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웃사랑방~/하동사랑 코너

[스크랩] 아리랑의 원조인 정선아라리의 유적지

 아리랑의 원조 정선아라리의 유적지들

   1

정선아라리 비석

 

산과 강이 어우러진 아리랑의 발상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 노래는 저 유명한 정선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하자 이를 반대하던 고려의 유신(遺臣) 72명이 개성에 있는 두문동에 숨어 지내다가 그 중 전오륜을 비롯한 일곱 명이 정선의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겨서 살았는데, 이들은 고려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들의 외로운 신세 등을 한시로 지어 읊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풀이하여 부른 것이 이 노래이고 그것이 정선아라리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 된다고 한다. 아리랑은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민요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노래다. 특히 정선아리랑은 그 가락의 애절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민요로 인식되고 있다. 민요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다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거의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어떤 것이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요는 노래가 불려지는 집단이 가지는 삶의 모습이나 생각에 따라 아주 다양한 모습과 내용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민요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독특한 생각이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특색을 잘 반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민요의 내용이나 형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서 분포하는 아리랑을 보면 각 노래마다 노래의 곡조가 다르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으며, 노래의 내용에 있어서도 그 지방의 특색을 잘 나타내 준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상여노래를 보아도 각 지방마다 노래를 부르는 방식과 음악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 민요가 향토성이 없다는 주장은 억지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의 민요가 향토성이 없다는 주장은 주로 노래가사의 내용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데, 민요는 내용의 넘나듦이 매우 심하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이 지방에 불려지는 내용이 다른 지방에도 불려지니까 우리 민요에는 향토성이 없다는 식의 주장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민요는 음악적인 성격과 문학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한 부분만을 가지고 그것을 본질적인 성격인양 말해서는 설득력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민요 중에서 아리랑은 역사가 그리 길지도 않으면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아는 노래이며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인데, 각 지방의 노래들이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향토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랑이 우리 역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정도로 추측된다. 그러니까 시간상으로 보아서는 200년을 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리랑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리랑의 출현은 1800년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장구한 시간에 걸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오는 민요의 성격으로 볼 때 아리랑은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이 이처럼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잡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리랑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토록 빠르게 전파되어 사람들이 누구나 부르는 노래로 된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답을 내놓을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민요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닌데다가 어느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성시기와 기원, 그리고 작자 등을 정확하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모내기 노래는 모내기를 할 때부터 생겼으리란 추측을 할 뿐 누가, 언제, 어디서, 왜 불렀는지 등은 도저히 밝힐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밝혀 내는 일이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것을 즐기기만 할 뿐 그런 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기원이나 출현시기, 작자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무리이자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가치를 올바르게 자리 매김 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과 성격 등에 대해서 전체적인 틀을 잡아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할 때 비로소 아리랑의 참 모습을 알 수 있게 되고, 아리랑을 더욱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조사된 아리랑은 그 종류만 해도 50여종에 이르고 강원도 아리랑만 해도 20여종을 헤아리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분포도를 보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북쪽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걸쳐서 퍼져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점으로만 보더라도 아리랑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으로는 거의 전지역으로 퍼져서 각 지방의 특성에 맞도록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백두대간의 태백산맥이 자리 잡고 있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서울에 이르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밀양과 진도에 이르기까지 아리랑이 분포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아리랑은 우리 민족 전체의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아리랑에 대해서는 발생시기, 기원, 아리랑의 의미 등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기원과 의미 등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설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결과를 보면, 일반적으로 아리랑의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정선아라리를 시작으로 강원도 지역만 보더라도 평창, 춘천, 인제, 양양 등의 아리랑과 더불어 강원도 아리랑이 조사되어 있다. 그리고 경상도 지방인 嶺南쪽으로 내려가면 예천아리랑, 문경아리랑, 영천아리랑, 하동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조사되어 있다. 울릉도와 독도에서도 아리랑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충청, 전라도 지역에서는 공주와 대전지방의 아리랑이 조사되어 있고, 남원, 구례 등을 거쳐 진도아리랑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울, 경기 아리랑을 비롯하여 해주, 황해도 아리랑 등으로 부르는 것들이 보이지만 역시 우리가 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금강과 섬진강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백두대간과 어우러진 지역이 중심을 이룬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하늘 아래 끝동네인 두문동, 현재는 터널이 뚫려서 태백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정선지방의 아리랑인 정선아라리가 원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것을 보면 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자들이 여러 종류의 이야기를 한 것이 사실이다. 낙랑시대부터 있었다는 주장에서부터 삼국시대에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 고려말엽으로 보는 주장, 그리고 조선후기에 아리랑이 생겼다고 보는 의견이 있는 한편 이 보다 더 후대인 19세기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 등 여러 자기 견해가 있다. 그 중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중에는 고려말엽에 아리랑이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의 멸망을 슬퍼한 일곱 명의 현자들이 정선에 숨어살면서 자신의 서글픈 심사를 시에 담아서 읊었고, 이것이 나중에 민간에 퍼져서 아리랑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곱 명의 현자들이 지었다는 한시들이 과연 노래로 불려졌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그들이 생존했다는 시기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후대에 기록된 문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주장대로 고려말에 아리랑이 생겼다면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 동안 아리랑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18세기 이후에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면 그 이유 또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선 지방에 숨어살았던 현자들에 의해서 아리랑이 발생했을 것이란 주장은 신빙성이 약할지 모르지만 이 지방을 중심으로 아리랑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악곡의 측면에서나 노래의 형태적 측면에서 모두 정선 지방의 아리랑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에 아리랑이 정선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정선에는 거칠현동(居七賢洞)이라는 동네가 최근까지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동네는 없어지고 비석만 덩그렇게 서 있다. 또한 정선에서 사북, 고한을 지나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싸릿재 정상 부근에는 두문동(杜門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 역시 고려말에 일흔 두 명의 현자들이 숨어서 살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두문동 이야기는 지명과 전설에 의해서만 전해 올 뿐이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제일 가는 탄광촌이었던 관계로 산과 골짜기가 모두 시커먼 연탄과 사람들의 집으로 뒤덮였던 곳이다. 연탄사용이 줄어들면서 탄광이 없어진 뒤에도 이곳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서 폐허가 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집의 잔해가 폭격 맞은 것처럼 어지럽기 이를 데 없었다. 최근에야 겨우 정리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싸릿재에 터널을 뚫는 관계로 두문동은 결국 사라지고 이름만 남게 되었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기념비나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램만 남겨 놓고 있다. 이런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정선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은 아리랑을 낳을 만한 여러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기원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뚜렷한 증거나 정설로 인정할 수 있는 주장은 제기된 바 없다. 혁거세의 비인 알영에서 아리랑의 어원을 찾아보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밀양의 아랑전설에서 왔다는 것과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강제로 세금을 내라고 하자 내 귀가 먹었다고 말한 아이롱(我耳聾)에서 어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아리랑의 어원과 의미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리랑의 기원과 어원에 대해서는 그 연원을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뚜렷한 근거나 주장이 없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은 우리 나라 전 지역에 걸쳐서 존재했고, 각 지방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의 기원과 어원에 대해서는 그 접근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랑의 원조는 정선아라리로 인정하더라도 아리랑의 기원을 어느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아리랑의 본질을 밝혀 내는 데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 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아리랑에 대한 생각들을 토대로 아리랑의 기원과 노래의 의미를 밝혀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어디에 어떤 노래가 있고, 이 노래는 어떤 노래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그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 환경과 연결된 접근을 통하여 아리랑의 특성을 밝혀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아리랑의 본질과 근원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아리랑은 무엇 때문에 부르며 그것을 부르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는 점들을 중점으로 파 들어가면 삶 속에서 가지는 아리랑의 참된 의미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완전히 밝혀 내지는 못하더라도 그 중심에 가장 접근하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리랑은 노래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어서 우리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리랑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선을 중심으로 그곳의 생활환경과 유적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아리랑의 전파경로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서 이루어진 아우라지

 

정선은 예로부터 산과 강이 가장 잘 어우러진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산을 넘지 못하는 강이 굽이굽이 돌면서 만들어 내는 정선의 풍광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취를 느끼게 한다.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과 강뿐이기 때문에 강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동서남북을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 또한 정선이다. 산이 높고 험하면 물이 약하고, 물이 많고 넓으면 산이 높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정선은 이 두 가지가 가장 적절히 조화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산과 물이 6:4 정도로 어울린 곳, 그곳이 바로 정선이다. 그러므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정선은 거부감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수로와 육로가 있다. 수로는 조양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길인데, 물길로 서울까지 닿을 수 있는 이 길은 아리랑을 낳고 아리랑을 키웠으며 아리랑을 다른 지방으로 전파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육로는 크게 보아 세 갈래다. 하나는 평창을 지나 서울로 통하는 길이요, 또 하나는 고한, 사북을 지나 함백산을 넘어 황지를 지나 영남으로 통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여량을 지나 임계를 거쳐 강릉이나 삼척 등의 해안으로 통하는 길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바로 정선아라리의 전파경로와도 일맥상통하고 있어서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하지만 수로와 육로를 따라 사람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니, 아리랑은 바로 이 두 갈래의 길을 따라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정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강줄기는 크게 네 개 정도가 된다.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의 동북쪽 아래에 있는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임계를 지나 여량으로 흘러드는 골지천이 하나요. 평창군 도암면 황병산에서 발원하여 도암면과 왕산면을 지나 노추산을 휘감으면서 구절리를 통해 여량으로 흘러드는 송천 다른 하나의 강이다. 그리고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북평으로 흘러드는 오대천이 세 번째 강이요, 백두대간의 금대봉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면 몰운대를 지나 정선의 동쪽으로 흘러드는 어천이 네 번째 강이다.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서 아우러지는 곳이 바로 정선아리랑의 발상지로 알려진 아우라지다. 여기서부터는 조양강이란 이름으로 바뀌어서 북평면의 나전에서 오대천을 합쳐서 정성읍에서 어천을 합친 다음에는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사북, 고한을 거쳐 남면의 가수리로 흘러드는 동남천을 합하여 동강이란 이름으로 영월로 흘러든다. 여량의 아우라지에서 영월에 이르는 에 이르는 동안 산에 막혀 흐르지 못하고 굽어져서 돌아 나가는 과정을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다른 지방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절경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 강줄기를 따라 물길과 더불어 땅길도 만들어져서 그 길이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그와 함께 노래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전파 경로를 이렇게 설정해 놓고 보면 아리랑이 왜 태백산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서남쪽으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는가를 명백히 알 수 있게 된다.

정선아라리를 알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청해서 들으면서 이야기를 시켜 보면 거의 모든 가창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은 힘든 일을 하거나 마음이 울적하여 슬플 때에 주로 아라리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아라리는 특정한 장소나 일정한 시기에 불리는 노래가 아니라 아무 때나, 어디서나, 혼자서나, 둘이나, 여럿이 어떤 형태로 불러도 좋은 노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라리는 성격상으로는 삶의 노래라 할 수 있고, 내용상으로 보아서는 슬픔의 노래라 할 수 있다. 밭에서 일할 때는 일이 힘드니까 아라리를 부르면서 일을 하고, 집을 떠나서는 집이 그리우니까 아라리를 부르고, 님 생각이 나면 아리리를 부르고, 신세가 처량하면 아리리를 부르고 한다는 것이다. 아라리는 삶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리의 내용은 삶의 내용이 그대로 노래의 내용이 된다.

 

우리집에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구 찍어매구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 나무 지게에다 엽전열냥 걸머지구

강릉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굽이굽이 부디 잘다녀 오서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 노래는 정선아라리 중의 한 대목이다. 자신의 서방님은 비록 못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이기에 강릉 삼척으로 멀리까지 소금 사러 간 길이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소금은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에 멀리까지 가서 소금을 사 오는 일은 생활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을 소재로 하여 아라리가 불려진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복령은 여량과 임계를 지나 석병산을 넘어 삼척과 강릉 등의 동해변으로 통하는 관문 고개이다. 험하기로 소문난 고개지만 생활필수품인 소금을 사기 위해서는 넘지 않으면 안 되는 고개이다. 이 길은 정선에서 해변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데, 이 길을 따라 아리랑도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의 학산에 남아 있은 학산 아리랑이 바로 이런 증거라고 생각되는데, 학산은 신라 범일국사가 지은 굴산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던 곳인데, 범일국사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나 대관령에 올라가서 산신령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학산은 대관령 아래에 있는 아늑한 평야지대로 농사가 주업이 되는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은 모심기 노래의 한 작품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에서 불려지는 모심기 노래가 바로 정선아라리에서 파생된 것임 보면 위의 노래에서 나오는 백복령을 넘어서 아라리가 전파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 낙동정맥을 타고

정선아라리가 전파되는 또 다른 육로는 사북 고한을 지나 싸릿재를 넘어 태백이 된 황지로 가는 길이다. 행정상 구역은 다르지만 정선과 같은 생활권 속에 있는 곳이 바로 황지와 장성이었다고 한다. 태백 아르랭이를 부르는 소리꾼을 만나서 물어 보면 정선 사람들이 황지나 장성까지 와서 일을 하기도 하고 하여 평소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태백아르랭이는 바로 정선의 아라리가 전해져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싸리재를 넘어 황지로 전파된 태백아르랭이는 낙동정맥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게 되니 영남의 곡창지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아리랑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백두대간 마을인 경상도 예천 아리랑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은 아리랑은 낙동강을 타고 흘러서 영천 아리랑과 밀양아리랑 등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태백시 구무소 앞 마을에서 몇 대째 살고 계시다는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쭤 보았더니 태백 아르랭이 역시 정선아라리와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 불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선이나 태백이나 모두 산으로 둘러쌓인 곳인데, 산비탈을 중심으로 밭을 일구고 산에 오르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생활 방식이 비슷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래 역시 비슷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아라리에서는 산골의 이러한 적막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명사십리가 아니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조양강의 떼꾼 아리랑

   

아우라지 뱃사공, 엣날에는 뗏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아리랑은 물을 따라 전파되는 또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으니 다름 아닌 뗏목이 나가는 강줄기가 그것이다. 강줄기는 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서 나르는 떼꾼들이 있었고 떼꾼들이 물을 따라 외롭게 흘러가는 고독감과 서글픔을 노래에 실어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아라리였다. 아라리는 산 속 생활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노래를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데는 떼꾼들의 구실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낭만과 모험이 가득한 떼꾼이라는 직업은 삶의 일부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독을 동반한 하나의 여행이기도 했는데, 뗏목을 타고 내려가는 도중에 주로 아라리를 불렀다고 한다. 뗏목을 목적지까지 가져가면 목돈을 받게 되는데, 이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떼꾼들이 뗏목에서 내려 돈을 받는 부근에는 색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온갖 수단으로 홀리기 때문에 고생해서 받은 돈의 대부분을 날리고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떼꾼을 하면 나쁜 것 하나는 목돈 받는 재미와 색주집에서 노는 재미에 맛을 들였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농사일을 할 생각은 아예 접어 두고 언제쯤 다시 뗏목이 뜨는가만 눈 빠지게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폐인이 되기도 하는데, 떼꾼으로 큰돈을 번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떼꾼을 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다.

정선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는 뗏목은 조양강을 따라 영월로 내려가는데, 영월은 평창에서 내려온 뗏목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리랑이 뗏목이 가는 물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파되었다는 것은 평창 아리랑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정선과 평창은 육로로도 이어져 있어서 그 길을 따라서도 문화의 교류가 있었겠지만 험한 산을 몇 개나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리랑의 전파는 오히려 물길을 따라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아리랑은 뗏목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이 점 역시 물길을 따라 아리랑이 불려지고 전파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김연갑 씨에 의해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소양강 뗏목 아리랑, 인제 아리랑 등은 모두 뗏목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물길을 따라 퍼져 나간 아리랑은 경기 지역으로 와서는 서울 아리랑과 경기 아리랑을 낳고 강이 옥토를 적시는 충청, 전라 지역으로 내려가면서 계속해서 아리랑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남으로 가는 길에 생긴 아리랑은 공주, 대전, 남원, 영암 등을 거쳐서 진도아리랑에서 또 하나의 아리랑 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

 

정선에 남은 아리랑 유적

   

아우라지 처녀상

 

이처럼 정선아라리는 아리랑의 원조로서 아리랑은 낳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정선에는 아리랑과 관련된 이야기와 유적들이 얼마나 존재하는 것일까?

아우라지는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정선아리랑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바로 이곳 아우라지 나루터다. 두 개의 물이 합쳐지는 이곳은 한강으로 나가는 뗏목이 떠나는 출발점이었는데, 여기에는 슬픈 전설 하나가 깃들여 있다. 가구리에 사는 처녀와 여량에 사는 총각이 서로 사랑을 했는데, 이들은 싸리골에 동백을 따러 간다는 핑계로 만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만나기로 한 날 밤에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을 건너지 못한 처녀가 애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그 심정을 아라리의 가락에 실어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여량리와 가구리에는 서로 사랑하는 총각과 처녀가 있었는데, 뗏목을 타고 나간 총각이 급류에 휩쓸려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자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던 처녀가 부른 노래가 바로 아라리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을 담고 있는 노래가 바로 다음의 가사이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비가 와서 물은 불었고, 자신을 건네 주던 뱃사공은 나타나지 않으니 강을 건널 수 없게 된 처녀는 자신의 급박한 심정을 동백이 떨어지는 상황에 빗대어서 뱃사공을 원망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사실 동백 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뱃사공을 불러서 원망한 구실이 없으니 동백이 떨어지는 것을 가지고 성화를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뱃사공이 오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내 체념을 한 화자는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으로 옮아가고 만다. 동백은 떨어져도 낙엽에라도 싸이는데, 아무에게도 싸일 수 없는 자신은 그저 님이 그리워 못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아우라지 강가에 서 있는 아우라지 처녀상과 정선아라리 비석이다. 멀리 강 쪽을 바라보면서 댕기머리를 하고 서 있는 처녀상은 전설과 노래의 의미를 잘 보여 주고 있지만 돌로 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벌써 군데군데 헐어서 속을 드러내고 있다. 옆에는 정선아리랑비와 이상한 모습의 정자를 지어 놓았는데, 정자를 짓는 돈으로 차라리 아우라지 처녀상을 돌로 깎아서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최근에는 여량리에서 아우라지 처녀상 쪽으로 골지천을 건너도록 만든 다리가 하나 생겼다. 원래는 처녀상이 서 있는 반대편에서 송천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으나 돌다리 밖에 없어서 비가 와 물이 불으면 건널 수 없게 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리 중간에 초생달 모양의 조각물이 있어서 약간 생뚱맞다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과 초생달 이미지가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라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아리랑 관련 유적이라면 역시 가구리와 여랑 사이의 강을 오가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다. 약간의 뱃삯을 지불하고 강을 건너 주지만 이곳에서 아라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저 물만 건너게 해줄 뿐 노래는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선아라리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유적들은 이 외에도 정선아리랑비, 도원가곡비, 칠현비와 더불어 칠현이 살았던 동네임을 알려 주는 거칠현동비 등이 있다. 거칠현동비가 서 있던 곳에는 최근에 사당을 짓고 기념 비각을 세워서 공원처럼 꾸며 놓아서 탐방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유적들보다는 골골 마다 숨어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면서 아라리를 생활 속에서 부르고 있는 토박이 사람들이 정선아리랑의 진정한 보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선을 여행 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유적지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마을을 찾아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찾아뵙고 아라리 한 곡조를 배워 보는 것이 더 값진 답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거칠현비

출처 : " 영원히 함께 "
글쓴이 : 늘영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