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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사물놀이 방

"활활 불타오르는 느낌, 그 절정의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을 살지요"

"활활 불타오르는 느낌, 그 절정의 순간을 위해
나머지 시간을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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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가 양팔을 엇갈려 신나게 장구를 두드리자, 땀이 피부를 뚫고 솟구쳐 올랐다

김덕수(56)는 손으로 말했다.

악수를 위해 잡은 그 손은 그 체구처럼 작았으나, 그 손바닥 질감(質感)은 고무공처럼 두껍고 단단했다. 이번에는 그가 약간 휘어진 손가락 마디마디를 펴 보였다.

"이게 훈장(勳章)이고 직업병이지요. 사물놀이는 운동으로 치면 격렬한 운동입니다. 장구채를 잡을 때면 배구선수나 농구선수처럼 손가락에 테이핑을 합니다. 한 해에 100회 이상 공연을 다니니까요."

―공연 수입은 일단 엄청나겠군요?

"김덕수는 돈을 많이 벌어 집에는 금(金)으로 도배하고 산다고 합니다. 그런 말 들으면 좋지요. 사물놀이로 이름 얻고 돈도 많이 버니…."

나는 농(弄)으로 거들었다.

―그러면 빌딩을 세웠겠군요.

"그런데 수입이 있으면 우리는 민주적 분배가 원칙이에요. 슈퍼스타라도 똑같이 투명하게 나눠 가집니다. 그게 남사당패 예인(藝人)들의 전통입니다. 제 잘났다고 혼자 다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역할과 능력에 따라 두 몫, 세 몫까지 갖는 것은 봤지만. 저는 다섯 살 때부터 그쪽 어른들을 따라다녔는데, 어려도 내 몫을 주었으니까요."

서울 홍인동 충무아트홀의 지하 1층 연습실. 흰 벽에는 '사물놀이 창단 30주년' 공연 포스터가 붙어있다. 포스터 속 그는 턱시도와 나비넥타이로 멋을 냈다. 하지만 마주앉은 그는 개량한복 차림이다. 그전에 만난 적이 없는데도 이미 그를 다 아는 것 같은 기분이 슬며시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면 재미있을까요?

"저야 '쟁이'로서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면 가장 즐겁지요. 가령 대통령 당선자는 '노가다' 판에서 일해온 거 아니겠어요. 그분이 길 닦으면, 개통식 때 꽹과리 치고 장구 치고 했습니다. 시절마다 그 판은 달라도, 제가 필요한 데 있어왔다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 저를 불러준 것에 대해 감사하죠. 제게 주어진 역할을 잘했는지는 모르나…."

그러다가 '먹고사는' 물질 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실제로 많이 벌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수입의 절반을 '싹수' 있는 젊은이에게 써왔어요. 저도 대물림을 받았으니 대물려줘야 합니다. 서양 음악은 비싼 레슨비를 받지만, 우리 전통 연희(演?) 쪽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우리 것을 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지요. 먹이고 재우고 한 푼 용돈도 주고, 잘하면 월급도 줍니다. 민간 예술단체로는 처음 월급제를 실시했어요. 단원이 30명쯤 됩니다."

―그렇게 벌어서 단원들을 먹여 살리는 겁니까?

"제가 번 돈으로, 아니, 같이 번 돈이지요.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을 만들고서, 이를 운영하려면 한 달에 6000만~7000만원쯤 들어가요. 수입은 공연료와 음반 로열티인데, 힘들어도 공연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주말에는 어디선가 꼭 공연합니다. 그리고 민주적 분배 원칙에 따라 저도 월급을 받습니다. 현재 이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은 제 마누라죠(웃음)."

―김 선생은 슈퍼스타니 다섯 몫은 가져가셔야지요.

"그러면 좋지요. 하지만 그걸로 다섯을 키우는 게 더 좋지요."

―그런데 빌딩은 아직 못 세웠습니까?

"충남 부여의 한 폐교(廢校)에 사물놀이 교육원을 만들었어요. 300여 명이 묵는 기숙사 시설도 있지요. 처음에 임대했다가 그 폐교를 사들였습니다. 이게 빌딩이지요. 이 건물이나 제가 쓰는 장구 꽹과리 북 등 악기도 모두 사단법인 재산으로 등록됐습니다."

―사물놀이는 신명인데, 신명이 나서 두들깁니까, 두들기다 보면 신명이 납니까?

"후자는 아마추어의 세계고, 프로라면 완벽하게 그 세계에 몰입하고, 그 신명의 세계로 들어갈 능력을 갖춘 사람이지요."

그를 슬쩍 찔렀다.

―사물놀이를 계속 연주하면 귀는 괜찮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한번은 즐길 수 있지만, 계속 감상하기에는 음(音)이 단조롭고 요란하고 시끄럽다는 반응도 있더군요.

그는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어떤 사물놀이패, 어떤 음악회에서 들었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시위 현장이나 길거리 농악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요.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음이 되고 최고 음악이 되는 것이죠. 우리 사물놀이 공연장에서는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들어요. 자장가처럼 들리는 거죠. 조용한 악기든 시끄러운 악기든, 연주 능력만 뛰어나면 아름다운 음악이 됩니다. 곡이 단조롭다고 하는데, 정말 모르시는 말씀이고, 수천 곡이 있습니다."

―장구를 잘 친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말합니까?

"모든 악기가 똑같습니다. 진동을 만들어내는 게 음악입니다. '뚱땅뚱땅' 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멜로디든 소리든 타악기든, 결국은 그 진동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공력(功力)을 가졌느냐에 달렸지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장구를 쳐왔지요?

"장구의 '울음'…, 장구는 울잖아요. 치면 울리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창조해내는 것이지요. 그런 울음을 연주하고, 그 울음에 내가 몰입할 수 있는 경지, 그것에 빠져드는 순간 천상천하 유아독존, 엑스터시(ecstasy)의 경지에 빠져듭니다. 그 결정적인 맛을 처음 본 게 삼십대 후반이었어요. 그 뒤로 공연마다, 그 장소가 어디든, 그 경지에 빠지려는 도전을 하는 겁니다. 평론가들은 '활활 타오르는 둥그런 불덩어리 속에 앉아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지요. 바로 그 순간에 살기 위해, 저는 나머지 시간을 사는지 모릅니다."

이날 그는 장구 앞에 앉았다. 사진 촬영을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 관객은 나 혼자였다. 그의 말끔한 얼굴이 서서히 충혈됐고, 어느 빠른 가락에서는 1초에 9박(拍)을 때렸다가, 양팔을 엇갈려 두들겼으며, 또 입으로는 흥얼댔고, 땀은 피부를 뚫고 막 솟구쳐 올랐다. 그가 일어서자 마룻바닥은 축축했다. 20분 만에 이뤄진 변화였다.

"실제 공연에서는 이렇게 한 시간을 내리 치고, 좀 쉬었다가 다시 1시간을 칩니다. 실력은 금방 드러나죠. 무대에서는 자신이 발가벗고 있는 기분이 들지요."

―그만큼 두들겼으면 장구 가죽이 어디 남아나겠나요?

"지금까지 수백 개를 갈아치웠지요. 장구 가죽은 쇠가죽 개가죽 말가죽을 주로 씁니다. 우리 곁에 제일 많았던 가축 가죽을 썼던 것 같아요. 가죽은 습도에 민감해요. 너무 습하면 뭉개지고 건조하면 찢어집니다. 연주 중에 찢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가죽을 꿰는 부위가 잘 터지지요. 보통 200회쯤 공연하면 갈아줍니다. 가죽도 사람처럼 노화되기 때문이지요. 늙으면 싱싱한 울음이 안 나옵니다."

―평생 그렇게 치면 신물이 날 법도 한데.

"어려서는 모르고 친 것이었고, 20대는 무쇠도 삶아 먹을 만한 기운으로 쳤지요. 스물여섯 살 때 '사물놀이'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얼마 안 가 악(樂)의 벽에 부딪혔지요. 그 절망적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잘 안 돼요. 그때는 공연을 도중에 중단하거나, 무대에서 내려와 '다시는 안 하겠다'며 장구채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고요.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이 세계에 대해 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를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냥 내 업(業)이고 놀이로 여기라는 거죠."

 

  • 고무공처럼 두텁고 단단한 김덕수의 손.휘어진 손가락 마디는 사물놀이가 그에게 준 훈장이다
  • 1978년 우리 사회에서 꽹과리 징 장구 북이 거의 사라졌을 시절, 그는 '김덕수와 사물놀이'를 결성했다. 그때부터 사물놀이가 유행됐다. 전국에 전문 및 아마추어 사물놀이 공연 단체들이 2000개를 넘어섰고, 초등학교마다 특활반이 생겨났을 정도다.

    그러나 정작 이 패거리는 10년쯤 뒤 해체됐다. 이번에 '사물놀이 30주년 공연'은 그의 원년 멤버 이광수 최종실 남기문(김용배 사망)과 함께 이뤄지는 것이다.

 

―사물놀이를 결성했을 때, 다들 개성이 강해서 갈등이 많았죠?

 

"함께하면 갈등은 기본이죠. 서로 원하는 게 다르고, 또 현실적인 생활 문제가 걸린 사회인이 됐으니까요. 그래도 10년 이상 할 수 있었던 것은 출신 배경이 비슷하고, 꿈이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이름이 '김덕수와 사물놀이'였으니, 다른 멤버 입장에서는 들러리를 선다는 느낌도 있었겠지요?

"원래부터 주인공은 저였지만, 초기에는 '김덕수'를 안 붙였어요. 그 뒤 국립국악원이 사물놀이 공연단을 만들고, 잇따라 사물놀이 단체가 우후죽순 생기니까, 언론에서 우리를 구분하려고 그렇게 붙였지요. 사물놀이는 원래 우리 팀의 '고유명사'였는데, 어느 날 '보통명사'가 된 것이었지요. 팀원들은 '김덕수와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게 다 갈등 사유가 됐지요."

―리더의 역할은 무엇이었지요?

"먹는 것에서 들어가 살 곳까지 모든 재정적 책임을 우선 지는 것이지요. 예인(藝人)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물놀이가 좋아도 늘 붙어서 장구 꽹과리만 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김용배가 국립국악원으로 옮기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우린 아무 말도 못했어요. 또 다른 멤버가 '공부를 더 하겠다'며 떠났고…, 물론 그 속에는 각자의 숨은 이유와 욕망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본인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그는 낄낄거렸다.

"직선적이고 다혈질이며, 남이 잘못하는 게 있으면 한방 쳐놓고되 맞는 성격이지요."

―스스로 '글로벌 광대'라고 하는데, 광대와 소위 '딴따라'의 차이는 무언가요?

"어떤 종류의 것을 하든,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어떤 가치관으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렸지요. 그냥 재주꾼으로 먹고사는 것에 급급하다면, 정신과 철학이 없다면, 딴따라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일본 공연에서 알게 된 재일교포의 딸과 결혼했다. 아들은 둘이 있다. 장남 김용훈(27)은 연예계에서는 '수파사이즈'라는 예명으로 꽤 알려진 래퍼(rapper)라고 한다.

―솔직히 아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랐나요?

"자식들이 내 길과 다른 길을 걸었으면 했지요. 그런데 큰놈이 랩을 할 줄은 몰랐지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만드니까. 본인이 좋아서 한다면 막지는 못하죠. 다만,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할 뿐입니다."

―김 선생이 보기에 어떤 직업이 좋은 것 같나요?

"자신이 원하고, 자기 개성을 살리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다면 저는 예술가보다 나은 게 없다고 봐요."

―우리 같은 직장인은요?

"월급쟁이니까요(웃음). 같은 예술을 해도, 월급을 받고 행위 하는 예술과, 자기 능력껏 자기 하고 싶은 행위를 하면서 먹고사는 예술에는 차이가 있어요."

―왜죠? 재정적인 독립 때문에?

"아니, 정신적인 독립이죠."

―살아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이었지요?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무지함, 그런 무지로 인해 우리의 모든 장인(匠人)들이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 거의 다 죽었어요. 세상에서 몰라주는 것, 가치 자체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뻔히 보고도, 저는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지요. 얼마 전 불탄 숭례문에서 '비나리'를 했지만, 사물놀이를 숭례문과 비교해본 적 있나요. 어느 것이 더 역사성이 있느냐, 우리가 꽹과리 징 장구 북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9남매의 6번째로 출생한 그는 다섯 살 때(1957년) 아버지 남문학(벅구놀이의 명인)에 의해 남사당에 입문했다. 7세 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이미 장구의 신동(神童)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위로 누나 4명과 형이 있었는데, 제가 유달리 어릴 때부터 장단을 맞출 줄 알았다고 해요. 그러던 중 추석 명절에 아버지가 다섯살 난 저를 조치원의 난장에 데려갔어요. 바로 그 날 저녁부터 공연했어요. 어른 어깨를 타고 맨 꼭대기에서 노는 '새미' 역할이었습니다. 어른 네댓 명이 층을 쌓기 때문에 새미는 10m 높이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흥이 나서 했죠. 요즘 말로 즉시 '프로'로 데뷔한 겁니다."

남사당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유 계약 조건으로 마지막 유랑극단이라는 '낙랑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다. 가수 혜은이의 아버지가 단장이었고, 악단 최고 가수는 '페르시아 왕자'를 부른 허민씨였다. 여기서 그는 '베이비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으로 혜은이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드럼을 배워 쳤다고 한다. "미군부대에서 주로 공연했는데 어린애가 드럼을 치면서 상모를 돌리니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부자가 속했던 남사당패는 1964년 마산 부산 대구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더 이상 흥행이 안 됐기 때문이다. 유랑 생활은 막을 내렸다. 남사당패의 일부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때 국악예술학교 교장선생이 아버지를 만나 입학을 설득했다. 중고 재학 시절 내내 그는 학교의 악기 창고에서 자취했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형님 친구 집에서 지내며 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장소팔 선생이 '전주 공설운동장에 추석 공연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결석을 일주일 했어요. 사흘 공연하면 그 돈으로 몇 개월 식당에서 밥을 대놓고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무단결석으로 학교에서 난리가 났고, 아예 결석할 일 없게 악기 창고로 옮겨온 겁니다. 여기에 3년 선배 박범훈 중앙대 총장(대통령취임식 준비위원장)과 1년 후배 최종실(중앙대 국악과 교수)이 나중에 합류했지요. 당시 학교 다니면서도 거의 절반을 국내외로 공연을 다녔지요."

―또래와는 다른 성장 과정을 걸었기에, 어떤 아쉬움은 없나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 가는 또래들이 부러울 때가 많았지요. 고등학교 때는 인문계로 옮길까라는 생각도 해봤고, 대학에서는 도자기를 배우는 이공계로 갔지만 2년 만에 중퇴를 했어요. 도망가고픈 마음으로 무대 연출을 배우겠다며 외국 대학에 입학허가까지 받았지만, 결국 이 자리에 있어요. 되돌아보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어요."

―현역으로 언제까지 장구채를 잡을 겁니까?

"젊었을 때는 말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2회 공연을 해도 문제없었어요. 최고의 수준을 지키면서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체력이 중요하지요. 하루 세 끼를 안 굶으려고 하고."

―밥은 많이 먹는 편인가요?

"한 그릇으로는 양이 안 차죠. 두 그릇쯤 먹지요."


김덕수씨는… 

사물놀이에서 평생 장구를 쳐왔지만, 그는 '태평무' 이수자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1 때부터 무속음악을 해왔기 때문이고, 사물놀이는 30년밖에 안 돼 중요무형문화재 대상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어와 일어로 강연을 할 정도의 어학 능력을 갖추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해외 공연이 일상이 됐기 때문에, 스페인어와 독어, 프랑스어로도 생활 회화가 통한다.

젊은 날 그가 못 이룬 꿈 중에는 서울대 진학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3 때(1970년) 일본 오사카 만국박람회(엑스포 70) 전후로 10개월간 일본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돌아온 뒤,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 시험을 보려 했다고 한다. 국악 실력이나 수상경력으로는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시험과목에 피아노 실기가 있었다. 국악을 하는 데 왜 그게 필요한지, 해외 공연이 많았던 나는 한국 입시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돈 받고 레슨 하는 것은 예술이 물질에 의해 오염된 까닭"이라며 "전문 예인의 정신과 철학을 이 시대에 이어가는 것이 내 삶의 좌표"라고 말했다.

그는 최고의 감격스러운 순간에 대해, 1983년미국 댈러스 세계 타악기 페스티벌에 초청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세계 음악계에 꽹과리 징 장구 북을 달랑 들고 첫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약 10분간 커튼콜을 받았다. 그때 나는 울었다. 다른 외국팀들은 악기를 싣는 데만 차를 따로 대절했지만, 우리는 각자 북과 징 등을 들고서 택시 하나로 음악회까지 함께 타고 다니던 처지였을 때다." 


                                                                                                                                      최보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