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강스한 실루엣이 판타스틱해요" 버터냄새 묻어 나는 느끼한 말이다.
길가는 사람 아무에게 이말을 누구가 할것 같은 말이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옷만드는 사람. 앙드레김을 지목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가 한글 생활에 해악을 끼치는 ‘우리말 해침꾼’에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을 선정했다고 한다.
그의 말 습성을 한 나라의 패션계를 대표하는 사람의 창조적 상상력의 표현에서 나오는 언어의 표현이라고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이미 우리말의 영어 혼용 현상은 '영어가 객지에 와서 고생한다'는 우스개 소리의 차원을 넘어 그 역기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우리말에서 보나 영어에서 보나 무식의 극치와 유식의 극치가 교차한다. 그 심각성은 우리말의 격하와 더불어 타인에 대한 비하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본질의 문제를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떤 것의 이름을 영어로 지어야만 고급스럽다고 느낀다. 오죽하면 아름다운 순 우리말을 비틀고 꼬아서 영어스럽게 만들어 쓰고 있겠는가. 우리는 캐슬. 풀비체. 푸르지오등에 살아야 고급스럽게 사는 것으로 자위하며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영어를 적당히 섞어 쓰며 상대보다 품격이 높음을 은근히 과시한다. 그 저변에는 영어 이름의 명품급 제품을 사고 써야 당신도 고품격 인간으로 대접 받을 수 있다는 상술이나 의도가 숨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당신의 품격은 낮으니 이것을 가져야 품격이 높아진다'는 은근한 비하로 본능을 자극한다.
누구나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말하라면 누구나 당당하게 몇가지를 들지만 정작 영어의 우수성을 들라면 드는 사람이 드물다. 대부분은 '영어가 만국 공용어니까'정도의 초보적인 대답을 할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영어 문화권 국가에 대해 줏대가 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동경을 영어를 씀으로서 대리 만족을 찾는 것 같다. 그것이 지나쳐 우리의 한글을 천민화 하고 영어를 귀족의 반열에 올려 놓는 문화적인 쿠테타를 하고 만 것이다.
"영어는 배우기 어렵다. 영어 문화권은 선진 문화이다. 영어를 못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다. 고로, 영어 문화는 우리 문화보다 고급 문화권이다"라는 등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회이다. 예전의 춥고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이 등식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가히 우리 사회의 영어 숭배 현상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세계 꼴찌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참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에게 미안한 일이다.
한글은 언어학. 문양학적으로도 빼어난 글자라는 것은 세계 언어 학자들이나 문양학자들도 인정한다. 어떤 음성 학자는 우리말의 음성 파동이 자연과 인간에게 가장 근접하다고도 한다. 언어의 품질을 놓고 보면 한글만한 글자가 없는 셈이다. 그 표현 능력도 디지털 시대의 정교함보다 뛰어나다. 이렇게 좋은 말글을 더 갈고 닦아 빛내야 하지 않을까 ?
새삼스럽게 우리말의 우수성을 역설해 한글만 쓰자는 말이 아니다. 영어를 제자리로 돌려 놓고 써야할 곳에서 제대로 쓰자는 말이다. 영어는 본국에서는 언어일 뿐 귀족 대접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어를 가져와 금도금. 은도금을 해 반지 목걸이를 만들어 귀족 장식품으로 만들었다. 급기야 그 장식품의 사용 여부에 따라 사람까지 등급을 매기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영어 숭배가 우리에게는 인간성을 망가뜨리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영어 교육이 우리 사회의 낭비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의 오남용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기능을 인식하고, 최소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영어를 제자리에 두고 제대로 쓰는 것이 옳지 않겠나. 무분별한 영어의 남용에 혼이 빠질 지경이다.
-마음맑은아침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