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기 위해 용서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먼저 자유를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유란 정해진 제도 안에서 그 제도를 지키고 보호 받으며
제도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유를 저버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스스로가 만든 올가미에
걸리게 되고 그로 인해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 하신 것은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을 할 수 없고 용서하지 않는 순간부터
순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상대네 대한 미움과 증오심을
가슴에 담고 살게 됨으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것은 선을 추구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이 행한 “티”를 찾아내고 그 “티”를 “옥”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남의 티는 잘 찾지만 자신의 티는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스스로 아름답게 비화시키려는 마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티를 숨기려하거나 덮어두려 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등잔 밑이 어둡다. 라는 속담은 바로 빛만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빛이 비춰진 곳만 바라보지 말고 숨어있는 곳까지 살펴보라는
깨달음의 충고가 아닐까 합니다.
용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서로 충돌이 되지 않으면 소리가 날 수 없습니다.
서로 충돌됨은 어떠한 경우이가 되었던 상대가 충돌하도록
순간적인 별미를 제공한 것이고 그로 인해 소리가 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잘못을 찾아내고 화해를 하기보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고, 누가 더 많이 잘못했는가를 따져
자신의 잘못은 그 그늘에 묻어버리려 하기 때문에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신앙고백을 하면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고백을 미사 안에서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의 고백을 하면서도 여전히 교회 안에는
서로 반목하는 자가 생겨나고 시기와 질투하는 자가 있으며
더한 위해를 가하려는 자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옳고 잘한 것을 칭찬하기를 꺼려하고 나쁜 행위를 보고도
선도하지 않고 못 본체 하면서 선함으로 이끌어주지 못 한다면
이는 선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사탄의 행위를 돕는
어리석은 신앙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의 자유를
해방시켜주는 사랑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할 땐, 상대와는 관계없이 자신 안에
미움과 증오심 그리고 복수심을 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기쁨을 잃고 행복을 잃으며 끝없이 죄의 굴레 안에 빠져
상대를 해하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내려놓으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증오심을 내려놓으면 차갑기만 한 자신의 가슴에
따뜻한 훈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랑의 불을 지피게 됩니다.
원한과 복수심을 내려놓으면 자신의 영혼의 빛을 찾게 되고
영원불멸의 생명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상대의 영혼도
구원으로 이끌게 하는 이중적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용서를 통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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