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의 노래 1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1, 2)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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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에서 현재 친저성이 인정되는 가사는 네 가지, 즉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사향가>이다. 이중 가장 많이 보급되고 애송되었던 가사는 <사향가>이며 필사되어 온 이본(異本)들도 다양하다. 이 중 <사향가>의 친저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또한 다양한 <사향가>의 이본들 중 어느 것이 원본의 모습에 가깝게 보존되어 왔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서정수 교수는 언어학적 분석에 따라 원문에 가까운 <사향가>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정본을 중심으로 사향가를 접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본다. 서정수 교수는 <사향가>를 6장으로 나누어 정리했는데, 우리도 그 가다듬기에 따라 가사를 살펴보려 한다. 1. 들머리: 본향은 천당 "본향은 어디" (1) 어화 벗님네야1) (2) 우리본향 찾아가세 해마다 명절이 되면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찾아 집을 나선다. 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동서남북 사해팔방"을 다 다녀도 인간은 끊임없이 고향을 찾고 그리워한다. 참된 고향을 발견하지 못해서 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참된 자리, 참된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해, <신명초행>의 "사람의 종향" 항목에서는 "사람이 향하는 곳은 사람을 내신 본의 자리"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래 자리는 세속의 쾌락과 영화가 아니라, 하느님 자리 즉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 안에 심어 주신 고유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 1, 26),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비록 인간이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 안에는 끊임없이 우러나오는 무언의 부르짖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않는다. 구약의 모세가 에집트를 탈출하여 40년간 광야를 헤매는 여정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상징한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에 들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선종한 모세(민수 20, 12 ; 신명 34, 4)는 구세사 안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시킨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계명 대신 지상의 탐스러운 열매들을 추구하는데(창세 3, 6), 이것은 본래의 고향을 찾지 않고 지상의 복지를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낙원에 들지 못하고 지상에서 방황하고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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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이 세상” (9) 부귀영화 얻었던들 (10) 몇해까지 즐기오며 무엇보다도 여기서는 ‘세상의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귀 영화와 빈곤 근심, 인간의 영화로움과 세상의 고난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그것 또한 헛된 일이었다”(전도서 2, 1)고 한다.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2, 23). 이러한 세상의 덧없음에 인간은 두 가지 삶의 자세를 가진다. 하나는 허무주의요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다. 전자는 세상에 태어난 고통과 비참함만을 보고 자신을 허물어뜨리며 물거품으로 만든다. 후자는 어차피 짧은 세상을 사는 동안이나 실컷 즐기고 영화를 누리려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삶의 태도는 한 쪽면만을 보기에 극단을 향하여 서로 만나게 된다. 그래서 허무와 쾌락은 이웃하며 서로의 담을 넘어들며 혼란스러움을 더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인생의 길이 요청된다.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은 없다. 내가 보기에 물론 이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시는 것이다”(전도서 2, 24).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섭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영화와 빈궁은 사라지나 하느님의 섭리와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하느님으로 비롯되지 않는 삶은 허무의 나락으로 사라지지만, 하느님을 토대로 지은 이승의 삶은 영원에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초행}의 “영원” 항목에 “세상에 있음은 덧덧함이 아니오. 이 잠간 생명을 지난 후에 영원 생명이 올 것이오”라고 말한다. 또한 “이 잠시를 주심은 영원을 위함이니……세상의 잠간 부귀와 일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사후묵상}의 “사후” 항목(1면)에는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 헛되고 잠간 사는 세월에도 덕을 닦아 임종을 예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장자는 지락(至樂)편에서 ‘지극한 즐거움’에 대해 논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와 장수와 명예를 좋아하고, 빈곤과 요절과 치욕을 싫어한다. 즐거움을 찾고 괴로움을 피하는 이 행위(行爲)는 어리석은 일이다. 참된 즐거움은 "지락무락(至樂無樂) 지예무예(至譽無譽)"에 있다고 한다.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고, 명예가 있으면 불명예가 있다. 즐거움을 찾지 않고 괴로움을 피하지 않는 무위(無爲)는 지극한 즐거움에 이른다. 무한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있으면서도 즐거움이 없는 것처럼, 괴로움이 있으면서도 괴로움이 없는 것처럼 사는 데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고린 6, 10). 세속의 복락이 지극한 즐거움을 주지도 않고, 세상의 고난이 지극한 즐거움을 영영 빼앗지도 못한다. 참된 즐거움은 기쁨과 고통의 행위 ‘너머’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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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2호 : 2000년 2월 15일 발행; 제3호 3월 15일 |
♣ 희망의 노래 2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3, 4)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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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은 천당" (19) 우주간에 빗겨서서 (20) 조화묘리 살펴보니 여기서 저자는 세상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보고 있다. 바로 코앞의 물체나 대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조하며 인간의 종말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 세상은 울고 넘는 박달재요 방랑하는 유배소다. 그러나 고통의 바다, 지식의 바다 가운데 바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미시적인 안목에 만족하게 된다. 감각적인 자극과 만족, 세상의 부귀영화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는 삶에 빠지게 된다. 우리들에게 불행과 울음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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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당 가는 길 "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 (35) 갈길이야 있건마는 (36) 찾아가기 어렵도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 14)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천당 가는 길은 인간 내면과 외면의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좁은 길목에 매복해 있는 원수와 도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만나서 겨뤄야 할 상대이다. 래서 "칠도는 안을 친다"고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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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4호 : 2000년 4월 15일 발행; 제5호 5월 15일 |
♣ 희망의 노래 3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5, 6)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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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원수와 일곱 가지 도적" (계속) (47)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48) 도적에게 항복하면 이 구절들은 지옥벌의 영원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영적 싸움에 패배한 자들이 겪을 결과를 잘 설명한다.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도적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교만·질투·탐욕·분노·욕심·방탕·게으름이 가득하여 진아(眞我)를 상실함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어 극기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영혼은 나태해지고 연약해져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세속의 전쟁에 패배하여 적군의 포로와 노예가 되듯이, 영혼은 영신 전장에서도 패배하여 흉악한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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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세속의 삶” (69) 어화 가련하다 (70) 세속사람 가련하다 여기에서는 세속 사람의 특성을 몇 가지 나열하고 있다. 그는 대부모를 저버리고 본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세 가지 원수를 섬기고 일곱 가지 도적을 사랑하는 사람, 덧없는 이 세상을 헛되게 탐익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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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6호 : 2000년 6월 15일 발행; 제7호 7월 15일 |
♣ 희망의 노래 4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7, 8)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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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종말" 인간이 맞이하는 네 가지 종말은 죽음·심판·천당·지옥이다. 전통적으로 사말(四末)이라고 하는 이것들을 윤형중 신부는 {천주교 상해 요리} 95-110 문답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향가>에서는 81항부터 90항까지 죽음과 심판을, 91항부터 106항까지 지옥의 모습을, 107항에서 112항까지 연옥과 천당을 묘사한다. 특히, 세속 사람의 '영고지옥'에 대해 강조하며 가련한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신앙의 선조들은 스스로를 '봉교인'이라 부르면서 세속 사람과 구별하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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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가는 싸움” 김덕민 본 <사향가>에는 115행의 '벗님'이 '교우'로, 116행의 '고향'이 '본향'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교우들은 본래의 고향을 찾아가는 신앙의 벗들이다. <천주공경가>의 첫머리에는 "어와 세상 벗님네야"라며 교우 아닌 세상의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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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8호 : 2000년 8월 15일 발행; 제9호 9월 15일 |
♣ 희망의 노래 5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9, 10)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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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갖춤" <사향가>의 저자는 영신 전쟁터에서 사용할 군비를 나열한다. 태공 병법과 손자 진법은 세속적이고 폭력적인 전쟁에 사용할 기술과 지략을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서에 나오는 영적 싸움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윗 성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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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갖춤” (계속) (147) 전비를 다갖추고 (148) 진법을 차린후에 빤또하(J. Pantoja, 龐迪我)는 {칠극}(七克)이라는 책에서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 길은 복오(伏傲), 평투(平妬), 해탐(解貪), 식분(熄忿), 색도(塞 ), 방음(防淫), 책태(策怠)이다. 다시 말해 교만을 누르고, 질투를 가라앉히고, 탐욕을 해소하고, 분노를 식히고, 식도락을 절제하고, 음란함을 막고, 게으름을 채찍질하는 길이 곧 죄의 근원을 극복하는 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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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10호 : 2000년 10월 15일 발행; 제11호 11월 15일 |
♣ 희망의 노래 6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11, 12)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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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갖춤" (계속) <사향가>의 저자는 영적인 싸움 도중에 나타나는 여덟 가지 진영(陣營)을 나열한다. 그것은 물화진(物貨陣), 흉포진(凶暴陣), 희소진(戱笑陣), 탐린진(貪 陣), 빈핍진(貧乏陣), 우환진(憂患陣), 쟁투진(爭鬪陣), 표한진(慓悍陣)이다. 이러한 진영에 맞서 싸우는 군사들은 진복 팔단의 장수들이다. 즉, 신빈자(神貧者), 양선자(良善者), 체읍자(涕泣者), 기의자(嗜義者)1), 애긍자(哀矜者), 심정자(心淨者), 화목자(和睦者), 감수자(甘受者)2)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에서 설교하실 때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다(마태 5, 3-10). 이로써 신앙인에게는 하늘나라에 이르는 대헌장이 제시된다. <사향가>의 저자는 이 말씀을 아주 깊이 묵상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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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과 걱정, 재난과 병은 마음을 혼탁하게 한다. 믿음이 흔들리고 헛된 것에 안식처를 찾으려 한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이는 그 모든 것의 원인과 의미를 깨닫고 평정을 얻는다. 하느님을 만나 뵐 마음의 순수함으로 우환은 극복된다. '우환진'은 '심정자'로 대적하여야 한다. 영신 싸움은 치열하여 밤과 낮의 구별이 없다. 특히 밤이 되면 하느님의 군사는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낭떠러지에 떨어질까 돌에 채여 넘어질까 조심스레 걸어야 한다. 악의 세력은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루가 4, 13 참조).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걸어본 사람은 달빛의 고마움을 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 고민할 때, 유혹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아찔해질 때, 판단이 정지되는 적막의 어둔 밤에 있을 때, 우리는 하늘의 비추임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우리의 존재가 무에 휩싸여 있을 때, 성령의 횃불과 등불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감각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 것을 포기하는 데서 오던 어두움은 어떤 종류의 신적인 밝음으로 바뀐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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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12호 : 2000년 12월 15일 발행; 제13호 2001년 1월 15일 |
♣ 희망의 노래 7 | ||
최양업 신부 사향가 (13, 14) | ||
류한영(베드로) 신부 / 배티 성지 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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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도리와 세속 "참도리와 세속" (197) 어화 가련하다 (198) 세속사람 가련하다 황사영(1775∼1801) 순교자는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그의 출중함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어전에서 친견의 은혜를 입었고, 정조 임금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미래의 벼슬과 부귀영화를 보장하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당시의 관습대로 국왕의 손이 닿았던 손을 비단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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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된 영혼” 참진리로 인도된 영혼은 세속의 부귀영화가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 2-3).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깨달은 사람은 부귀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빈궁고난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 그 중의 한 분인 이벽 선조는 {성교요지}에서 사람은 마땅히 정도를 구하여 배워야 함을 설명한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이치를 살피며 도(道)가 원근에 골고루 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호호광대하시며 그 덕화의 빛이 심원숭엄하시다." 사람은 "삼가고 삼가 국궁공경하면 어둡고 캄캄한 마음을 서서히 깨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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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보 <배티 성지> 제14호 : 2001년 2월 15일 발행; 제15호 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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