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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사물놀이 방

농악(農樂)이란 용어에 대하여

<農樂에 대하여>

기록화 우리 문화의 얼굴이자 배달겨레의 얼인 풍물굿은 상고시대 이래로 민중들의 정신이 녹아 있는 커다란 웅덩이였습니다.
세시풍속은 물론 관혼상제에서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풍물굿의 특성은 폭정에 항거하고 외세에 대항하는 투쟁의 힘이 아닐까요?
풍물굿은 그 타고난 신명과 대동굿의 결속력으로 평안도농민전쟁(1811, 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1862), 동학혁명(1894) 등의 큰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 풍물굿의 힘은 부패한 정부에겐 위협이 되었고 그에 대한 탄압은 일제침략기까지 일관되어 왔습니다.

일본침략기에 이른바 문화정책이라 부르던 한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나라 민중들이 대동단결하고 외세에 대항하는 정신의 근원인 마을 두레조직을 해체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두레에 대한 탄압과 함께 노동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고 강제노동인 부역을 통해 공동노동의 두레를 파괴하였습니다.

 

일본가면극 '노'그 가운데 우리 민속을 관찰하던 일본인 학자들이 지역마다 다르게 부르고 있던 우리 민속에 관한 용어를 통일하고자 지역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임의로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탈놀음, 산대놀이, 오광대놀이, 들놀음, 탈춤' 처럼 여러 이름으로 부르던 탈놀이를 '가면극'이라 하였으며, 풍물굿 또한 그들의 가면극인 能(일본말로 노)를 흉내내어 '農樂'이라 하였습니다.
노의 음악인 能樂(Nohgaku)도 그들이 만들어낸 農樂도 일본 발음으로는 모두 '노가꾸'가 됩니다.

농악이라고 하면 시골 어른들이 치던 '농부의 음악'이란 뜻으로 잘못 인식될 수 있으나 그런 의미는 제쳐두고 '풍물굿 죽이기'에 혈안이 된 그들은 굿판을 통제하여 마을굿을 치루지 못하게 했고 풍물굿을 농업생산수단으로 이용하고 도로확장에 동원된 부역에서 노동음악으로 이용했는데 그것도 '農樂'이라는 명칭으로 신청을 해야만 허가를 내 주었습니다.
곧 풍물굿을 대동굿 성격을 묵살하고 놀이 요소만을 뽑아 내어 노동현장에서 공연케 하여 민중의 자주의식을 사라지게 했고, 식량 수탈정책에 이용하여 노동음악으로 전락시켜 민족 예술의 참다운 의미를 잃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제침략자들의 간교에 풍물굿을 비롯한 우리 민속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맥이 끊겼습니다.

해방된 뒤에도 일제로부터 교육받은 학자들이 풍물굿을 연구하면서 분별없이 '農樂'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국가에서 운영하는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에 '농악'이란 명칭을 버젖이 쓰고 있으며, 풍물굿의 원형을 연구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는 많은 연구 서적들이 '농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지역마다 특색있는 풍물 가락처럼 독특하게 부르던 이름들이 많이 사라지고 農樂이라는 명칭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어렸을 때부터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풍물굿을 익힌 시골 어른들께서는 아직도 農樂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더욱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몇몇 풍물굿 단체에서도 연주곡목에 '농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민족문화 활성에 뜻을 가지고 활동하는 대학 동아리에서도 '농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農樂은 우리 스스로 써서는 안되는 말이며, 사라져야 할 용어입니다.

* 農樂을 풀어 쓰는 'Farmer's Band Music'은 얼마나 기막힌 말입니까.
  로마자로 풍물을 적을 때는 'Poongmul', 풍물굿은 'Poongmul Gut'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마치 김치를 'Kimchi'로 쓰듯.

이글은 "혼의가락님"의 까페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대동굿, 영산 쇠머리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