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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방~/하동사랑 코너

하동은 이런땅입니다.(옮긴글)



사람들은 물줄기를 따라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병풍 같은 산의 품안에서 단잠에 들었고 곡식을 길러낼 땅이 있는 곳에서 허리 굽혀 웃었다. 그렇게 물과 산과 들이 있는 땅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장이 들어섰고 혼사가 오갔고 족보는 두터워져갔다. 하동(河東)은 그런 땅이다. 마이산, 지리산, 백운산 줄기에서 흘러온 물이 섬진강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가는 것을 온몸으로 받쳐주는 땅. 바지런하게 손 놀리면 산과 강의 열매들로 배부른 땅, 눈 멀어도 몸이 돋을 볕처럼 환해지는 맑은 기운의 땅. 그래서 어머니 몸 속 같고 아버지 등판 같은 땅. 마을사람들 만나 몇 마디 말 나누다 보면 ‘살만 하다’는 말이 ‘행복하다’는 말로 치환되는 땅. 가만히 걸어 들어가 누우면 지천했던 마음도 누그러지는, 살 붙이고 ‘살만 한’ 땅, 하동은 그런 땅이다.





당신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지내요?’라고. 나도 당신들에게 묻는다, ‘괜찮아요?’라고. 활짝 핀 꽃 속을 들여다보거나 바람에 온몸을 흔드는 풀잎들을 바라볼 때면 그런 질문을 받는 것만 같다. 나는 섬진강변에 서서 ‘벚꽃비’를 맞으며 대답한다, ‘살만 해요’라고. 저기, 꽃구경 나온 당신들도 좋아서 웃음 멈출 줄 모른다. 우리는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행복하군요’라고.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를 지나 신흥마을까지, 화개천을 거슬러 오르는 화개골 30리는 50~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줄지어 길을 만들고 있다. 거기, 한쪽 끝에서 불을 댕긴 듯 와- 하고 일어난 벚꽃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풍성하다. 거기, 꽃 소식이 한 소식을 얻는 것인 양 꽃구경 나온 이들도 풍성하다. 노란 유채꽃밭에도 벚나무 아래에도 깃들어 벅찬 숨을 고른다.
우듬지에서 꽃이 터져 나오기까지 나무는 산통과도 같은 진통을 겪는다고 한다.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과 가지를 뚫고 나오는 꽃들이 요동치는 동안 사람들도 앓는다고 한다. 그래서 꽃구경 나온 이들의 모습은 조용하고 오달진 함성 같은가. 된통 앓고 나서 창문을 열어젖힌 사람들처럼 가벼워 보인다. 세상에 갓 태어나 눈 맞추는 아기를 보면 금세 아픈 것도 잊고마는 어미처럼 꽃 핀 나무들도 곱고 순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꽃 앞에 서면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지면서 한없이 착해지고만 싶은 건.
그 길 위에 화개중학교가 있다. 화개(花開), 그 이름처럼 꽃망울 터진 듯 축구부 아이들이 교문에서 뛰쳐나온다. 파란 유니폼을 입고 입을 한껏 벌리고 꽃잎이 흩날리는 길 위를 뛰는 아이들이 싱싱하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왁자하게 달리다가 선두의 구령소리에 발을 맞추는 아이들은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꿈꾸는 자의 행복에 대해서. 아이들이 길 끝으로 사라질 즈음 고개를 젖히고 산을 올려다보자 드문드문 차밭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이 깊어질수록 차나무가 산을 빼곡히 메우는 화개골엔 이제 막 매끄러운 물빛 찻잎이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찻잎이 오를 때면 이곳 사람들의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한다. 일을 시작할 수 있어 행복한 때가 온 것이다.





“잭살차 따는 때야. 요즘은 바빠서 하루에 두세 시간도 못 자.”
새로 오른 잎이 참새[雀]의 혀[舌]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작설차(雀舌茶). 차밭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작설차를 하동 사투리로 ‘잭살차’라고 발음했다. 여기저기 깎아지를 듯한 산중 차밭엔 ‘잭살차’ 만들 새잎을 따는 아주머니들이 꽃처럼 붙어 있었다. 바로 이곳이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다.
지리산 차의 90%가 생산된다는 화개골은 지구상에서도 보기 드물다는 야생 차나무 군락지다. 게다가 배수가 잘 되는 토질, 화개천이 섬진강에 합수되면서 생기는 안개가 햇빛과 습도를 조절하는 지리적 조건, 밤과 낮의 기온차가 급격하게 나는 산중의 기후적 조건이 이곳의 차 맛을 일품으로 만든다. 신라 흥덕왕 때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이곳에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산중에 넓게 펼쳐진 차밭이 이곳 사람들의 생계를 잇는다. 화개골의 500여 가구 중 200여 가구가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보면 ‘다원(茶園)’ ‘제다(製茶)’라 이름 붙여진 찻집들이 숱하게 보인다. 어디에서든 정성 들여 만든 수제차를 맛볼 수 있지만, 집집마다 차 맛은 다르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차를 만들 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차를 따고 말리고 덖는 이 즈음의 화개골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다.
업체 등록을 하지 않고 차나무를 키우는 집들이 훨씬 더 많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차밭을 일구는 이들이다. ‘다원’이라는 말을 달지 않았을 뿐, 그리고 그런 말을 달 필요도 없다는 듯 차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마을길로 들어서면 산등성이의 차밭 아래 아담한 마을들이 포근하게 자리 잡고 있다.
“화개골 어머니들은 찻잎을 ‘약초’라고 부르셨어요. 새순을 따서 나물을 해 드셨죠. 그게 차나무인 줄도 모르고요.”
이곳에서 차밭을 가꾸는 농사꾼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찻잎은 ‘약초’라고.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사막에 사는 사람은 사막에서 약이 되는 것을 구했듯 차 마을 사람들에겐 차가 양식이었고 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농사의 신 ‘신농씨(神農氏)’는 모든 식물의 맛을 보다가 독초에 중독 되었을 때 찻잎을 먹어 해독하지 않았던가.
“식구들이 아프면 어머니가 찻잎을 가마솥에 넣고 다려서 주셨어. 말린 찻잎을 보자기에 싸서 벽에 매달아 놨다가 겨울엔 감기약으로도 쓰고.”
차밭에서 어머니 얘기를 하던 노인을 따라가니 차밭 바로 아랫집으로 들어간다. 마침 그의 아내는 막 점심상을 내고 있었다. 정지를 들여다보니 가마솥이 있고 살강엔 시어머니께 물려받았을 법한 오래된 그릇들이 놓여 있다. 수줍은 듯 단출한 점심상을 들고 정지 문턱을 넘어 오는데, 밥상엔 고봉으로 담은 두 사발의 밥과 아침나절에 남편이 산에서 따온 두릅과 손수 만든 초고추장과 열무김치가 푸지게 놓여 있다. 마주앉아 밥 먹는 내내 아내의 젓가락은 두릅을 집어 남편의 입으로 간다. 나무에서 솥을 거쳐 밥상을 거쳐 서로의 입으로까지 가는 사이 두릅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행복한 두릅이 된다.
“저 양반은 술을 전혀 못하는데 나는 술을 좀 해. 술을 한잔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이거고 저거고 무서울 게 없어져. 그러면 저 양반한테 하고 싶었던 말 다해. 그게 사는 행복이지, 뭐.”
아내의 말에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짓는 남편도 그게 행복인가 보다. 서로가 잠깐 온화하게 열없어진 사이 남편은 점심상을 물리며 물을 찾는다. 아내는 마루 한쪽에 놓인 양푼에서 물을 한잔 떠서 내미는데 그 색이 맑다. 숭늉인가 싶었는데 찻물이란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늘 마셔왔단다. 이곳 사람들에겐 찻물을 물처럼 마시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들이 내게 대접한다고 건네는 것도 그 찻물이다. 차는 워낙에 ‘신선의 양식’이라고 할 정도로 예로부터 귀한 것이니 나는 성찬을 받은 거였다.
차는 함께 나누는 자에 따라서도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차 맛을 알 것 같았다. 그야말로 모태(母胎) 다인(茶人)인 화개골 사람들과 툇마루에 앉아 사발로 떠서 나누는 차 맛은 환하고 맑았다. 그날의 산과 같고 하늘과 같고 바람 냄새가 좀 났다. 어느 찻집의 가장 비싼 차 맛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지만, 그 부부가 사발에 건넨 차 맛의 여운은 여행 내내 몸 안을 맴돌았다.





평생 차를 대하는 사람들이어서인지 마을들 모두 정갈하다. 거기, 어느 집 마당에 들어서니 새물내 나는 옷을 입은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맞은 편 산자락의 차밭과 저 아래의 꽃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꽃들이 올해도 여지없이 반갑고 고마운 양. 열린 대문이 그림 틀이 되고, 그 틀 안에서 구름도 햇빛도 시시각각 변하니 한번도 같지 않은 그림을 바라보는 게 큰 행복이라는 듯. 며느리가 빨래를 너는 것도 나비 두 마리가 그 앞을 날아가는 것도 다 늙은 아들이 지게를 지고 문을 나서는 것도 모두 그 그림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품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식들이 품 안에 들고 나는 것도, 이 생에 한 평생 들고 나는 것도 모두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문을 들고 날 때, 기원을 하기도 하고 뜻을 품기도 하도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도 그녀의 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무엇엔가 이끌리는 듯 자꾸만 마을 길로 들어서게 되는 화개골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품고 사는 문 하나쯤.
내가 하동에서 만난 또 하나의 문은 쌍계사 금강문(金剛門)이다. 금강문은 절에 들어설 때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로 통과하게 되는 문으로 불법을 지키고 속세에서의 더러움을 씻어낸다는 의미의 문이다. 금강문에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모셔져 있는 것은 흔치 않은데, 쌍계사 금강문의 왼쪽엔 부처님 곁에 바짝 붙어서 비밀스러운 내용을 들으려 했다는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오른쪽엔 큰 힘을 가졌다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있다. 거기 가만히 서서 처마를 올려다보다가 금강문을 통과하는 한 수녀님을 만났다.
“절이든 성당이든 교회든, 어딘가로 가기 위한 첫 발걸음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겠어요? 이 사찰 좀 봐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기 절하는 신도들의 마음도 얼마나 아름다워요.”
흰 머리칼이 꽃처럼 잔잔한 겔트루드 수녀님은 꽃나무 곁에 앉아 미소지었다. 세상을 향한 넓은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성스러운 행복이 거기, 꽃나무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마애불 앞에서 절을 올리는 신도들의 두 손에도 있었다. 또 스님들은 바쁜 듯이 법당으로 가고 있었으니 그 자근자근한 발소리에도 있었다.
쌍계사 문 밖으로 나오자, 길가마다 쭈그리고 앉아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오종종 모여 피워내는 얘기꽃에도 있었고, 그 곁에서 갓을 쓴 노인이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커피에도 있었고, 쌍계사로 가는 다리 위에서 장애인 부부가 엎드린 채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편이 문 밖인지 저편이 문 밖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금강문을 지나며 더러움을 씻어내고 온 여기가, 문 안인지도.



고운 모래가 많아 옛날에는 모래가람, 다사강, 두치강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강. 고려 우왕 11년 무렵, 왜구가 강 하구로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를 쫓아냈다는 전설이 있어 그 이후로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붙여 섬진강이라 불려지는 강. 너무 맑아서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그 강의 줄기를 따라 가다보면 또 다시 작은 강마을들을 만난다. 그 중에서도 지형이 꽃 속처럼 생겼다는 화심리(花心里)는 그 강변까지도 어여쁘다. 눈 뜨자마자 찾아간 화심리의 아침은 꽃 줍는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늑장을 부린 겹동백이 담장 아래로 흐득흐득 지고 있는 집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 꽃을 쓸다가 영 아쉬운지 자꾸 꽃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떨어진 꽃을 줍는 소리. 그 집 댓돌엔 열한 켤레의 신발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말씨가 여낙낙한 며느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좀 전에 줍던 그 꽃 속 같았다. 아주머니의 자랑할 만한 행복은, 작은 집이지만 열한 명의 식구들이 살 부비며 살아가는 일인 듯했다. 다솔하게 살아가는 그 집 얘기를 들으며 나는 눈이 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까지 펼쳐진 배꽃을 본다. 강을 따라 온통 배밭이어서 눈이 부신 곳. 꽃 속에서 아침을 맞으니 몽롱해지는 꿈결 같은 마을이다.
배밭에서 만난 아저씨는 배나무 가지를 치다가 말했다, 올해도 풍작일 거라고. 그래서 이 물 많고 달디 단 배들처럼 자식들 잘 키워내면 행복도 풍작일 거라고. 이제 막 강으로 들어가 이곳 말로는 ‘갱조개’라 불리는 재첩을 잡기 시작한 이들, 강물에 몸을 반쯤까지 담그고 은어를 잡기 시작한 이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명지바람 부는 섬진강 모래톱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모두 그 마음이었을 것이다.


강물은 한가롭게 흐르고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삽상하게 불어왔습니다. 강어귀 산에서 쑥국새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오데요. 나는 그만 이제 한창 불붙은 꽃밭에 내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 슬픔은 때로 저 자운영 꽃밭처럼 아름다운 것이기도 할 모양입니다 그려.(공선옥 소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 중에서)

거기, 자주빛 구름 꽃밭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만났다. 그 애에게 왜 우냐고 물어볼 수 없었던 건 ‘울음’ 앞에 ‘왜’라는 말을 붙이는 게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쯤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공선옥의 수필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다녔다. 5월이면 어느 길에서건 자운영이 피었는지 살피는 것도 그에 따른 버릇이었고,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몸을 던졌던 그곳에 서서 건조한 나조차 울음이 자글자글해지고 있었다. 그 앞에는 꽃밭을 가로지르며 해찰하는 아이들 무더기가 꽃무더기처럼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하교 길인지 책가방을 엉덩이 아래까지 늘여 맨 채 뛰기도 하고 엎드려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꽃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그녀가 왜 울어버렸는지 조금쯤 알 것도 같았다.

온몸으로 술렁이는 맥주보리와 자운영 꽃이 펼쳐진 평사리 들판에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으면 바람에 취해 벌게져버릴 것만 같았다. 고소성으로 간다.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성곽. 거의 허물어져 가던 것을 다시 복원해 놓은 모습인데 능선을 따라 쌓아놓은 산성의 둘레는 800미터에 달한다. 거기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평사리 푸른 들녘과 섬진강 새하얀 모래밭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보인다. 지리산 너머에서부터 불어온 갑작바람은 고소성을 손으로 훔치듯 쓸어내리며 평사리를 지나 어느새 섬진강까지 내려간다. 해거름 속에서 온몸의 힘을 빼고 성곽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본다. 이제 막 마을 입구의 첫 번째 집에 불이 켜졌다. 서로를 부르는 신호이기라도 한 듯 최참판댁 마을에 불빛들이 하나 둘 별처럼 켜지는 저녁, 지구가 다 온화해 보인다. 산줄기에서부터 시작된 물줄기를 아래로 내려 보낼수록 점점 넓어지는 강의 마음을 본다. 이내 망망대해가 될 그 벌건 마음의 손금 같은 강줄기를 본다. 어둠은 어느새 강까지 다 내려앉았다.






섬진강 줄기를 오른편에 두고 달리는 이쪽은 경상도, 저쪽은 전라도.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도 말 품새도 다른 이곳에 화개장이 선다. 하동 사람들과 어깨라도 좀 더 부딪고 갈 요량으로 아침부터 찾은 장터엔 예나 지금이나 화개사람들보다 외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겨우 구색만 갖춘 장터지만 예전에 이곳은 흥시(興市) 중의 흥시였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구절을 보면 그렇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례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송림 지나 바다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막힐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눈감고 흘러 내려가기만 하면 하동의 끝, 바닷가 마을에 닿았다. 하동 땅에 이별을 고하려 바다에 등 돌려 설 때 파래 너는 노인을 만났다. 노인의 머리 뒤엔 새파란 바람이 멈춰선 듯 줄에 널린 파래가 나부끼고 있었다. 노인은 시계를 보면서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위치도 시간도 가늠되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화답했다. ‘지금, 행복하다’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가다보면 꼭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았다. 아는 얼굴이 아니어도 아는 얼굴처럼 인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랬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게 꼭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고운 모래의 강을 끼고 사는 이들이 산과 들과 꽃과 차를 버무려 만들어낸 묘약의 향내가 나를 이끌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동에서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생각한다. 그 향내에 취해 모두들 행복하게 웃고 있던 건 아닐까, 라고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 1985년 발간된 시인 김용택의 첫시집 『섬진강』 연작의 첫 번째 시 「섬진강 1」의 일부이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임실, 곡성, 남원을 거쳐 구례와 하동을 경계로 하여 ‘하동포구 80리’를 이루며 남쪽 바다를 향해 흘러내려가는 섬진강은 이곳을 젖줄로 하여 사는 실핏줄처럼 많은 사람들의 삶과 애환과 사연을 간직한 강이다. 고려시대에 나루터[津]에 나타난 두꺼비[蟾]가 왜구를 쫓아내 그런 이름을 같게 되었다는 섬진강, 지리산 자락 굽이굽이 5백리를 흘러내려가는 동안 너른 들판보다는 대부분 작은 마을을 적셔주며 흘러가기에 더 애틋하고 정겨운 강이다.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를 지나 범왕리에 이르는 화개골 양편으로는 산비탈이든 조금 평평한 곳이든 야생 차나무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화개면 용강리부터 신흥마을까지 화개천을 끼고 이어지는 길은 ‘십리 벚꽃길’이 아니라 ‘십리 찻길’[茶路]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쌍계사 동구의 석문마을에는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부터 심었다는 차의 시배지가 남아 있어 우리나라 야생 차의 본거지라 할 만하다.
차는 제조법, 잎의 크기와 모양, 채취 시기에 따라 이름도 품질도 아주 다양하다. 제조법에 따라 녹차(불발효), 우롱차(반발효), 홍차(완전 발효)로 나뉘고 찻잎의 크기에 따라 작설차(雀舌茶: 참새의 혓바닥처럼 가늘고 여린 찻잎으로 만든 차), 응조차(鷹爪茶: 매의 발톱처럼 억세고 야무진 모양의 잎으로 만든 차)로 구분한다. 작설차는 또 잎의 채취 시기와 크기에 따라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으로, 채취 시기별로는 청명차(4월 5일경), 우전차(곡우 전), 곡우차(4월 20일경), 입하차(5월 5~6일경), 소만차(5월 21일경), 망종차(6월 6일경) 등으로 구분해 부른다. 작설차, 그 중에서도 세작의 맛과 향이 제일 좋아 가격도 가장 비싸다. 하동군에서는 매년 하동야생차문화축제를 열고 있는데 올해는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제10회 행사를 갖는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실줄처럼 흘러내리며 아름답고 정겹고 소박한 풍경과 이야기를 무수히 만들어낸 강답게 섬진강을 다룬 책들은 다른 강들에 비해 무척 많은 편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용택 시인의 시집 『섬진강』(창비)은 섬진강 주변의 풍광과 자신의 가족, 주변 이웃들, 해체되어 가는 농촌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시집으로 이 시인을 ‘섬진강 시인’으로 부르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책이다. 진안, 임실, 곡성, 구례, 하동을 거쳐 흘러내려가는 섬진강 주변의 여러 유적지와 문화재, 설화와 전설, 찾아가는 방법에 관한 안내로는 『답사여행의 길잡이 6 -지리산 자락』(돌베개)이 좋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우리 땅 구석구석을 발로 찾아 완간한 이 책 시리즈만큼 자연·지리·인문적 교양을 동시에 제공하는 여행 안내서는 드물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생각의 나무)에 나오는 섬진강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산문 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 작가”라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7차 중학교 1-2 교과서에 ‘섬진강 기행’이라는 단원으로 이 글 가운데 한 편이 실려 있다. 『섬진강 따라 걷기』(가람기획)는 재야사학자 신정일이 2001년 2월과 3월에 걸쳐 섬진강 발원지부터 하구까지 530리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사람살이를 실제 걷고 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