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권혁철기자의 글입니다>
광주를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씨가 81년 6월25일 대통령 자격으로 동남아 순방을 떠났다. 전두환씨는 귀국해서 느닷없이 ‘살아있는 외국어 교육’을 강조하고 나섰다. 동남아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전두환씨는 “우리보다 못사는 동남아에 가보니 그 사람들은 중학교만 나와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더라”라고 부러워했다.
전두환씨는 동남아 순방 직후인 81년 7월14일 한국외국어대를 방문해 국제화 시대에 따른 ‘산 외국어교육’을 강조했다. 당시 전두환씨는 “그동안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잘못됐다. 실용영어를 가르쳐라’고 엄숙하게 ‘교시’했다.
전두환씨의 ‘교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원이 없고 사람이 재산인 나라다. 80년대 한국은 과감한 개방과 국제화 추구가 불가피하다. 개방과 국제화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게 능숙한 외국어 구사다. ” 구구절절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통령의 교시를 관철하기 위해 문교부(지금 교육부)가 나섰다. 문교부는 영어교육을 독해위주 교육에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생활영어 위주로 개선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교사·성인 재교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전두환씨를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하던 신문들도 연일 ‘죽은 영어교육 이래선 안된다’는 특집기사를 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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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81년 7월15일치 3면 ‘전환기에 선 외국어교육’ 시리즈 기사에서 앞으로 해외취업자가 늘어 영어는 생존 수단이 됐다고 말하고, 외국어교육을 위해서는 듣고 말하는 교사 확보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전두환씨가 영어회화를 강조하자 전국의 교실에서 영어회화의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제는 영어회화 못하면 정말 죽는다고들 야단들이었다.
27년전 이야기를 장황하게 리바이벌한 것은, 요즘 영어 교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과 너무 똑같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인이 `동남아도 우리보다 영어 잘한다. 더이상 죽은 영어교육은 안된다'고 하자, 언론은 연일 `학교에서 10년 영어 배워도 외국인 앞에서 입도 벙긋 못하는 한심한 영어회화능력'을 거론하며 맞장구를 쳤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영어교육 혁신 대책을 내놓는다. 어쩌면 27년전과 그리 똑같은 지 신기할 정도다. 인수위와 교육부가 내놓은 영어교육 대책 내용도 27년전과 대동소이하다.
전두환씨와 이명박 당선인이 펴는 주장이 27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먼저 두 사람은 ‘영어 잘하는 동남아’를 비교대상으로 거론하며 사람들의 자존심을 슬쩍 긁어놓는 자극 요법을 동원한다. 27년전 동남아 순방을 다녀온 전두환씨는 “동남아 사람들은 중학교만 나와도 영어회화를 술술하더라”고 했다. 요즘 이명박 당선인 쪽도 “동남아에서는 고교만 나와도 영어를 잘 하는데 우리는 10년 넘게 영어를 배워도 말문이 터지지 않는 이유가 기형적 교육 시스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짚고 가자. 필리핀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 나라는 영국 식민지 경험이 있거나 언어가 워낙 많고 다양해 영어를 공용어로 도입했다. 동남아의 역사와 문화, 언어환경을 감안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긴데….)
그런데 한국 대통령들은 왜 걸핏하면 동남아 사람들을 끌어들여 엉뚱한 비교를 일삼는지 모르겠다 한국보다 못산다고 동남아를 깔보는 발상은 아닌지. 얼마전 이명박 당선인이 ‘동남아 사람들도 쌀국수 먹는데 우리는 밀가루 국수먹느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도 동남아를 ‘교보재’로 계속 활용할 것 같다.
그런데 80년대 천하를 호령하며 위세등등했던 전두환씨의 실용영어 강화 지시가 왜 실패했을까. 교육대통령을 자처하는 이명박 당선인이 올인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강화가 성공하려면 27년전 ‘전두환 실패 케이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
전두환씨의 실패 원인은 간단하다. 전두환씨는 한국 영어교육의 목표가 언어 습득이 아니라 대학입학시험이나 입사 시험용 점수따기란 현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씨가 아무리 생활영어를 강조해도 80년대 내내 대입 시험이던 학력고사 영어시험의 출제경향은 문법과 단어, 독해위주였다. 대학 입학이 지상과제인 중고등학생들에게 정부의 ‘생활영어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중고등학생 영어 공부는 문법과 단어 독해가 중심이다.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따려면 이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영어교육은 언어습득이 아니라 입시용이나 입사용이다. 한국 상황에선 어떤 제도나 대안을 내놓더라도 순식간에 입시용, 입사용 점수따기 경쟁으로 바뀌어버린다.
토익이 대표적인 예다. 90년대 초중반 이후 기업들은 문법, 독해 위주 필기 영어 시험을 폐지하고 실용영어능력을 중시한다며 토익 성적을 입사 시험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높은 토익 성적은 취업준비생의 필수품이 됐고, 토익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덕분에 요즘 젊은이들의 토익 성적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다.
하지만 토익 고득점와 영어 구사능력이 별개라는 것은 상식이다. 토익 시험이 사회 초년병의 영어 활용 능력 향상과는 별개로 토익 사교육시장을 파생시킨 것처럼, 인수위의 영어공교육 강화가 기존 ‘문법과 독해’란 영어사교육시장에 ‘듣고 말하기’ 신규 사교육 시장만 부풀려 놓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비판에 대해 인수위는 영어능력시험은 점수제가 아니라 등급제로 하면 점수따기 경쟁을 막고, 학생들의 실용적 영어구사능력 향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 주장이 현실에서 과연 가능할 것인가. 지금까지 대학들은 입시때마다 변별력 확보를 주장해왔다. 누가 공부 잘하고 못하는지 가리겠다는 것이다. 입시에서 변별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과목이 영어와 수학이다. 이명박 정부가 대학입시를 대학자율에 맡기겠다고 했으니 서울의 이름있는 대학들은 고난도의 문법과 단어실력이 필요한 독해문제나 에세이 작성같은 영어시험을 지원자들에게 낼 것이다. 이는 사실상 영어 본고사의 도입이다.
이명박 정부의 영어 공교육 강화가 성공하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대학 입시에 종속된 영어교육을 해방시켜주면 된다. 구체적으로 영어능력시험을 점수가 아니라 등급제로 해서 일정한 수준만 도달하면 통과시켜주는 식으로 운영하고, 대학별 영어 본고사 도입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으면 된다.
물론 인수위는 대학 본고사를 금지하고 막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게 될 소리인가. 3불정책을 내걸고 본고사를 기를 쓰고 막았던 참여정부 때도 서울의 이름난 대학들은, 논술이란 간판을 걸고 사실상 주요 과목 본고사를 편법으로 보곤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의 대원칙이 입시를 대학 자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런 이명박 정부가 영어능력이 뛰어난(=단어 많이 외우고 독해실력 뛰어난) 학생을 따로 시험봐서 뽑겠다는 대학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명박 당선인이 내놓은 교육 정책에는 입시에 종속된 영어교육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고민이 없고, 대학입시 자율만을 절대선처럼 강조한다. 이런 상황이면 대학의 영어 본고사 부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부가 아무리 생활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영어시험의 우열은 여전히 문법과 독해가 좌우할 것이다. 학생들은 말하기 듣기 중심의 영어능력시험대비 공부와 문법과 독해 중심의 본고사 준비를 한꺼번에 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것이다.
나는 인수위 영어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개선 방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인수위는 과욕과 단기 성과에 급급하고, ‘입시’에 종속된 영어교육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무시하고 있다. 영어교육을 바꾸려면, 영어 교사를 재교육시키고, 실력있는 영어 교사를 육성영입하고,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고, 영어가 입시도구화하는 현실을 제어하는 등 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엄청난 예산을 투자해야 하고, 학교 현장의 수업 방식이 바뀌고 입시제도의 변화 등 긴 시간이 필요하다.
80년대 온 나라 산천이 벌벌 떨 정도로 철권을 휘두르던 무소불위 독재자 전두환씨도 영어교육 바꾸기에는 실패했다. 영어교육은 2~3년만에 획기적인 성과를 낼 뽀족한 대책이 없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5년 임기 안에 `고교만 졸업해도 생활영어 거침없이 할수 있게 하겠다'는 립서비스를 남발한다. 의욕을 넘어 과욕이다. `영어 몰입교육'같은 설익은 탁상공론을 내놓기 전에 이명박 당선인은 전두환씨의 `영어교육 혁신' 호언장담이 왜 실패했는지 부터 진지하게 따져봤으면 좋겠다. 이명박 당선자는 남의 산의 돌에서(타산지석)의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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