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은 머리부터 썩어간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2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뒤따라 올랐다. 그때 마침 바다에 큰 바람이 불어 배가 파도에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를 깨우며 말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겁이 많습니까,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여.” 예수는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 그러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말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마태 8,23-27)
예수와 제자들만 있는 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람들이 알거나 감탄할 수는 없겠다. 예수 생전에 진짜 일어난 사건은 아니고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 신자 교육에 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데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공동성서(구약성서) 요나 이야기를 참고하여 꾸며낸 것 같다(요나 1,4-16). 마르코 복음 4,35-41을 마태오가 손질하였다. 베개 이야기는 사라지고, 제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반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적 사건 설명에서 예수와 제자와 대화로 중심을 바꾸었다.
‘흔들림’(seismos)은 세상 마지막 날을 연상시키기 좋은 단어다. “그날에 이스라엘 온 땅에 흔들림이 있으리라. 바다의 고기가 내 앞에 떨 것이다”(에제 38,19). 제자들의 정신적 흔들림을 보여주기에도 적당한 단어이다. 바람과 바다는 혼란의 힘을 상징한다(시편 107,25-). “배”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도 교회를 상징하는 데 애용되는 단어다. 유다교에서 배보다 바람이 더 자주 비유에 쓰였다. 고대에 배는 주로 국가를 가리키는 비유다. 국가를 상징하는 정치적 비유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말로 초대교회가 바꾼 것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者舟 庶人者水 水則載舟 水則覆舟). 가난한 사람이 교회를 지탱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교회를 뒤엎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이 두려운 줄 교회는 알아야 한다.
예수가 배에서 잠든 것은 방랑과 가르침에서 피곤한 탓일까. 그보다 예수의 위엄과 자신감을 나타내려는 표현 같다. 인간으로서 예수는 불안을 모르지 않는다(마태 26,37-). “주님”은 예수를 부르는 제자들에게 적절한 호칭이다(마태 28,18). 모든 인간적 불안의 바탕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을 가라앉히고 나서 제자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예수는 먼저 제자들의 믿음 부족을 질책한다. 제자들이 불안했기에 혼난 것은 아니다. 곁에 예수가 있어도 제자들이 두려워한 그 자세가 비판받는 것이다. 믿음은 불안을 이긴다. 예수가 내 곁에 있어도 나는 예수가 그립다.
하느님이 바다와 바람을 다스리시듯(시편 107,29) 예수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고통에서 울부짖자 하느님께서 건져주셨다(시편 107,28). 예수도 그렇게 한다. 그런 예수에게 사람들은 놀란다. 예수는 대체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그리스도교 신자도 매일 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를 잘 모르고서도 예수를 설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늘 그리스도교의 아픈 현실이다. 예수에게 사람들은 호감을 갖지만(마태 9,33; 15,31; 21,20), 거리를 두기도 하고 적대심을 품기도 한다(마태 22,22).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경하며 배우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헐뜯고 미워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더 큰 것 같다.
오늘의 단락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 첫째, 예수를 따름은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공동운명을 지닌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탄 것이다.
둘째, 예수를 따름은 위험한 길이다. 예수를 믿으면 돈, 건강, 구원이 온다는 엉터리 가르침과 그리스도교는 전혀 관계없다. 예수가 먼저 배에 오르고 제자들이 뒤따른다. 예수가 먼저 희생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바로 예수다. 스테파노, 바울, 베드로가 예수의 뒤를 따라 순교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들이 신자보다 먼저 희생하려 애써야 곧 가톨릭교회다. 목사들이 맨 먼저 희생해야 참다운 개신교다.
희생은 제일 먼저 ‘가난한 교회’로 나타난다.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제자들의 가난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다. 아쉽게도 ‘교회의 가난’과 ‘세상의 가난’ 문제를 그는 언급하진 않았다.
오늘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가 가난의 의무를 잊고 자본주의식 성장 논리에 깊이 빠진 모습이 안타깝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난의 감각’이 크게 사라진 것 같다. 가난의 감각은 청빈에 대한 매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의로운 분노에서 온다. 진정한 가난의 감각은 사실 ‘정의의 감각’에서 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감각 없이 가난에 대한 감각은 없다.
가톨릭교회에는 조직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문제도 성직자보다 주로 신자에게 화살을 향한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류 앞에 사죄한 가톨릭교회의 잘못 중 대부분은 조직과 성직자들의 탓이었다. 오늘 가톨릭교회의 위기―교황청 부패, 성추문, 신자 감소 등―는 곧 성직자의 위기다.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밤에 대리운전에 나서는 목사들이 많은 안타까운 현실을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신부들은 알기나 할까.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하느님 앞에 지금 엎드려 호소해야 한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어간다’는 터키 속담이 있다. 교회에서 돈, 권력, 결재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명심할 말이다.
김근수 (요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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