종 즉위 13년이 되는 1876년에 경복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가고종 25년 (1888)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서 기거하였다. 고종은 창덕궁에 있을때인 1881년 함녕전을 지으면서 서쪽 별당으로 협길당, 북쪽 별당으로 집옥재를부속건물로 지었는데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집옥재,협길당,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만 전체가 연결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고종은 어진(왕의 초상화)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의 접견장으로 사용하였다. 집옥재 좌우에 있는 서고엔 약 4만권의 책들이 있었다고 하며 이책들은 창덕궁 규장각및 장서각에 가있다. 집옥재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字 元章0의글씨를 集字하여 중국풍을 따라 세로로 길게 세운 것도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

      집옥재는 높은 댓돌에 큼직한 삼구의 석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한단을 더 설치하여 고형(鼓形)주초석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20간이고 집은 맞배지붕형이며 좌우 박공 아랫벽은 전(塼)으로 초담을 쌓았다. 마치 중국집의 구조와 같은 벽돌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종 28년(1891)에서 고종30년(1893) 사이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을미사변 이후 아관파천 이전까지 고종의 서재와 외국사신의 접견 등의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팔우정

      협길당

      *집옥재는 서쪽으로 팔우정(八隅亭)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협길당과 연결되어 있다. * 집옥재는 겹처마로 된 맞배지붕의 양식에 답도와 월대를 전면에 두고 내부는 매우 화려한 단청문양을 그려 격식을 높였지만, 현재 다른 궁궐에서는 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중국풍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매우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집옥재 답도및 석수, 지붕용마루 끝의 용



        

      *후면의 만월창문 및 측면의 서고와 내부*

      집옥재의 후면과 측면이 벽돌로 마감되어 있는 것도 그중 특색있는 양식중 하나이다. 또한 후면에는 가운데 만월창문을 두고, 양쪽에 각각 두 개의 아치형의 반월창문을 두었다. 지붕의 장식 역시 용마루 끝을 중국식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용 모양의 이물(異物)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집옥재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밖에서 보면 단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는 다락같은 것을 두어 통로로 연결한 이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옥재는 정면 5간 측면 3간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협길당은 팔작지붕 양식에 전면 5간 규모이나 'ㄱ' 자로 꺾여 있다. 문 하나로 청와대와 곧장 통하는 경북궁의 북문인 신무문이 집옥재 바로 뒤에 있기 때문이다. (좌측 사진은 협길당)
          자선당및 비현각

      1999년에 새로 지어진 동궁 건물로 세자의 생활공간이다. 비현각은 동궁 건물의 일부로서 세자가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던 집으로 사용하던 곳이다.원래 궁궐 내전 건물은 집채의중심부둘레에 기둥을 새워 지은 툇간(退間)을 설치하여 건물의 바깥쪽 둘레인 외진(外陳)과 중심부인 내진의 이중 구조로 구성하는 것이 통례이나 이 건물은 내 외진 구분이 없어 당시 궁궐건물로서는 드문 예에 속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하였고 이곳에서 순종이 마지막으로 왕자 시절을 보냈다.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된 것을 1999년에 복원한 것이다. 자선당은 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에 보면 '자선당은 융문루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으로 쓰는 곳이다' 하여 임진왜란 전후의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북궐도형에는 자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합 28칸이고 중앙부 6칸은 대청, 좌.우 2칸씩은 온돌방이며 둘레의 툇간은 방, 퇴로 구성되었다. 북궐도에 의하면 동궁은 세자가 백관으로부터 조회를 받던 정당(正堂)인 계조당,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쓰인 내당인 자선당 비현각,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던 춘방, 세자를 호위하는 군사가 머물던 계방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선당 주위을 둘러싸고 있는 긴 집채인 행각은 세자의 시중을 드는 상궁과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방과 큰 마루,부억,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궁

      *아랫쪽으로 나즈막하게 보이는 곳이 동궁으로 좌측에 자선당이 있고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비현각이 있다.* 세자를 동궁(東宮)이라 하였다. 세자는 흔히 봄에 비유되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봄부터 결실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오행에 따르면 봄은 동쪽이다. 이 때문에 왕이 거처하는 곳 동쪽에 세자궁을 만들었다. 세자궁을 동궁 또는 춘궁(春宮)이라고 한 것도, 세자 책봉을 봄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궁은 세자를 제왕으로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모두 갖추도록 설계되었으니 세자와 세자빈의 처소, 세자궁에 딸린 내관들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곳이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이나 시강 등의 강학을 받으며 세자를 위한 책고와 세자를 호위하는 곳 등이다 동궁에는 자선당과 비현각이라는 두 건물이 있다. 자선당은 세자의 공식 활동공간이며, 세자와 세자빈이 살던 집이다. 비현각은 그 부속건물이며 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이다. . 비현각 주위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세자익위사(계방)이라고 하는 관서 등이 있다. 그 일대는 광화문에서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 왕이 계시는 내전의 동쪽에 해당된다. 이곳이 동궁이다. 동궁은 경복궁 궁궐 밖에 있던 것을 세조 연간에 경복궁 안으로 끌어들이었다. 여기서 왕들은 왕자 수업을 받고 왕이 되었다. 동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질 때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270여 년 동안 세자들은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이나 서궐 경희궁의 동궁에서 생활하였다. 경복궁의 동궁 자선당은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원되었다. 복원된 자선당 에서 세자 노릇을 한 유일한 사람은 순종이다. 그는 부왕 고종을 따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 있던 시절, 독을 탄 차를 마시고 거의 반편이 되었다. 1907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올랐으나, 고종은 그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 황제위를 물려준 것은 아니었는데 일본 통감과 이완용 등 친일반역자들이 대리청정을 선위로 둔갑시킨 것이다. 황제가 된 순종은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적인 역할을 하고 황제에서 "창덕궁이왕" 으로 격하되어 창덕궁에서 돌아가셨다. 

       

      그 건물들은 일본인에게 팔려나갔다. 그 가운데 자선당은 오쿠라라는 사람이 가져다가

      동경이 자기 뒤 정원에 세우고 '조선관' 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설 박물관으로 삼았다. 그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자선당은 불타고 말았는데 기단과 주춧돌만 남은 그 자리에 오쿠라호텔이 들어섰죠. 1993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호텔 구내 정원 벚나무가 가득한 산책길에 버려져 있는 자선당 주춧돌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 반환을 요구해 1995년 자선당을 받치고 있던 돌 288개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왔죠. 하지만 오기는 왔으나 그 돌들은 이미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환되기 전 당시 일본의 한 고급호텔 산책로에 방치된 조선 왕세자궁의 유구, 일본에서 반환된 이 주춧돌은 현재 향원정 뒤쪽 명성황후 시해지에 옮겨 놓았습니다.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에 해당한다. 비현(丕顯)이란 뜻은 "크게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이곳의 건물이름은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복궁전도>와 <경복궁도>에 나와있다. 비현각 역시 임진왜란을 통해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하고 만다. 이때 비현각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팔려나가게 된다. 팔려나간 비현각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번째는 서울 장충동의 일본인 별장인 남산장(南山莊)으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다. 두번째는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1912년 남대문 정거장 뒤 봉래동 자신의 집으로 뜯어가 설계사무소로 쓰다가 누전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비현각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6간 측면 2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며 동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9년(1427)에 자선당을 짓기 시작했다. 자선당은 문종이 세자로 책봉된 뒤 1450년 2월 즉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1441년 7월 단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기도 한다. 또한 이때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은 뒤 이곳에서 승하하기도 한다. 자선당은 이후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다시 재건된다. 1915년 일제가 시정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한다. 이때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업무를 맡아보던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져 '조선관(朝鮮館)' 간판을 달아 미술관으로 쓰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만 남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자선당 기단석은 오쿠라호텔 경내에 방치되어오다가, 1996년 반환되어 현재 경복궁 명성황후 시해터 부근에 옮겨 놓았다. 현재의 자선당은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태원전

      태원전

      신무문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보고 2시 방향으로 소나무뒤로 비공개지역인 태원전이 보인다.
      * 2009.1.24 공개되어 들어가볼 수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우리 민족의 전통생활을 느끼고 체험해 볼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의 터전이다. 우리 전통의 생활문화르 조사 ,연구하고 ,전시 ,수집,보존할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 박물관 교육및 민속행사 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통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줌은 물론 우리 전통 문화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법주사의 팔상전,금산사의미륵전,화엄사 각황전 등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양식을 현대 건축에 응용하여 새롭게 재현한 박물관 건물은 1972에 건립되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1993년 2월 17일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어보ㆍ어책, 의궤, 문서, 제기, 악기, 과학기기, 무구, 금속공예, 도자기, 복식, 장신구, 가구, 현판등 조선시대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유물 40,000 여점 을 전시하고있다.
        잡상

        


      정상은 용마루를 쌓고 그 양끝은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나 새의 꼬리 모양을 흙으로 구워 설치한다. 추녀마루의 시작 부위에는 용의 머리 용두를 놓는다. 추녀마루 끝에는 짐승모양을 얹었다. 잡상이라 한다. 잡상은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장식효과와 잡귀들이 이 검루에 범접하는 것을 막는 벽사 의미를 갖는다. 취두, 용두, 잡상은 아무 건물이나 두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품격이 높은 건물만 설치한다.일반적으로 다섯개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일곱 개,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는 아홉개다. 경회루는 열한 개나 된다.
        궐내각사지

      빈터

      이 지역은 고종 중건 당시 궐내각사가 있었던 곳이었으나 ,일제의 시정5주년 기념조선물산공진회(1915년)개최를 계기로 대부분 철거되었으며 앞으로 발굴과 고증을 통하여 복원정비 구역임. 궐내각사는 조정의 중신,신료들이 궁궐안에서 집무하는 공간으로 정치.행정,왕실활동 등을 보좌하는비서실과 같은 역활을 하였던 곳이다. ★정치와 행정업무를 담당한 관서★ 빈청:3정승과 정2품 이상 고위공직자가 모여 국사를 논의하던 장소 선전관청;왕의 시위,전령등의 출납을 관장하고 어전의 군무호령을 관리하던 기관 정원:승정원이라고도 하며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서로 왕을 보좌하는 비서기관 당후:승정원의 당후관이 사무를 보던 기관 검서청:내각의 신료들을 보좌하고 문서를 필사하던 기관 내각:규장각, 역대국왕의 시문,친필,고명 등을 관리하던 기관 ★왕실활동을 지원하고 궁궐을 유지하던 관서★ 의약청:왕실의 의료,약을 관리 담당하던 기관 내빈원:궐내의 내시에 관한 일, 음식과 경비 등 궐내 관리를 담당하던 기관
          풍기대(보물 제 847호)

      *풍기대 뒤로 보이는 판자리는 지금 발굴 작업중인 집경당앞* 조선시대에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 장치로 풍기를 사용했는데 이 유물은 풍기를 꽂았던 팔각형 기둥대로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풍기대에는 풍기를 꽂는 구멍이 있다. 그 구멍에는 물이 고이지 않게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다. 아래 단의 높이가 80.8cm 위의 팔각기둥의 높이가 143.5cm이고 전체 높이가 224.3cm이다 세종 때 이후 측우기로 강수량을 측정하고 강과 개천의 수량(水量)을 재는 등 여러 가지 관측 기술이 발달하였다.언제부터 풍기로 풍향과 풍속을 측정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적어도 18세기까지 실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 풍기대도 18세기 것으로 여거진다. 18세기의 그림인 동궐도에도 풍기대 위에 길게 나부끼는 풍기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풍기의 정확한 크기 등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풍기로 바람의 방향은 정확히 알 수 있었지만 바람의 세기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웠다. 당시 서울의 주요 궁궐과 관상감에는 풍기대가 있었음이 확실한데 남아 있는 유물은 창경궁 풍기대와 더불어 2점 뿐이다.

          건춘문 (보물 제 928호)


      경복궁의 동문(東門)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육축을 높이 쌓고 중앙에 홍예문 하나를 열었다. 동쪽의 방위신인 일곱별을 상징하는 청룡(靑龍)이 홍예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하여 지금의 건춘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한다. 현재 건춘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포는 이익공이며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이다. 이문은 왕실의 종친과 상궁들이 주로 드나들던 문이라고 한다 조선조의 척도인 영조척(營造尺)으로 홍예 높이 16.5자이고, 너비는 15자이다. 이는 15자 사방의 정방형에서 그 대각선 길이 16.5자를 홍예의 높이로 설정한 수치인 것이다. 이간통(二間通)의 3칸인데 기둥 높이 8자이고, 3칸 중 중앙칸은 17자, 좌우협간은 8자로 합계 33자이다. 이때의 측면 2칸의 간살이 넓이는 각각 8자 2치 5푼식으로 합계 16자 5치가 된다. 긴 변과 짧은 변과의 비례 설정에 따른 계산에서 채택된 수치들이다. 건춘문을 들어와 왼편으로 들어가면 왕실 가족들을 위한 생활공간들이 밀집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건춘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동십자각(東十字閣)이 맞닿아 있었으나, 이 또한 일제강점기에 잘려나가 현재는 동십자각만 도로 가운데에 떨어져 있다.
        건춘문의 육축과 계단
      궁성보다 높게 육축을 쌓고 홍예 위에 문루를 올려세운 구조여서 필요에 따라 수문장졸들이 문루에 올라가야 할 때 좌우에 설비된 돌층층다리를 이용하게 된다. 층층다리는 급한 경사로 마치 사다리처럼 구조되었는데, 안전도를 고려해서인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협문이 있고, 협문은 육축 가장자리에 쌓은 여장(女墻)에 이어져 있다.


        건춘문 홍예천정의 용그림
      파랑·빨강·하양·노랑·검정 등 다섯 가지 색을 써서 구름과 용을 그렸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황룡을 그렸는데 모두 여의주를 얻었으므로 만사가 뜻대로 이뤄진 모습이다.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오조룡은 제왕을 상징한다.
          영추문 (보물 제 928호)


      동쪽이 봄이면 서쪽은 가을이다. 궁의 서문은 가을을 맞는다고 하여 영추문이라 이름지었다. 원래 문밖에 명당수가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서쪽의 방위신인 일곱별을 상징하는 백호가 홍예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광화문보다 규모는 적으나 높은 석대위에 문루를 올려 세우는 유형에 속하며 단층이다 문안에 수문장청, 소궁청, 직소, 루국(漏局), 내사복이 있고, 궁의 담 끝에 서십자각이 있었다. 홍예문이 하나 열린 육축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했다. 이문은 궁궐을 출입하던 관리들이 주로 드나들던 문이라고 한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에 보면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慶會) 남문 바라보고 하직하고 물러나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연추문은 오늘날의 영추문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문무관료들은 송강 정철처럼 이 영추문을 통해서 경복궁에 드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추문을 들어오면 궐내각사가 밀집되어 있었으나, 일제시기에 모두 헐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영추문의 담장 남쪽 끝에는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이 또한 일제강점기에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백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8년(1426) 10월 집현전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짓게 하여 지금의 영추문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고 한다. 현재의 영추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했으나,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5년에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을 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신무문 (보물 제 928호)

      * 자전거 복장을 하신분들 청와대 경비 경찰입니다 *

      경복궁의 북문으로 경복궁의 담장 북쪽 중앙에 있지 않고 약간 서쪽에 치우쳐 있고. 고종 2년(1865) 중건 되었다.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하는데 6.25동란 때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어 보수 하였으며 「고종실록」에 의하면 현판 서사관(書寫官)은 이현직(李顯稷)이라한다. 단간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2익공 양식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건춘문.영추문.신무문은 그 홍예의 높이와 폭, 문루의 평면과 주칸 등이 모두 같은 규모로 되어 있어 정문인 중층의 광화문을 제외하고는 이들 세 문은 모두 규모나 가구.구조수법(架構.構造) 등을 같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은 방위로 볼 때 겨울(冬)에 해당하며, 방위신으로는 현무(玄武)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쪽의 방위신인 일곱별을 상징하는 현무가 홍예의 천장에 그려져 있다. 현재 신무문 밖은 청와대로 이어져 있지만 원래 이 곳은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신무문은 경복궁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현재의 신무문은 고종 2년(1865)에 중건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다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축을 쌓고 가운데 홍예문을 냈으며 정면 2간 측면 2간의 규모이다. 이익공의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소주방

      동궁 북쪽과 자경전 남쪽 사이엔 소주방이 있었다. 소주방은 3구역으로 나뉘어 있다.안쪽 내소주방은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고,바깥쪽 외소주방은 난지당이라고 하여 잔치상을 준비하던 곳이며,뒤쪽 복회당은 생물방이라고도 하며,음료,과자 등 임금의 간식을 장만하던 곳이다. 소주방은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되었으나. 일제감정기에 궁궐의기능이 끊기면서 부엌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1915년 무렵에는 일제는 건물마저 철거시켰다.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2004년 4월부터 소주방터 일대를 발굴조사하고 있으며, 2009년 까지 소주방의 일부를 복원할 계획이다.
          봉인사 사리탑.사리장엄구 (보물 제 928호)


      사리탑은 원래 왕세자의 수복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광해군 12년(1620) 왕실의 발원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봉인사 부도암에 건조 되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에 반출되어 오사카 시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오다가 1987년에 소유주인 이와다 센소의 자발적인 기증반환으로 이곳에 복원되었다.따라서 이 사리탑과 사리 장엄구는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정신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탑의 양식을 통일신라시대 이례의 전형적인 팔각담형을 따르고 있는데 기단부의 상중하대석에는 연꽃무늬,구름과 용무늬,덩굴무늬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여 있고 탑신의 전면에는 구름속에 용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지붕돌에는 용머리를 양각한 팔각의 귀마루가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조선 중기에 제작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리탑과 함께 일괄기증된 사리함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전시 되어 있으며 불사리는 옛 터에 재건된 봉인사의 모형사리탑 속에 안치되어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제 101호)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984~1067)의 묘탑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새워지게 되었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하는 기단부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상여,신선,장막들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봉황,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때 사리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승탑은 고려시대에 들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 임금과 문종 임금으로 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임금은 지광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이 승탑은 선종 2년(1085)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관대첩비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때 북평사 정문부(1565~1624)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벽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병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승전비이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의 업적을 모함한 무리에 의하여 혁혁한 전공을 가려워지고 오히려 선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 후 선생이 돌아가신지 43년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지 85년 뒤인 1708년에는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 최장대(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고을 주민의 뜻을 모아 마침내 북관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약 200년 후 러일 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이게다 마사스게 소장이 이 비석을 읽어보고 자기네 조상들의 패전 기록을 알게 되자 이 비석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버렸다.그 후 이 비석은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 야스쿠니 신사로 옮겨졌다. 이러한 사실을 도쿄에서 활동하던 최서면 선생이 1978년에 옛 기록을 검토 하다가 1909년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조소앙(1887~1958)선생이 기고한 글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으며 이 비석 또한 야스쿠니신사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그 후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수차례 비석반환에 노력을 기울여 2005년 10월 20일 비를 반환받게 되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남북 간의 잃어버린 역사상을 회복하고 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는 증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으로 부터 반환된 북관대첩비은 납북 협의에 따라 2006년 3월1일 북한에 인도되어 원소재지인 함경북도 김책시에 복원되었으며 이 비석은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2006년 4월 25일 세운 복제비이다.
        기타행사

          大射禮儀

       

       


      좌우중앙에 의장물이 보인다

      2중으로 도열해 있는 호위 군사들.좌우측에 각각 있다.

        무희들의 춤


       

      각색기를 가진 병사들과 보호장비인 가리개(흰색칸막이)

      *위에서 부터 임금이 용상으로 올라가고(내시가 양 옆에서 부축)용상 좌우엔 2중으로 호위 병사가 있으며 우측(임금의 좌측)으로 악공이 음악 연주를 하고, 용상아래 엔 신하들이 부복해 있고 그 좌우엔 2중으로 호위 군사가 도열해 있다. 임금의 활쏘기가 끝나면 무희가 춤을 추고 아랫 사진에서와 같이 표적에 맞는 방향을 알리는 各色旗를 가진 병사가 있다. 대사례는 '국왕이 주관하는 활쏘기 의례'로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수단이었다.과녁을 맞추려면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왕과 백관이 참여하는 대사례는 성대한 국가의례이며,국왕의 활쏘기,신하들의 활쏘기,포상과 벌주등을 주는 의식 등 3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대사례는 에절을 갖추고 음악 연주에 맞춰 활을 쏘는 것으로, 예악이 잘 조화된 수준 높은 유교문화라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조선시대 대사례는 모두 6차례 시행되었다.1743년(연조 19)의 대사례는 왜란과 호란 이후 사라진 국가의례를 회복하여 왕조의 중흥을 꾀하려는 의도아래 이루어졌다. 화살을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옷감)와 궁시를 상으로 받았으며 적중치 못한 이는 벌주를 마셨다.
          임금님 행차

       

       

      *강녕전에서 거동하고 경회루 주변을 행차,주변을 호위하는 군사및 의장물*

          수문장

       

      *궁문을 엄히 지키는 병사들*

      **자료는 안내판,경복궁안내팜프랫,문화재청경복궁홈페이지,경복궁에서의 하루,경복궁유산 (한국의재발견)및 기타에서 **

       

      출처 : 정수
      글쓴이 : 이방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