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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이해~/가톨릭의성인

축일:5월10일 성조 욥

축일:5월10일

성조 욥

St. Job

San Giobbe

Giobbe = perseguitato, sopporta le avversita, dall’ebraico

 

욥은 ’울부짖는 자’, ’핍박 받는 자’, ’회개한 자’.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이다.

욥은 하느님과 모두에게 인정받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욥은 뜻밖의 재난을 거듭 당하면서 불행한 신세가 됩니다.

이소식을 듣고 엘리바즈,빌닷,소바르 등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와서 욥을 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막상 욥을 위로하면서 또 한편 욥을 은근히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인 및 우리 모두가 지닌 공통된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본 욥은 자신을 비난하는 엘리바즈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욥은 자신이 한번도 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한 일이 없으며 완전히 결백하다고 주장합니다.  

욥은 하느님의 甕資?잘 지킨 의인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욥의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때 인간 고통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오늘의 말씀에서)

 

☆프란치스코성인께서 어느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에서
3)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은혜로 여겨야 하고,
    또 형제들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든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는 사람도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4) 다른 것을 바라지 말고 이 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5) 이것이 주 하느님과 나에게 할 수 있는 참다운 순종이 됨을 아십시오.
    나도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순종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The Patient Job-SEGHERS, Gerard

Oil on canvas, 192 x 242,5 cm.  National Gallery, Prague

 

 

욥기

라틴어 Liber Job   영어 Book of Job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곤경 중에 고심하고 있는 인간의 시도인 것이다.

 

일반적 주제

욥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는, 정의로운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소개된다.

욥의 세 친구들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 주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행에 처하게 된 욥은 있는 힘을 다해 친구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나 네 번째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그가 당하는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겠다고 장담 한다.

마침내 야훼가 나타난다.

야훼는 필름의 파노라마와 같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전개하면서 욥이 하고 있는 불평의 경솔함을 질책한다.

이 책은 새로운 축복으로, 고통받는 의인이 첫 번째 행복에로 복원되는 것을 내용으로 종결 된다,

 

저작의 일체성

현재 욥기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성으로부터 교의적인 차원에서의 일련의 동질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즉 불의한 자의 번영에 부딪히고 있는 의인의 고통, 이것이야말로 교의의 중심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동질성은 심리적이고 문학적 차원의 숙고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산문으로 된 서론과 결론은 민담을 형성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1:1-2:13; 42:7-17).이 두 곳에서 욥의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스라는 곳에, 아마도 사해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사는 한 사람의 표본적인 인내가 소개되고 있다(1:1).

 

기원전 587년의 대재앙이 있은 후 바빌론으로 유배된 유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의 곤경은 존재에서 모든 가치를 추구하게끔 유도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그들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련한 욥에 대해 잘 알려진 이야기(에제 14:14.2)를 사용해서 유배 2세에 속하는 한 시인이

자기의 선임자 에제키엘(기원전 592∼580)의 시와 비슷한 시를 사목적이며 예언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다.

 

그는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영웅과 그의 친구들을 책 속에 등장시켜 존재의 가치를 시적으로 토론하고

인간적 정의(31:35-37)와 신적 정의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토론하게 하였다.

주님 자신이 영웅에게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고 신적 인도를 벌 할 기회를 주지만 욥은 도전하기를 거부하고 단순하게 자기의 자만에 대해 뉘우친다(42:1-6).

 

연대

이 책은 유배 이후에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배 이후 시대라고 보는 것은 후기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혜문학이 유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기원 전 5세기말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있는 연대이다. 그러나 산문으로 된 이야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에제키엘은 노아와 다니엘과 함께 전설적 현자의 유형으로서 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에제 14:14 - 21).

욥의 역사는 글로써 씌여지기 전에 구전의 형태로서 오랜 기간 동안 돌고 돌았을 것이다.

 

저자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다.

최소한 욥기는 그가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고 깊이 있게 종교적, 윤리적인 정신을 가진 자로서

심리적인 예민함에 대해 숙고할 능력이 있고 불행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아마도 욥 자신은 고통을 몰랐던 자 같다.

많은 내용들은 그가 매우 박식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욥서에 나타나는 상당수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이집트 주위 환경에 대해 종속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28:1-11, 40:15-41, 9:26, 8:11, 40:11-12).

이 책의 영등은 에도미트 족장이며 그래서 에돔에서 사건이 전개되지만 저자가 유다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Kissane은 "시대는 성조시대이며 장소는 에돔땅이다. 그러나 표현된 사상들은 유배 후기의 팔레스틴의 한 유다인의 사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욥의 문제

대화 속에서 욥은 그를 괴롭히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무죄하다고 느끼고 있다.

선은 보상되고 악은 이 지상 삶에서 처벌받는다는 전통적인 교의의 결핍이 확실한 사실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새로운 진리 앞에서 눈을 감아 버릴수 있다.

이것이 욥의 세 친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꺼리낌 없이 전통적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그 가르침이 욥의 경우와 부합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정통성’의 대표적 인물임을 자처한다.

 

그들의 태도는 간단하다. 고통은 죄의 처벌이다.

만일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그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사실들이 순응해야만 한다.

불행한 자 인 욥에게 그들이 가져오는 모든 위로란 욥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득시키는 데 있다.

욥이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네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무죄하고 최소한 그같은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욥이 전통적인 관점을 받아들이자 온 세계가 자기 앞에 문제시 되었다.

모든 것이 문제시 된 지금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경우에 대한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그의 노력은 별 진전이 없다. 자기의 고통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게끔 유혹당한다.

 

욥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길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신앙의 어두움 속에서 해매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욥의 위대함이란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은 그가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게 하는 도전에 고통들을 갖다놓을 줄 안다는 것이다.

 

토론이 절정에 달할 때, 때 맞추어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말하기 시작하신다.

세상 묘사하는 것을 듣고 놀란 욥은 신앙고백과 굴종을 언약한다.(42:5-6)

하느님을 보았다고 욥은 말한다. 그러나 신비는 남아 있다.

왜냐하면 욥은 죽음 다음에 이어질 보상에 대한 개념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길이란 욥에게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남아 있다면, 욥은 하느님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제부터 하느님 계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점이다.

인내의 인간 욥은 비산하였다. 그의 위치에서 우리는 참된 욥의 모습, 즉 신앙의 인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을 보았다.

욥은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그길을 우리가 모르지만 인내와 평화에로 이끌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욥은 구약성서의 시서(詩書)에 속하는 욥기의 저자로 흔히 불린다. 욥기의 목적은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이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한 하느님께 대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욥기는 크게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욥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근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원전 1천 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에제 14,14 참조). 바빌론 유배 이후, 곧 6세기 말엽 이후, 그리고 3세기 전반 이전에(집회 49,9 참조) 팔레스티나에 살던 어떤 유대인 저자가, 성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욥 이야기를 자기의 의도에 맞게 각색하고 윤색하여 거기에 독창적인 운문 부분을 지어 붙였다. 그러나 이 문문 부분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하는 말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욥기는 욥이라는 특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보편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을 이룬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 시나이 산 계약, 메시아 사상 등 선택된 민족의 특유한 사항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유배 이후에 저술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렘 함락 - 성전파괴 - 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 현상을 바탕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욥기는 출발점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주인공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의 거주지도 이스라엘 땅이 아니다. ‘욥’이라는 이름 자체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고 생각된다(1,1). 욥의 세 친구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다(2,11). 욥은 또한 대화를 시작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의 고통을 일반화한다.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들, 영혼이 쓰라린 이들’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진다(3,20-21). 물론 대화 중에 욥은 주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펼쳐 간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토대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전개시킨다.

   성 욥에 대한 전례적인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인정되었지만, 단순하고 곧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욥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욥기',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607-6611쪽.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