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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한국음반학 창간호](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1년) 225~242쪽에 실린 글의 초고 중 일부입니다. 상기 자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음반자료-콜럼비아 유성기 원반(6) 이선유 판소리(고수:한성준) 명인기획/엘지미디어(LG소프트) LGM-AK006(1CD) 1930·1931년 녹음, 1995년 제작. 노재명 기획/해설/사설 채록. 이선유의 음반에 관한 연구 글/盧載明(국악음반박물관장, 한국고음반연구회원) - 차 례 - Ⅰ. 머리말 ⅠⅠ. 이선유의 生涯에 關한 考察 Ⅲ. 이선유의 音盤에 關한 硏究 Ⅳ. 맺는말 Ⅰ.머리말 이선유(李善裕, 李善有)는 宋萬甲, 劉成俊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편제 판소리의 명창이다. 주1> 고종 말기와 일제 초기의 5명창 시대의 동편제 명창들 가운데 녹음을 남긴 이들로 上記의 세 명창을 꼽을 수 있는데, 이중에서 이선유는 송만갑 다음으로 많은 음반을 남겼고 五歌全集도 남겼다. 주2> 이선유가 남긴 자료는 유성준의 음반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편제의 대명사격인 송만갑의 소리와 가장 잘 비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선유에 관한 문헌기록으로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유일한 것이었고, 오늘날 이선유를 아는 이가 없으며, 오가전집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의 음반이 희귀하기 때문에 이선유의 생애와 음반, 오가전집에 관한 연구는 학계에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 방면의 연구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흡한 상태다. 그래서 필자는 1987년 3월부터 1991년 6월까지 입수한 이선유의 녹음과, 1991년 2 - 7월에 조사한 문헌기록, 현존 명창들의 증언내용을 근거로 해서 이 글을 집필하게되었다. 먼저 이선유의 생애에 관해 소급이 가능한 기록들을 모두 정리했으며, 지금까지 확인한 이선유 음반의 목록 작성과 함께 녹음․발매시기를 고증하고, 그의 음반이 갖는 중요성을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녹음에서 채록이 가능한 사설을 오가전집과 비교하여 오가전집의 정확성 여부도 검토해 보았다. (중략) ⅠⅠ.이선유의 生涯에 關한 考察 정광수(現 82세)가 1991년 2월 12일에, 김소희(現 75세)가 1991년 6월 26일에 필자에게 “이선유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이선유를 직접 보았다는 이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선유의 인적사항에 관한 문헌기록이 극히 적으며, 그 기록들 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 있으므로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내용도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조선창극사(1940년 발행)에 “이선유는 67년전(1873년)에 출생했고, 지금(1940년)은 고향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으므로, 주3> 이선유는 1873년에 태어났고 1940년 무렵에 생존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조선창극사 215-216쪽을 보면 “이선유가 晋州에서 출생했고 京鄕間을 다니면서 활동하였다.”하며, 주4> 1930년 9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晋州 李善有’라는 기록이 있고, 김소희는 1991년 6월 26일에 필자에게 “이선유가 진주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증언했으므로 이선유의 고향과 주된 활동지역은 진주였음이 확인된다. 오가전집(1933년 발행)의 머리말에 “이선유가 소리를 30여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주5> 오가전집의 발행시기를 기준하여 계산하면 이선유가 판소리에 입문한 시기는 1903년 경이 되며, 조선창극사 215쪽의 “이선유가 10여 세에 소리를 시작했다.”는 기록을, 주6> 앞서 밝힌 그의 출생 시기인 1873년에 맞춰 계산한다면 입문시기는 1883년 경이된다. 따라서 상기 두 문헌의 기록에서 이선유의 판소리 입문시기가 서로 약 20여년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확한 입문시기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조선창극사 215쪽에 “이선유가 宋雨龍, 金世宗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7> 이선유에게 배웠다는 제자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밖의 이선유에 관한 문헌기록들은 음반에 나타나는 점과 비교하여 그 정확성 여부를 후술할 것이다. Ⅲ.이선유의 音盤에 關한 硏究 1.音盤目錄 여기 소개될 목록 외에도 확인되지 않은 이선유의 다른 음반이 더 발견될 수 있음을 먼저 밝혀둔다. 목록작성에 있어서 곡명은 음반에 표기된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음반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녹음만 입수된 것은 듣고 난 후 각각의 녹음에 맞는 곡명을 붙였으며 녹음도 입수하지 못한 음반의 곡명은 관련 서적에서 인용하였다. 대개는 동일한 녹음자의 곡이 음반의 양면에 수록되지만 간혹 양면이 각각 다른 녹음자의 곡이 수록된 경우도 있으므로, 주8> 현재 한 면만이 이선유의 녹음으로 판명된 음반은 다른 면의 녹음도 이선유의 녹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녹음 분량의 기준을 ‘음반 수’보다는 ‘음반의 한 쪽 면’으로 정했다. (중략) 2.錄音․發賣時期 考證 이선유의 Columbia 음반 중에 밝혀진 녹음번호는 21040, 21107, 21108, 21406, 21408, 21415, 21439인데 당시 한 사람이 한꺼번에 여러 곡을 녹음했던 점을 고려하면, 주9> 21108 이전과 21406 이후의 녹음번호로 나누어 최소한 두 차례 녹음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선유의 ‘천지광탕’과 朴綠珠의 ‘사랑가’(Columbia 40217-B)의 녹음번호는 각각 21040, 21190이므로 이선유의 ‘천지광탕’이 박녹주의 ‘사랑가’보다 먼저 녹음되었는데, 정선조선가요집(1931년 발행)의 51쪽을 보면 박녹주의 ‘사랑가’의 사설과 음반번호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선유의 ‘천지광탕’은 1931년 이전에 녹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또, 이선유의 ‘비단타령’(21415)과 ‘이별가’(21439)는 1932년 9월에, ‘소상팔경’(21107~21108)은 1932년 10월에 발매되었음이 1932년 8월 18일과 1932년 9월 15일자 매일신보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上記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두 번 녹음되었던 것으로 전제한다면, 이선유의 첫번 째 녹음은 1929-1931년에, 두번 째 녹음은 1929-1932년 8월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Polydor社가 1931년 한국에 영업소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주9> 이선유가 Polydor에서 녹음한 ‘퇴령후’의 음반표면에 발매연도로 보이는 ‘34.5.3’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선유가 Polydor社에서 1931-1934년 5월에 최소한 한 차례 녹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3.音盤評 현재까지 밝혀진 이선유의 음반은 Columbia에 13면, Polydor에 2면, 미상의 음반회사에 1면으로 총 16면(8장 분량)이 남아있고, ‘홍로의 불’(Columbia)과 ‘월하몽’(Polydor)의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아래의 표에 나타는 바와 같이 이선유는 수궁가의 녹음량이 가장 많아, “수궁가에 장기가 있었다”는 조선창극사 216쪽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 구 분: 수궁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단 가 녹음량: 7 면, 5 면, 3 면, 1 면, 1 면, 3 면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이선유와 함께 녹음한 고수는 모두 한성준이며 녹음방식은 모두 전기녹음인데, 소리와 북의 녹음이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비교적 균형있게 녹음되었으며, 이선유의 육성과 한성준의 북가락이 생생하고 분명하게 담겨있어 당시의 녹음기술로는 최상의 녹음으로 평가된다. 이선유의 녹음에서 사설이 일부 와전된 것을 볼 수 있으며 사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선유의 녹음을 들은 김소희는 “이선유의 녹음을 처음 들어보는 것인데 아주 맑고 좋은 목청을 지닌 명창이며 유성준보다 동편제에 가깝다”고 했다. 주10> 이선유의 녹음 중에서 수궁가는 그가 가장 장기로 하던 것이므로 그의 기량이 가장 농축되있다. 그런데 수궁가는 동편제에서 송우룡, 朴萬順, 金贊業의 장기로 전해지며, 주11> 그 뒤를 이은 송만갑, 유성준, 이선유, 朴重根도 잘했기 때문에 이들의 음반 중에서도 수궁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큰데, 주12> 유성준의 수궁가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이들 중 이선유가 수궁가 음반을 가장 많이 남겼다. 그리고 송만갑과 박중근이 ‘고고천변’과 ‘가자 어서가’를 여러 번 녹음해서 실상 수궁가 중에 네 대목을 녹음한 셈이지만 , 이선유는 ‘상좌다툼’만 박중근의 녹음과 같을 뿐 나머지는 송만갑과 박중근의 녹음과 중복되지 않는 것이라 귀중하다. 중복되는 ‘상좌다툼’의 경우는 박중근의 녹음과 유일하게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데, 이선유가 오가전집에 아니리로 기록된 사설을 녹음에서는 앞의 대목에 계속 이어 중몰이로 처리했으며 박중근도 사이사이의 아니리를 녹음에서 앞뒤 대목에 이어서 중몰이로 처리했다. 이것은 유성기음반이 갖는 녹음시간의 제약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선유와 박중근의 ‘상좌다툼’은 일부를 제외한 사설과 장단에서 거의 일치하고 있다. ‘녹수청산’과 ‘팔란세계’(일부)는, 주13> 임방울이나 朴奉述의 것과 비교해 장단과 사설에서 유사하며, 주14> ‘수궁경개’는 장단과 사설에서 박봉술의 것보다는 임방울의 것에 가깝다. ‘수궁에 들어가는데’는 鄭應珉이나 임방울처럼 심청가에 있는 ‘소상팔경’을 빌려다 쓰지 않고 박봉술처럼 따로 짜여진 것을 부르는데 박봉술의 것과 장단은 같으나 사설은 크게 다르며, ‘토끼 배 가르는데’는 임방울이나 박봉술의 것과 장단과 사설에서 유사하다. ‘새타령’은 이선유가 남긴 녹음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서 이 소리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부르지도, 알지도 못하는 독특한 것이며 이선유의 녹음이 현재 유일한 것이다. 주15> 새 이름이 나열된 사설을 절묘한 붙임새로 엮었고, 한성준의 북가락과 기막힌 조화를 이뤄 듣기 좋다. 춘향가 녹음 중에서 ‘이도령 광한루 구경’의 경우는 李東伯이 중몰이로, 주16> 정응민제가 중중몰이 - 잦은 중중몰이(‘백백홍홍난만중’부터 바뀜)로 되있는 것과는 다르게, 주17> 김창룡의 것처럼 장단의 변화없이 중중몰이로만 되있다. 주18> 사설은 이동백, 정응민제, 김창룡의 것과 유사한데, 송만갑제 명창들이 이 대목을 녹음한 유성기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이선유의 ‘이도령 광한루 구경’ 녹음은 소중하다. 『조선창극사』에 기록된 張子伯의 ‘광한루 구경’과는 사설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주19> ‘퇴령후’는 유성기시대에 잘 녹음되지 않았던 대목이므로 유성기음반으로서 전집이 아닌 독집으로는 현재 이선유의 녹음이 유일한 것이며, 잘 불리지 않았던 대목이지만 동편제 춘향가의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불 밝혀들고 어두운 거리를 지나가는 이도령과 방자의 눈에 비춰진 거리와 춘향집의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있다. ‘이별가’는 牟興甲의 더늠으로 전해지는데, 주20>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으며, 춘향가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목 중의 하나다. 이 대목은 경드름을 즐겨했던 송만갑의 장기였고, 아들인 宋基德도 음반으로 남겼다. 주21> 이선유의 ‘이별가’는 송만갑, 주22> 송기덕, 이화중선의 것과, 주23> 장단과 사설에서 유사성을 보이며, 송만갑보다는 경드름을 적게 쓴다. 심청가는 일제 때 동편제에서 柳公烈, 金正文, 曹學珍, 박녹주에 의해 공연되거나 녹음되긴 했어도, 주24> 朴基洪과 유성준의 심청가에 관한 활동 기록은 밝혀진 바 없으며, 송만갑의 경우 1913년과 1926년에 심청가 녹음을 총 6면에 남긴 뒤로는 1939년 타계할 때까지 약 13년간 심청가에 관한 활동기록과 음반을 남기지 않았으며, 張判介와 박중근의 심청가에 관한 활동 기록도 밝혀진 바 없고 오늘날 동편제의 심청가는 박봉술의 타계와 함께 거의 전승이 끊어졌다. 한편 金定根으로부터 崔昇鶴, 黃浩通, 이동백, 김창룡으로 전해지는, 주25> 중고제의 심청가는 인기가 대단했고 음반도 많이 남아있는데 역시 전승이 끊어졌다. 주26> 결국 오늘날 朴東實제와 정응민제만이 전승되고 있으며, 동편제 심청가를 접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이선유의 심청가 음반은 송만갑, 조학진의 음반과 함께 동편제 심청가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선유의 심청가 녹음 중에서 ‘장승상댁 경치’는 유성기음반으로 전집이 아닌 독집으로는 유일하게 녹음된 것으로 귀중하다. 이 녹음은 이동백, 韓愛順, 성창순의 것과 크게 다른데, 주27> 이선유가 진양조에 긴 사설로 부른 반면에 이동백은 중몰이로 매우 짧게, 성창순은 진양조로 짧게 부른다. 이선유는 ‘장승상댁 경치’를 거의 음반 한 면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길게 짰는데 이동백, 한애순, 성창순의 것보다 긴 사설과 느린 장단으로 되있다. ‘소상팔경’은 일제 때 공연장, 라디오 방송, 음반을 통하여 가장 애청되었던 소리중 하나다. 특히 김창룡과 박녹주가 자주 불렀으며, 주28> 이동백, 이화중선, 金楚香도 음반을 남긴 만큼, 주29> 심청가에서 대표적인 소리다. 김창룡의 증언에 의하면, 주30> ‘소상팔경’은 宋光祿의 작품으로 金成玉의 진양조 창안후 진양조로 짜여진 소리 중에서 가장 처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이며 이 곡을 시작으로 진양조 소리의 창작이 본격화 되었다. 그러므로 ‘소상팔경’은 〈송광록→송우룡→송만갑, 全道成, 유성준, 이선유〉로 전승되는 동편제 심청가의 대표적인 더늠 중에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송만갑이 이 대목을 녹음한 바 없고, 전도성의 경우는 그의 더늠으로 조선창극사에 사설만을 일부 남겨 놓았고, 주31> 박녹주가 김정문에게 배운 ‘소상팔경’을, 주32> 박봉술이 朴奉來에게 배운 ‘소상팔경’을 녹음했다. 주33> 따라서 이선유가 음반과 오가전집에 모두 남긴 ‘소상팔경’은 이 곡을 만든 송광록의 소리에 시간상으로 가장 근접하는 것이다. 이선유의 ‘소상팔경’의 특징은 ‘물에 빠져 죽게될 심청이를 위로하려 혼령들이 등장하는데’의 사설이 오가전집의 기록이나 다른 이의 사설과 다르다는 점이다. 적벽가는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장판개, 조학진과 같은 동편제 명창들의 장기였다. 그러나 의외로 동편제의 적벽가 음반은 무척 적은데 송만갑이 음반 2면에, 주34> 이선유가 음반 1면에, 조학진이 Polydor 적벽가 전집에, 주35> 녹음한 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전부이며 유성준과 장판개가 녹음했다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주36> 따라서 이들의 음반을 모두 합한 양이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중 한 사람만의 적벽가 음반 양과 비슷한 셈이므로 적벽가에 장기를 보였던 동편제 명창들의 명성에 비하면 녹음량은 상당히 적은데, 그 이유는 녹음을 기피했던 탓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선유는 적벽가 중에서 유일하게 ‘공명배군’만을 음반 1면에 남겼는데, 이것도 유성기음반 중에 전집이 아닌 독집으로는 유일한 녹음이라는 점에서 귀중하다. 이선유의 실제 활동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적벽가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두 차례 불렀다는 것이 전부인데, 주37> 수궁가를 잘했고 수궁가 음반을 가장 많이 남긴 그가 방송에서 수궁가를 부르지 않고 적벽가만 두 번 방송한 점은 미흡한 근거지만 적벽가도 잘했음을 반영해 준다. 흥보가는 송만갑이 즐겨 불렀던 장기로서 그의 흥보가는 박봉래를 거쳐 박봉술에게, 김정문을 거쳐 박녹주와 姜道根에게 이어졌다. 오늘날 많은 후학들이 박녹주제 흥보가를 부르고 있는 만큼 송만갑제 소리 중에서 흥보가는 가장 잘 전승되고 있으며 음반도 많이 남아있다. 주38> 즉, 송만갑제 흥보가가 그만큼 독보적이고 탁월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계통의 동편제 흥보가는 접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송만갑제를 제외한 동편제 흥보가의 유성기음반으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선유의 ‘비단타령’은 귀중하다. 박봉술, 박녹주, 강도근의 ‘비단타령’의 시작 부분에 “왼갖 비단이 나온다. 왼갖 비단이 나온다”가 이선유의 녹음과 오가전집에는 없다. 이선유가 녹음한 단가로는 현재까지 ‘천지광탕’과 ‘월하몽’만이 확인됐는데, 지금은 모두 불리워지지 않으니 귀중하다. ‘천지광탕’의 녹음번호는 확인된 이선유의 Columbia 녹음번호 중에 가장 앞서기 때문에 이선유의 첫 녹음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여러 녹음을 하는 과정에서 처음 목을 풀면서 녹음했던 것이 ‘천지광탕’인 셈이다. ‘월하몽’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 정선조선가요집 31-34쪽에 녹음자 미상의 ‘월하몽’의 사설이 실려있다. 4.音盤과 五歌全集의 比較 녹음을 듣고 채록한 사설을 오가전집에 비교해 본 결과, 일부의 토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설이 일치했다. 일부는 오가전집에 기록된 사설과 전혀 다르게 녹음되거나, 오가전집의 사설이 녹음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오가전집에는 아니리로 기록된 것이 녹음에서는 장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오가전집에 기록된 장단과 전혀 다른 장단으로 녹음된 경우도 있었지만 사설 전체가 완전히 다른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판소리는 상황에 따라 즉흥적인 편곡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토는 말할 것도 없고 장단과 사설도 즉흥적으로 바꿔 짤 수 있기 때문에, 일부의 토와 장단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 오가전집의 정확성을 크게 좌우하지는 못한다. 특히 유성기음반은 약 3분 정도밖에 녹음할 수 없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으므로 될 수 있으면 아니리를 줄이고 급하게 불러야만 짧은 시간 내에 많이 녹음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오가전집은 거의 정확하다고 볼 수 있겠다. 5. 辭說採錄과 註釋 (이하 생략, 끝) ----------------------------- * 주 1: 鄭魯湜, 朝鮮唱劇史(朝鮮日報社,1940) 215쪽에는 ‘李善裕’로, 이선유의 음반과 每日申報(1930.9.22, 1930.9.28.), 『精選朝鮮歌謠集』(朝鮮歌謠硏究所,1931)에는 ‘李善有’로 기록되어 있음. * 주 2: 金澤洙 著,(京城:大東印刷所, 1933) 이선유의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의 사설이 수록되어 있음. * 주 3: 『조선창극사』 215-216쪽에서 요약․인용하였고, 괄호안의 년도는 『조선창극사』의 발행시기를 기준으로 필자가 계산한 것이다. * 주 4: 원문에서 요약․인용하였음. * 주 5: 주 4)와 동일. * 주 6: 주 4)와 동일. * 주 7: 주 4)와 동일. * 주 8: Polydor 19301의 경우 앞면은 朴初月의 ‘박타령’이, 뒷면은 이선유의 ‘퇴령후’가 수록되어 있음. * 주 9: 黃文平, 한국대중연예사(서울:부루칸모로,1989) 176쪽. * 주 10: 1991년 7월 10일 김소희의 집에서 필자에게 언급하였음. * 주 11: 조선창극사 55,141쪽 / 金昌龍 ‘토끼화상’(Columbia 40249-A)에 “만순씨 박선생 토끼화상이었다”라는 아니리 / 林芳蔚 ‘토끼화상’(수궁가, 아세아 ALC1023-1024, 2카세트)에 “박만순씨 그 양반이 잘했십니다마는”이라는 아니리. * 주 12: 송만갑, ‘토끼화상’(Victor KJ 1014-A), ‘고고천변’(NIPPONOPHONE 6133), ‘고고천변(Victor-Star KS 2012-AB), ‘가자 어서 가’(Victor KJ 1014-B), ‘가자 어서 가’(Columbia 40219-B) / 유성준, ‘토끼와 자라’(Okeh 1685-AB) / 박중근, ‘가자 어서 가’(Okeh 1559-AB), ‘고고천변 상좌다툼’(Okeh 1595-AB). * 주 13: KBS FM ‘국악의 향연’에서 일부만 방송됐으므로 ‘팔란세계’는 일부만 확인됨. * 주 14: 임방울, ‘수궁가’(아세아 ALC 1023-1024, 2카세트) / 박봉술, ‘수궁가’ 뿌리깊은나무 판소리전집 3LP(서울: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82). * 주 15: 1991년 2월 12일에 정광수가, 1991년 7월 10일에 김소희가 “수궁가의 새타령은 모르겠다”고 증언한 바 있음. * 주 16: 이동백 ‘광한루 구경․추천가’(닙보노홍 K 514-AB). * 주 17: 정권진, 조상현, 김동애, 신영희, 은희진의 창극 춘향전 중 정권진과 조상현의 ‘광한루 구경’(현대음반 HDT-0009 카세트 테잎). * 주 18: 김창룡 ‘리도령 광한루 나가는데’,‘방자 거동 보아라’(제비표 B71-AB). * 주 19: 106-107쪽. * 주 20: 조선창극사 28-29쪽 / 李花中仙 ‘8명창제’(Taihei C8267-AB). * 주 21: 송기덕, ‘이별가 초두’(NIPPONOPHONE 6179), ‘이별가 와락뛰어’(닙보노홍 K175-A). * 주 22: 송만갑 ‘이별가’ (Columbia 40175-AB, Victor KJ 1001-B). * 주 23: 주 20)의 음반. * 주 24: 유공렬, 조선창극사 176쪽 / 김정문, 韓國日報(1974.2.1.)의 박녹주 “나의 이력서” 참조 / 조학진, 『매일신보』(1930.11.19.) 제1회 조선음률협회 공연에서 ‘심청이 용궁에 들어가는데’를 불렀음. Polydor 심청전전집(Polydor 19235-19258, 24SP) / 박녹주,『한국일보』(1974.2.1.) “나의 이력서”, Columbia 40088-AB 沈淸水祭 上下, Columbia 40099-B 船人隨去, Columbia 40121-AB 沈淸下直 上下, Regal C172-AB 泛彼中流 上下. * 주 25: “노래 뒤에 숨은 설움, 국창가수의 고금록(3) 김창룡”, 매일신보(1930.11.26). * 주 26: 韓國音樂學論文集(82-10)(성남: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73, 74, 77, 78쪽 참고. * 주 27: 이동백, ‘장승상댁 경치’,심청전전집(Polydor 19240-A) / 한애순, ‘심청가’(뿌리깊은나무 판소리전집, 5LP) / 성창순, ‘1981년 문예진흥원 소강당 심청가 완창실황 음반’(오아시스 OL-2898-1-4, 4LP). * 주 28: 김창룡; ‘라디오방송’, 매일신보(1930.11.19.), ‘조선음률협회 제2회 공연’,매일신보(1931.3.29.), ‘소상팔경’(일축 K538-A, K561-AB, K578-AB) / 박녹주;‘조선음률협회 제1회 공연’, 매일신보(1930.11.19), ‘라디오방송’,매일신보(1930.11.20.), ‘범피중류’(Regal C172-AB). * 주 29: 이동백, ‘소상팔경’심청전전집(Polydor X610-AB) / 이화중선, ‘범피중류’(Columbia 40029-A) / 김초향, ‘범피중류’(Columbia 40081-AB). * 주 30: 주 25)와 동일. * 주 31: 196-197쪽. * 주 32: 1974년 2월 1일 한국일보. * 주 33: 박녹주, ‘범피중류’(Regal C172-A․B) / 박봉술, ‘소상팔경’(신세기 SLN10621, 1LP). * 주 34: ‘위국자 불고가’(일축 K202-A), ‘새타령’(일축 K188-B). * 주 35: Polydor 19260-19277, 18SP. * 주 36: 주 26)의 논문 71쪽 / 문재숙, “비화 명인명창전(下)” 음악동아 1986.12월호(서울:동아일보사) 168쪽. * 주 37: 매일신보 1930.9.22, 28일자. * 주 38: 송만갑, ‘놀부악심가’,‘흥부고생가’(NIPPONOPHONE 6164,6165), ‘박타령’(NIPPONOPHONE 6107), ‘박타령’(Columbia 40219-A) / 장판개, ‘제비노정기’(Okeh 1891-B) / 김정문, ‘박타령’,‘돈타령’(Columbia 40027-AB) / 박중근, ‘흥보안해 자탄가’(Okeh 1649-B) / 박녹주, ‘흥보가’(지구 JLS-1200180-1-3, 3LP) / 박봉술,‘흥보가’(뿌리깊은나무 판소리전집 중, 4LP) / 강도근, ‘흥보가’(성음 RO666, 3LP). |
출처 : 구구덩
글쓴이 : punur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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