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12 경상남도 하동
오전에 하동에 도착해서 군청에 들어가 밀린 자료 정리를하다가 커피를 얻어 먹었다.
무선인테넷 문제로 kt에 들려 볼일을 보다가 과자를 얻어먹었다.
우체국에서는 자신들의 소관업무가 아닌 일까지 사려깊게 처리해 주셨다.
군산에서 스티커를 보낸다고 우체국 택배가 아닌 다른 택배로 보내왔는데,
이에 대해서 우체국에서 자기네 물품도 아닌 것을 맡고 있어야 함에 대해 짜증을 낼 만도 했는데
아무 이유 달지 않고 친절히 안내해서 찾아가게 해 주셨다.
피곤해서 모초등학교에 배낭을 눕혀 놓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더니
수위아저씨가 지나가시다가 걱정의 말씀을 하시더니 계단 위쪽에 텐트를 치면 좋다고 하신다.
누군가 자신이 경비를 맡고 있는 교 내에서 숙식을 하게 되면, 이래 저래 번거로운 마음 부터 들 터인데,
수위아저씨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를 허락하셨다.
하루동안 경험한 하동의 느낌이라는 것은 상당히 ‘온화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하동공원에서 내려다본 하동 전경]
뒤로 산맥이 떡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아담한 벌판에 세워진 도시여서 그런지 지역민들이 성격이 조급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모습을 가진 듯 했다.
[섬진강 모래사장은 하당군민들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 있다. 마음 내려 놓고 쉬기 좋은 장소 - 이 모래사장은 주기적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졌다함 ]
[섬진강 바로 옆의 산림욕/야영장 - 최고의 쉼터가 이렇게 커플로 붙어 있다니]
[한가하게 먹이를 찾고 있는 비둘기]
[좌측으로는 산림욕장, 우측으로는 섬진강변을 끼고 아침 산책을 하는 모녀]
[섬진강 철로 아래 - 아매 재첩(작은 조개)잡이 배인듯]
저녁에 텐트를 치고 누워 있을 때도 ‘방황하는 청소년’ 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상당수의 지역에서는 (특히나 ‘시’단위 지역) 그 각박한 삶에 대한 답답함으로 저녁마다
남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 먹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모습을 대할 수 있는데...
이곳은 지역적인 정서의 차이여서 그런지, 시종일관 ‘조용한’ 초등학교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경상남도 하동소개
고려시대에는 하동현으로 하였다가,
조선 태종 14년에 남해현을 합하여 하남현이라고 하다가 1895년 하동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우리 군은 한반도의 남단, 경상남도의 최서부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산청군과 함양군,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군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진주시와 사천시, 남쪽으로는 남해 바다를 경계로 남해군과 접하고 있어 2개도와 8개 시군과 접하고 있다.
장엄하게 우뚝솟은 지리산 국립공원과 맑고 푸른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산자수려한 자연과 임진왜란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 승전장 이었던
한려해상국립공원, 청정해역의 노량 앞바다등 아름답고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며
화개면 기슭에 자리한 신라고찰 쌍계사와 지리산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있는 불일폭포,
지리산 반야봉 기슭에 위치하고있는 칠불사등 풍부한 관광자원과
흰 모래와 노송이 어우러진 백사청송, 하동포구 팔십리의 절경등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구례에서 쌍계사를 지나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방향으로 3~40분 달리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최참판 댁이 위치하고 있다. (하동군 소개문 발췌)
4월 13일
[하동초등학교 캠페인]
새벽에 몇 차례 비가 뿌렸다.
수위아저씨가 전날에 교실 들어가는 지붕 덮여진 계단 위쪽에서 텐트를 치라고 하셨는데
그리 안했으면 (보성에서처럼) 자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짐 옮기고 텐트 들어서 나르를 ‘벌짝’을 떨을 뻔했다.
비몽사몽간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 캠페인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섯시쯤 되어서 수위아저씨가 깨워주셔서, 일어나 짐을 꾸리고 학교 진입로에 섰다.
학교 외곽부분을 수리중이어서 좀 어수선한 기분이었다. 흐린 하늘에는 낮게 깔린 구름이
빠른 속도로 대기를 가르며 드문드문 비를 뿌렸는데, 하늘 한번 보고 좌우 학생들 들어오나를 살피고 했다.
[하동초등학교 들어가는 옆문 - 공사중인 전경]
그렇게 아래위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선생님 한분이 오셔서 뭐하냐고 묻는 것이다.
이런 이런 캠페인 한다고 말씀 드리니, 한국사회에 대해서 통탄하시는 것이다.
평화롭게 가정생활하고 남는 여가를 이용해서 이런 일을 해야 할 터인데,
꼭 이렇게 ‘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라니’... 라시며...
(이 말씀은 고향 군산에서 걱정해주시는 분이 해주신 말씀이라 정감이 들었다.)
뭐 개인적으로는 희생이라고 할 것도 없고, 캠핑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이해를 해주시는 선생님을 대면하니 참으로 반가웠다.
더군다나 캠페인 중에 나타나서 말거 시는 선생님 셋 중에 한명으로 부터는
‘잔소리’(쓸데없는 짖 하지 말라, 휴지 떨어진다, 우리학교는 되었으니 가 봐라는 등)를 듣게 되기 때문에
33.3%의 긴장감을 가지고 그를 대했기 때문에, 이해해 주시고 수고하라는 격려까지 해주셔서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이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스티커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비가 오다 말다하고 올 때도 많이 쏟아졌다가 조금씩 왔다가 대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 조금 온다고 해서 캠페인을 접고 갈 수가 없었다.
하동에서는 안정되게 묵을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캠페인을 끝내고 가야 하는 이유로
공수 받은 스티커 2천장을 다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강우는 감수해야 했다.
그나마 벚나무 하나가 비를 좀 막아줘서 ‘직격’으로 쏟아지는 비는 덜 맞은 편이었다.
아이들 우산을 젖히고 하나씩 주려니 애로가 많았지만, 아이들이 잘 받아가서 기쁘게 활동을 했다.
오랜만에 스티커를 전해주려니 미소가 잘 띄어지지 않아서 많은 애로가 있었다.
‘눈빛’ ‘표정’ ‘말투’ ‘건네는 스티커’ 이 네 개가 최고의 조화를 이뤄야 최고의 ‘자극’이 있는 것을~
캠페인을 끝나고 학교 한 바퀴 빙 돌면서 쓰레기 한 봉다리를 주워서 버리고 나니,
몸이 비에 흠뻑 젖어 있어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1주일 넘게 옷도 못 갈아입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참에 옷도 갈아입고 떼도 벗기고 했다.
저녁
저녁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동성당에 가서 문을 두들겼는데,
그곳에서 사무를 보시는 선생님께서 정말로 친절하게 묵을 방을 안내해 주시고 하나하나 챙겨주시기 까지 하셨다.
참으로 반가운 모습이었다.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교회는 안된다.’고 막무가네로 거부하거나
그야 말로 ‘사무적’으로만 사람을 대하면서 ‘교회는 잠자는 곳이 아님의 현실’을 설교 해주는 이들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오랜 손님을 맞듯이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분은 또 처음 맞게 되었다.
[천주교 하동성당]
오랜만에 편히 쉴 곳을 제공받았기는 했지만, 아침에 비를 맞고 캠페인을 했던 후유증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서 일찌감치 누워야 했다. 전기 온돌방이 뜨끈뜨끈 끓고 있었지만, 깔판을 책상위에 펴고 배낭을 깔고 누웠다.
이것도 직업병의 일환일 듯 한데, 땅바닥에서만 자 버릇을 하다 보니 따뜻한 바닥에는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온도를 낮춘다고 온돌 스위치를 꺼버린 탓에 새벽에 깨서 한참을 뒤척거리면서 또 한기가 들어온 듯 했다.
근 1주일 동안 추워서 중간에 안 깬 적이 없었다.
하여간 편안한 잠자리 제공 받은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성당 사무실에 다음과 같이 쪽지를 하나 써서 남겼다.
거지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을
예수와 같이 대해주시는
성당에 은총이 충만합니다.
행운도 더불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상가에서
아이들 야외 유료 놀이터를 관리하시는 할머니에게 양해 말씀 드리고 배낭을 잠깐 맡긴 후에,
상가를 돌면서 스티커를 나눠주고 다녔다. 하동 중심가의 좌우로 교차된 골목길 대부분이 재래시장이었는데,
군단위 재래시장이 어떻게 이렇게 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래시장에 상가가 죽 들어선 모습]
[물건 파는 할머니들]
[깡통에 불피우는 할아버지]
[좌판하시다가 일찍 물건을 팔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 - 힘이 많이 빠져 보이네요.]
특히나 이곳 재래시장을 돌면서는 섬진강에서 주로 잡히는 ‘재첩’(작은 조개)국집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하동 들어가는 입구 국도변]
상가를 돌던도중에 미곡상회 한 곳에서 할머니와 한참을 말씀 나눴었다.
앞에 조그마한 박스에 개가 두 마리 들어앉아 있길래 쓰다듬어 주고 있으려니,
할머니가 사람이 그리우신지 나오시더니 어디서 왔느냐부터 이것 저것 물어오셨다.
할머니는 이곳 토박이이신데 20세 때부터 장사를 시작하시다가 78년도에 가게를 냈다고 하신다.
상점의 이름도 큰 딸 이름으로 지었단다.
기존의 간판에 한번 덧댄 흔적이 보인다.
[현자미곡상회 전경]
78년 이후 이 터를 벗어나지 않고 죽 장사를 해 오셨다. 현재 나이 75세.
과거에는 사람도 많고 장사도 잘되고 했는데,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겨서 물건이 잘 안 팔린다고 걱정이 많으셨다.
얼굴에 수심 가득한 그 모습이 세월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듯 했다.
[군립도서관 옆 가게에서]
군립도서관 옆 조그마한 가게가 하나 눈에 띄었다. 간판도 붙지 않은 가게였는데,
라면과 과자를 하나 사서 배낭에 짚어 넣으면서 할머니와 말씀을 나눴다.
이 가게는 50년 된 가게란다.
625 끝난 직후 부터 해서 여기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하셨다는데,
반백년 동안 이지역에서 생겨났던 일 들을 바로 이 자리에서 계속 지켜보고 계셨단다.
자식들은 모두 공무원을 하시고, 교편을 잡고 계셨다.
자식들 모두가 문제없이 반듯하게 컸단다.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다가, 요새 세상이 '어른'이 없어서 어지럽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맞다고 장구치시면서 당신도 본인의 자식들과 며느리 등에게
필요한 때 필요한 얘기를 많이 하며 살아오셨다고 하신다.
이러한 뿌리있는 '근성'이 인정을 받았는데, TV 에서도 이들의 삶을 찍어가셨다고 하신다.
하동공원
오후에는 하동공원으로 올라갔다.
공원 꼭데기에서는 사방이 넓게 트인 하동의 전경이 들어오는데,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 내렸다.
[하동공원전망대]
[섬진강이 머그믄 햇살]
[섬진강 전경]
[하동공원 반대편으로 보이는 X산의 대숲]
[쭉 뻗은 대나무]
[섬진강을 사이로 두고 철로가 하나 가로놓여졌다. - 건너편은 전라남도 광양]
[하동의 전경]
[누가 쌓았을까]
[공원꼭데기 전망대 의자]
[저이는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일까?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고 있을까]
[한적한 오후 한때]
.
[이렇게 경치좋은 곳에서는 시상이 절로 떠오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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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볼 일 보다가 여덟시에 하동초등학교에 왔더니, 무슨 축재 한다고 학교 강당이 들썩 들썩 했다.
열시 좀 못되어서 캠프파이어를 했는데, 사회자의 익살스러움이 흥을 자아냈고,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가요가 마치 덩달아 소풍 따라온 기분을 갖게 만들었다.
공식 행사가 끝나는 40분이 지날 때 까지 나는 주변을 돌면서 사진을 찍었다.
[캠프파이어 전경]
그 후로는 텐트로 돌아와 침낭에 들어와 누웠는데, 헤어지기 아쉬운 이들이 30여명쯤 화톳불 주변에 둘러앉아서
두 시간 넘게 흥겹게 노는 소리가 들렸다.
-
이날 저녁부터 식사체계에 엄청난 혁명이 일어났다.
고민 고민 하다가 반찬 도시락 하나를 샀다.
점심에 음식점에서 밥 먹으면서 김치 몇 쪼가리를 담아 와 반찬으로 먹었다.
몇 일 먹을 음식을 가지고 다니려면 이래저래 번거롭고 무겁고 해서 아침, 저녁 맨밥으로 먹었는데,
식당에서 점심 먹으면서 그날 먹을 음식만 통에 넣어 오니 이 아니 간편하지 아니한가.
[식단혁명! - 반찬통]
2500원 주고 샀는데, 아쥐매의 김치가 안 샌다는 확신과는 달리 저녁에 먹으려고 뚜껑을 열어 봤더니
국물이 찌끔씩 넘어 오려고 폼을 잡고 있었다.
4월 15일 일요일
아침에 일곱시 좀 넘어서 어기적 거리며 일어났다.
이곳 초등학교의 아침은 그야말로 ‘적막’했다. 학교 외곽이 공사중 이어서인지 아침에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이를 볼 수 없었다.
어제 밤에 캠프파이어 하고 난 후에 운동장을 복원하기 위해 삽질하는 아저씨 하나가 있었고,
학교 건너 쪽으로 종종 기차소리만 요란했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특이한 몇 가지 사실들을 많이 보게 된다.
군청은 신청사여서 안 그렇지만,
‘도서관’ ‘경찰서’ 건물들이 많이 낙후되어있고, 화장실도 얼마 전까지 남녀 하나로 썼던 흔적이 있다.
[화장실 안내표지]
-> 이것은 ‘낙후성’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의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군 예산도 여느 다른 군과 다르지 않게 3천여 억원에 육박을 하는데...
그 돈을 군 지역의 소외계층을 위해서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서 이러한 ‘검소함’을 감수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루에 너 덧 번 ‘민방위본부’에서 불조심 하라는 ‘카랑카랑’한 소리가 읍내에 울려 퍼지는 점도 참 특이하다.
[무위?의 저녁]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눈앞의 현실에 마음 치우쳐짐이 없이 덤덤히 대하는 것이 ‘무위’이던가?
그런 면에서 이날 저녁은 ‘무위의 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도서관에서 자료 정리 좀 하다가 8시쯤 되어서 한짐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서니 비가 떨어진 흔적이 보였다.
그렇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도 불고 비도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현재 머물고 있는 학교 구석이 그런대로 비를 막을 수 있는 장소 이기는 하지만,
비가 많이 떨어지거나 바람이 불면 빗물이 튀겨서 텐트가 흠뻑 젖기에 딱 알맞다.
그래서 가는 길에 큰 예배당에 부속건물이 두 서너 개 붙은 교회가 하나 보이길래 약간의 고민 끝에 찾아 들어갔다.
성당도 아니고 교회의 경우에는 안재워 줄 확률이 훨씬 높은데,
괜히 하루 묵으려고 갔다가 박대 당하고 나서 텐트 치고 자려면 이래 저래 마음이 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인기척이 들리는 건물에서 사람을 불러내 하루 묵어 갈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답변은 간단 명료했다. ‘여기에는 잠 재워줄 곳이 없’단다.
그렇지. 교회가 길가는 거지를 재워주는 공간은 아니지...
과거 같아서는 이런 상황에 접하면, 발길을 돌리면서 속으로 ‘교회가 어찌 그런가?’
‘저렇게 길가는 나그네도 포용하지 못하는(인간사랑 자연사랑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네 장사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저런 교회가 많이 있다 보니 한국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지’ 하면서 통탄했을 텐데...
‘저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 대면한 저들의 현실이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학교 건물 계단 안쪽에 텐트를 치면서도 불편한 마음 없이 그저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과거 텐트를 치고 나면 이런 저런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쳐다보든지 시비걸 것에 대한
‘불안감’이 들곤 했는데, 그러한 긴장감도 상당히 일소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덤덤히 접할 수 있는 ‘무위’ 적인 소양이 조금 길러진 것인가?
하지만 ‘너무’ 무위하지는 말도록 하자.
힘없는 민중이 핍박받는 현실, 파괴되는 자연을 시종일관 ‘지켜만 보는 것’을 무위라고 여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관련글 -> 무위의 오용에 대하여(아래참조)]
4월 16일
나름대로 공간배치를 잘 한다고 했지만, 비바람이 불어대니 텐트 한쪽이 젖어들어 갔다.
밤 12경부터 해서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바람까지 불어대니 텐트 후뢰싱이 퍼덕거리면서 벗겨지고를 했다.
다행히 위에 지붕막이가 있어서 직접적으로 빗물이 내려치지 않았지만, 귀를 간지럽히 빗소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숙식장 전경]
아침에 일어나서도 계속 비가 내리고 있어서 학교 앞 캠페인을 하지 못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맘씨 좋은 수위아저씨께서 이곳저곳을 돌면서 학교 문을 열고 계셨다.
[물받이 아래로 빗물 떨어지는 풍경]
[어느 아이가 토요일에 바삐 벗어 놓고간 실내화 - 휴일 놀생 각에 정신없이 달려나가다가 저리 빠트리셨나]
[고인빗물 떨어지는 풍경]
아이들이 등교할 시간이 되는 이유로 계속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서, 판쵸우위로 배낭을 둘러싸고
모자를 뒤집어 쓴체 빗속을 뚫으며 근처 편의점/우체국/군청 등에 들러서 볼일을 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는데, 그에 아랑곳 않고 나를 짖 누르며 쉼장을 펌프질하는 등짐이
유난히 야박스럽게 여겨진다.
이런 날에는 좌우지간 방에서 편히 쉬면서 부치게 해 먹는 것이 최고인데...
가만... 비 피하게 텐트 쳐 놓고 밀가루 반죽해서 빈대떡 구워 먹을 수도 있쟎아.
하아~ 이 발상의 전환이라! 왜? 비오는 날 텐트 쳐 놓고 그 안에서는 빈대떡 해먹을 생각을 못했을까?
후라이팬 하나 사서 들고 다니는 수고만 감수하면 되는데...
비올 때 빈대떡 구워먹는 용으로 그걸 장만해야하나?
... 고민 중.
4월 17일
[하동중고등학교 활동]
남해로 출발하기에 앞서서 스티커 남은 백여장 정도를 이 입구에서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배포했다.
처음에 이쪽 골목(아래 사진)에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길인 것을 모르고,
대로변 정문쪽에 서 있다가 내리 세녀석이 줄줄히 안 받고 가길래... ㅠㅜ
터가 좀 안좋다 싶다 해서 자리를 옮겨서 나눠줬더니, 잘 받아가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초등학교와 고등학생들의 중간에선 중학생들은 스티커 받아서 버리는 확률이 가장 높다.
또한 한 두 녀석이 스티커를 버리기 시작하면 뒤에오는 녀석들이 줄줄히 스티커를 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헌데 이 골목으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함께 등교하면서 학교생활에 집중력이 생기는지,
몇장 나눠주지도 않았지만, 스티커를 버리고 가는 아이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스티커를 나눠주다보면 여자아이들이나 남자아이들이나 수즙어하면서 스티커를 받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스티커 나눠주기가 훨씬 편하고 고맙기까지 하다.
게중에는 상당히 '뻣뻣'하게 대하면서,
아예 무시하는 투의 모습으로 반응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이들도 있다.(어느지역이나 공히)
그러한 폐쇄성은 '생활의환경'과 '세월'이 그들에게 가한 압력 덕분이리라...
[하동중고등학교 입구]
[캠페인 끝나고 가는데 유치원 차를 기다리는 꼬마 하나 - 무거운 소품을 들고 끙끙~]
- 2007. 4. 17 / 채우려는 욕심보다 비우려는 마음으로... -
------- 긴 글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해로운 글??입니다. -----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눈앞의 현실에 마음 치우쳐짐이 없이 거울 비추듯이 덤덤히 대하며 유유자작하며 사는 삶.
이는 노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적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위의 개념은 ‘기심’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과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돈/권력)욕심’에 의해서 ‘황폐화되는 인간성’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졌다.
무위는 ‘의지작용’에 의해서 빚어지는 갖은 욕망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자기집중’을 중단하여 자아를 해방 시킬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준다.
문제는 이 ‘무위’가 ‘존재의 작용’에 대해서 그야 말로 ‘관조’하는 관점을 취하다보니, 이것이 상당수의 이들에게는 ‘극단적인 수동성’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되지 않는 것’의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 특유의 수용적 관점을 제공할 뿐,
‘자기 자신’이라는 변수가 그 ‘되지 않는 것’ 과 ‘되는 것’에 끼어들어서 그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이 무위의 개념은 ‘실존’ ‘주체’를 빼낸 그야 말로 극히 ‘객관적인 존재의 원리’를 ‘관조’한 극단적인 ‘관념론’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도’와 ‘무위’를 논하는 이들이 (핍박받는 민중/파괴되는 환경의)세상사에 끼어들어서 뭔가 ‘의지작용’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기며, 그냥 덤덤히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고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 이율배반적이게도 자신의 (실존적으로)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문제에 대해서는 ‘응당’ 그것을(열심히) 취하는 괴리를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무위’의 개념은 그러한 이들에게는 ‘객관적인 존재의 원리를 관조한 관념론’일 뿐이고, 자신의 피와 살이 물질적 필요를 갈구하는 ‘개인적인 삶’은 ‘현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상의 경계가 생기고, 작용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라는 주체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틀림없이 발견하는 이러한 분열을 스스로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무위를 나는 ‘관념적 무위’라고 말한다)
이는 극 소수 좀 더 적절한 ‘무위’를 실현하는 이들이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아 인류와 환경에 ‘공명’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다.
이러한 극소수 좀 더 적절한 무위의 개념에 자신을 내 맡긴 이들은 ‘자아가 없다’는 의미를 다른 이들과 같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무’라는 ‘(회의주의적)’ 의미로 여기지 않고, ‘(편견에 일관한)그런 자아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명증해진 자아를 인류와 세계로 확대해서 그 안에서 하나의 ‘작용’(사랑)으로 어우러지려는 시도를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무위를 나는 ‘삶으로서의 무위’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이들(관념적 무위자들)이 이 ‘무위’를 자기 자신의 현실과는 관계없이 대상화 하고 관념화 하여 결국 세상의 문제를 그냥 덤덤히 지켜보는 극단적인 수동성에 빠지는 것과는 달리, 그 극소수의 이들(삶으로서의 무위자들)은 ‘자기’라는 ‘변수’를 집어넣어서 덤덤히 세상을 관조하기는 하되, 현실이 자신의 작용에 의해서도 뒤바뀔 수 있음을 인지한다.
대부분의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알아,
보여지는 세계현실을 마치 TV 시청하듯이 덤덤히 관조하고 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능동적인 생명의 약동]은 오직 자신이 ‘지켜보는 것’ ‘지켜보는 대상’의 그것이어야 하지,
자신의 능동적인 생명의 힘을 세상과 조화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들의 ‘능동적인 생명의 의지작용’이 세계와 작용할 때가 있기는 한데,
이는 자신의 밥 벌이 할 때이다.
반면 [삶으로서의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되지 않은 것의 - 되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되는 것의 - 될 수 밖에 없음의 원리를 아는 것은 전자와 같되,
세계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위치해 있음을 알아 자신의 ‘의지작용’이 영원의 한가운데에서,
즉 ‘지금’ ‘여기’에서 모든 존재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까지 판단한다.
그의 ‘의지작용’이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넘어선 인류와 환경의 영역에서 이루워지는 것은 당연한데, 이는 [관념적 무위]를 즐기는 이들이 ‘자아’를 버린답시고 세상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끊은 것과는 달리, 그들[삶으로서의 무위]를 즐기는 이들은 ‘(편견에 일관한)그런 자아’를 버리고 인류와 자연에 자신의 건전한 자아를 확대하여 능동적인 생명의 약동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기심’을 바탕으로 한 ‘효율성’과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돈/권력)욕심’에 의해서 ‘황폐화되는 인간성’에 대한 반발로 만들어진 이 ‘무위’의 개념이, 그 개념이 만들어졌던 근본적인 목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길로 향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인류와 환경의 파국이 빚어지고 있는 지금, 이 현실을 TV 지켜보듯이 ‘관조’만 하고 있는 [관념적 무위]는 ‘황폐화되는 인간성’을 방조하는 역할만 하는 격임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이 황폐화에 맞서서 ‘해방된 자아’를 가진 이들의 세상을 위해서 [삶으로서의 무위]를 실현시킬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지만 굳이 일부로 ‘삶으로서의 무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무위’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결과이다.
위에서는 ‘무위’의 개념을 크게 두개로 구분해서 나눴지만,
실지로의 ‘무위’의 개념은 우리 각각의 사람의 대가리 숫자만큼이 있다.
과연 나 자신이 지금 내가 진정 원하는 ‘무위적 삶’을 살고 있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 들어찬 ‘무위’의 개념이, 내 개인적 ‘기질’ ‘감정’ ‘경험’ ‘가치’에 의하여 ‘재단’되면서 내가 진정한 무위로 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지 되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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