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의 인간문화재 그 허와 실
객석 1996. 2월호(특집), 글. 장광열 기자
한국의 인간문화재 그 허와 실
인간문화재, 보존하고 전승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예술을 보유한 예술가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5천년 한국의 예술을 대표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는가? 그들은 '명예' 만큼 '책임' 을 다하고 있는가? 무형문화재에 얽힌 이모저모를 현장취재를 통해 알아본다
(1)문화재가 되지 못한 진짜 예인들
"허울좋은 명예보다 지조를 지킬라네" 엄격한 수련, 구음과 굿거리춤의 명인 김수악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수도가 꽁꽁 얼어붙어 세수도 못했네." 선생이 기거하는 방은 두세평 남짓될까 무척이나 좁았다. 거기에다 장구니 가야금이니 악기와 각종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어 주변을 대충 치우고 사진기자와 함께 세 명이 앉자 방은 가득 찼다.
그 옆에 또 다른 작은 방이 하나 있으나 냉골이 었다. 거기에도 이것 저것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형문화재 제12호 단체종목으로 지정된 진주검무의 세 명 보유자중 한 사람인 김수악(71). 그는 월 23만원 짜리 셋방에 살고 있었다. 문밖에 있던 민속예술전수관.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진주지부란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그곳은 좁고, 허름했다.
"아래층 집주인이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다고 몇 해 전부터 방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내가 나갈 데가 없어 이러고 있네".
선생은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운 듯 말머리를 돌렸다. "또 문화재 얘긴가? 이제는 그 얘기 좀 그만할라네." 얼마 전에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았다는 선생은 심사위원이였던 제자들이 "아직도 선생님이 이 상을 받지 않으셨나요?"라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시상식장에서 "선생님의 굿거리춤이 중앙의 문화재 지정이 안 되면 더 늦기 전에 경상남도 도문화재라도 지정받아야 한다" 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서류를 준비해 오던 늦깍이 제자가 선생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보유자로 덜컥 올려놓은 것을 알고는 또 한 번 기겁을 했다.
엄연히 살아 있는 선생을 제쳐놓고, 그것도 몇 달밖에 안 배운 제자가 도문화재가 되겠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다.
"요즘 사람들이 진짜 공부는 안하고 다른 데 눈이 멀었어. 모두들 기술만 배워가려 하지. 문화재가 뭐라고 재주부리는 년들이 이렇게도 많은지..." 알 만한 사람들은 김수악 선생의 굿거리춤과 구음에 대해 그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문화재 전문위원이니 문화재관리국에 있는 사람들이 수차례 다녀갔네. 후보 지정에 필요하다며 구음도 녹음해 가고 춤도 보고 갔지. 대접이 소홀해서 였는지 감감무소식이데. 더러 다른 지방에 있는 문화재들이 전화해서 그냥 있으면 안 된다. 인사를 해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렇게 해서 문화재가 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재주는 자신 없는 사람들이 부리는 것이지 자신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필요없네." 그러면서 선생은 "김수악하면 전국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네 유명한 선생들에게 제대로 배웠다는 것을. 우리 집에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없네. 학교 안 다닌 것을 다녔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은 없네. 그래서 문화재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예술은 학벌로 하는 것이 아니네."
선생에게 춤과 소리, 가야금을 배우러 오는 제자들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옛날에는 예술성은 제쳐둔 채 선생에게 춤 배웠다면서 제자행세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었지만 선생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자 하나, 둘 발길을 끊어 버렸다. 이유는 또 있다.
제자들을 가르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정산 잘하고 공연 횟수가 많아 실적을 올려주는 사람들과 일할려고 하지, 나처럼 복식을 따지고 공연의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은 싫어 하지."
이제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예술인보다도 일반인들이 더 많다. 유망한 예술가들에게 그 기예를 전해야 할 선생이 생계를 위해 일반인들을 위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 재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한국의 춤과 음악은 땅의 두께와 같네. 그만큼 그 속이 깊어, 알면 알수록 깊은 것이 우리나라 예술이네. 예술을 모르고 할 때와 알고 할 때가 다르지. 젊었을 때는 덩더꿍 가락에만 흥에 겨워 추지만 나이가 들면 그 깊이가 다르다네. 문화재로 지정받는다고 해서 예술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올곧은 예술정신과 그 기를 이어받는 것이 이 시대에는 더 중요하네. 지금은 좋은 선생들이 하나, 둘 자꾸 없어져 가네. 그것이 안타깝네. 문화재란 허울좋은 명예보다는 피가 나도록 갈고닦는 정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네."
장인정신으로 힘든 것을 끈기있게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숨을 거두어야 할 말년에 편히 쉴 방 한 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서러운 일인가? "이제와 무엇을 바라겠는가. 어디 마음놓고 편안하게 내 춤과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라도 생겼으면 좋겠네."
사라져 가던 진주검무를 복원시켜놓은 선생의 공로도 공로지만 선생은 입춤, 진주살풀이춤, 승무, 검무, 교망굿거리춤 등 다양한 춤들을 섭렵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예전같이 소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날씨가 괜찮고 기분이 좋으면 옛날 전성기의 구음에 버금가는 소리가 나온다. 또 선생의 굿거리춤은 경남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굿거리춤이면서도 호남류 장단과 춤 사위가 섞여 단아하면서도 감칠맛을 더해 준다. 그러다 흥이 나면 구음 장단이 섞인다. 풍류와 멋진 가락이 조화를 이루며 춤은 한없는 멋의 세계로 빠져든다.
보존가치가 있는 예술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해 끊길 위험에 처해 있는점, 관련기관들의 실적쌓기에 급급한 안이한 행정으로 그나마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 인간문화재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그들의 예술 전수 공간의 필요성 등이 김수악 선생의 취재를 통해서 드러난 문제점들이다.
경북 예술계 텃밭 일구는 판소리 명인 장월중선
"문화재위원들요? 여러 사람이 다녀갔지요. 국가 지정문화재가 되려면 끈이 있어야 된다고 하더군요. 그런 것이 없기에 함부로 생각도 안해요.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편하지요."
경북 지역의 전통예술계를 지키는 대들보 장월중선(71). 경주에 터를 잡고 있는 선생은 판소리와 함께 가야금, 거문고, 아쟁 등 국악기도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리고 승무나 살풀이춤도 가르치고 있다.
판소리 연구가 최동현은 "장월중선의 소리는 화려함보다는 고움에, 몸부림치며 울부짓는 통곡보다는 조용한 가운데 홀로 느끼는 데 더 잘 어울린다. 이러한 점은 그의 가야금과 아쟁, 그리고 병창에서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다" 면서 선생의 다재다능함을 평한다.
경주 중앙시장의 2층 상가건물 안에 있는 두 개의 작지 않은 공간이 선생의 일터이다. 이곳은 한국국악협회 경주지부의 사무실을 겸하고 있다. 장월중선 선생은 무엇보다 판소리에 일가를 이룬다. 선생은 큰아버지인 명창 장판개와 월북한 서편소리꾼 박동실로부터 배웠다. 소리에 대한 선생의 재능은 중앙 무대에서도 여러 번 사람들의 입에 올랐으나 엉뚱하게도 가야금 병창으로 1980년 경상북도 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가야금 병창은 어려워서 잘 배우려고 하질 않아. 판소리로 지정을 받았어야 하는데... 소리가 잘되어야 병창도 잘하거든. 그러나 경상도는 그런 기질이 아니야. 차라리 아리랑을 부르고 말지... 전수생들이 없어 애먹을 때나 가능성이 있는 제자가 중도에 포기할 때는 억지로 지정해 준 것 같아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선생의 이 말 뒤에는 지정받아야 할 종목이 지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 숨어 있다.
"여기서 소리 배워 어느 정도 하면 서울로 가버려. 그러고는 마치 자기 것인 양 행세하지. 만약 내가 문화재로 지정받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 하소연이 무슨 소용인가? 나도 이제 많이 늙었어. 거문고는 손가락이 구부러져서 몇 장단 나가면 농현이 안 돼 못하고, 아쟁도 허리가 저려 못해. 기관지염 때문에 소리도 제대로 나질 않고...."
그래도 제자 기르는 일은 그만둘 수 없어 요즘에는 1주일에 세 군데의 병원을 번갈아 찾아다닌다는 선생은 중앙 문화재로 지정만 되었더라면 더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처세를 잘해야, 재주를 잘 부려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더라구. 그리고 자기 선전을 자기가 많이 하면 할수록 성공한다는 말도 있더군. 그런 말은 말 같지가 않아. 내 선전을 내가 어떻게 하나. 남이 알아야지... 내 예술을 알아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나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인간문화재가 아닙니까? 하고 물어. 도문화재라고 하면 그제서야 그랬었구나 하지."
도문화재를 위해 경상북도에서 주는 지원금은 월 25만 원이 전부다. 그래도 선생은 다른 진짜 예인들에 비해 가르칠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말한다. 함께 소리를 공부하고 춤을 배운 광주의 한애순과 진주의 김수악 선생이 연습실이 없어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자 그는 자신의 일처럼 속상해 했다.
문화재 지정이 안 돼 이제는 전수가 불가능하게 됐고 지정이 잘못됨으로서 그것의 보급에 차질이 생긴 예를 장월중선 선생을 만나면서 목격하게 됐다. 또한 이런 예인들에게 전수공간의 확보는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오는 것인가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예술을 한 사람이라도 더 전하고 더 보여주며, 바람같이 그렇게 살 거야."
발군의 소리, 서편제의 명창 한애순
"김명한 고수가 살아 있을 때 중앙문화재가 되어야 하니까 '심청가' 한바탕 넣어달라고 해 갖고 가더니 감감무소식이더군. 그래서 복사를 해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이던 모씨에게 다시 보냈지. 사실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광주의 명창 한애순(72). 소리판에서 선생의 이름은 유명하다. 11세때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한 선생은 13세에 이미 레코드 취입을 할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보였었다. "뿌리깊은나무" 에서 발간한 판소리 다섯 마당중 '심청가' 에 그의 소리가 담겼다.
"당시에 박귀희. 김소희. 임춘앵 등과 창평의 지실에서 함께 공부했지. 그들은 서울에서 인간문화재가 됐고, 후배들도 인간문화재가 됐는데 나는 아직도 이러고 있으니..."
선생의 '심청가' 는 박유진-이날치-김채만-박동실로 내려오는 계보를 잇고 있으며, '흥보가' 는 박녹주에게서 배웠다. '수궁가'는 박동실제와 임방울제가 섞여 있다.
72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선생은 아직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 두레극장 개관공연에 초대되어 서울 무대에서 3시간 40분 동안 '심청가' 를 완창했을 때 귀명창(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선생의 기력도 기력이지만 소리의 질이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이다. 함께 자리한 명창들도 선생의 소리에 혀를 내둘렀다. 선생은 1974년에 박동실제 '심청가' 로 광주시 문화재가 됐다.
많은 제자들이 나를 거쳤네. 도립국악단, 국극단에도 나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들이 있지. 그러나 제자들을 많이 가르쳐도 다 서울로 올라가 버려. 지금 문화재가 된 사람들 밑에 들어가야 출세길이 열리기 때문이제. 소리는 나한테 다 배워갖고 훌쩍 서울로 떠나는 제자들을 보면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 구만."
선생은 광주 시내의 13평짜리 시영 아파트 딸네 집에 얹혀 살고 있다. 마땅히 가르칠 곳이 없는 선생은 제자들에게 연습을 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아파트 에서는 마음대로 소리를 내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는 제자들은 두 명에 불과하다.
"광주는 말만 예향이지 예술가들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어요. 시문화재니만큼 의무적으로 전수 장학생도 길러야 하고, 소리를 배우겠다며 전화문의도 자주 오지만 공간이 없어 가르치질 못하세요 시문화재가 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건강상태가 좋은데도 연습실이 없어 후진들을 양성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월 45만 원의 보조비도 많은 금액은 아니지요."
가르칠 곳이 없는 어머니가 안타까웠던지 딸이 거들자 "인터뷰할 때마다 돈 얘기가 나오제. 입만 더러워지게 그 얘기는 뭐하러 하냐" 고 나무란다.
" 중앙 문화재는 실력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닙디다. 제자들이 서둘러서 자꾸 서울에 왔다갔다하더니 문화재가 되더라고. 그러니 당신도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 올라가지 그래. 서울에 가서 학원도 차리고 로비도 해야 문화재가 된당께."
다른 지방에 사는 이름만 밝히면 다 아는 유명인이 어떻게 하면 문화재가 되느 냐고 묻는 선생에게 들려준 말이다. 실력이 중요하지 사는 곳이 왜 중요한가? 하도 화가 나서 아이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방을 얻으려 하자 딸린 아이들이 있느냐 없느냐며 꼬치꼬치 묻는 바람에 그 길로 광주로 다시 내려와 버렸다.
"그때 서울에 눌러앉았으면 문화재가 됐을 텐데..." 사진촬영을 위해 소리 한 대목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선생은 '심청가' 한 대목을 부른다.
"동생은 벌써 받아야 하는데, 스승인 박동실 선생이 월북하는 바람에 중앙 문화재가 못된 것이여."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은 더욱 울화가 치민다. 스승이 월북했다고 안 되고, 유명한 선생 두 사람에게 배웠다고 안 주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 와중에 덜컥 스승을 바꾸어 문화재가 되는 세태를 지켜보면서 선생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 의해서 문화재가 지정되는지 모르겠다." 며 분통을 터뜨린다.
"10년이 훨씬 넘었지 아마. 춤의 명인이던 오빠 한진옥의 춤을 조사하러 서울에서 문화재 관계자들과 관리들이 내려왔을때 오빠가 2백만 원을 주면 시켜주겠다더라라는 말을 하더군 나는 오빠에게 집이라도 잡혀 돈 주고 문화재 자격을 따라고 했더니 돈 주고는 안 할란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랬으면 몇 년 만에 관리들에게 준 돈 다 찾았을텐데...휴..." 선생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털어 놓기 어려운 말을 불쑥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선생은 인간문화재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한은 실력이 있는데도 문화재가 못 된 것에 대한, 정정한데도 가르칠 공간이 없는데 대한, 문화재가 '실력' 이나 '가치' 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설수에 의해 정해지는 것 같은 현세태에 대한 울분인지도 모른다.
"명창대회 나가면 내 제자가 더 잘하는데도 문화재가 된 사람의 제자가 더 좋은 상을 받제. 내가 이 짓을 그만두고 산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디..."
(2) 무엇이 문제인가
돈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국보' 의 명예
중요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의 지정 및 전수과정과 관련된 문제점들은 그동안 간간이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대부분 제도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인간문화재' 란 거창한 타이틀 때문에, 그 타이틀이 갖는 '권위' 때문에 감히 그것들을 둘러싼 추한 얘기들을 정면으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었는지도 모른다.
인기종목의 경우 수강료는 작품당 5백만 원~1천만 원
그동안 취재과정에서 매모한 무형문화재에 관련된 문제점들은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과 비지정 종목과의 보존 및 전승에 있어서의 현격한 격차, 무형문화재 선정에 적용되는 기준 및 판단의 문제, 무형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선정과 전문위원 및 관련 공무원들의 도덕성 문제 등으로 요약된다.
이중 가장 큰 문제점은 종목 및 보유자 선정, 그리고 보유자 들에 의한 후보자 선정과정에서 발생되는 도덕적인 타락에 관한 것들이다.
앞서 지방의 현장취재에서도 나타났지만 높은 예술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맥이 끊길 위험에 처한 종목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소위 인기 종목들의 경우는 밀려드는 수강생들로 인해 보유자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형문화재 종목 선정은 심의위원들에 의해 그 판단이 좌우되는 만큼 이들을 대상으로 한 금전공세는 예상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관과 그들이 선정하는 소위 '위원'들과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공생' 의 관계로 발전된다. 이들에 의한 은근한 '바람' 과 '유혹' 의 손길은 '명예' 와 '돈' 으로 둔갑되고, 예술가들의 알량한 자존심은 이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일단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돈이 모이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은 종목도 물론 있다). 그런데 인간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심의위원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돈이 필요하다. 장래에 또 인간문화재가 되려는 사람들은 보유자에게 전수를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또 돈이 든다.
전수를 받더라도 이수자 자격증을 따려면 심의위원들과 보유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또 돈이 든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라면 그 '정도' 가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마치 먹이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연속적이 되고, 그 정도도 점차 커질 위험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될 후보감으로 점찍혀진 사람은 "저 선생님은 곧 문화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는 기대감으로 모여든 제자들(예비 후보자)에게 판정의 전권을 쥐고 있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로비자금을 부담시키고, 그렇게 해서 '문화재 자격증' 을 딴다. 이때부터는 격(?)이 달라진다. 작품료니, 수강료니 하는 것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예비 후보자들은 그래도 아랑곳없다.
기대감으로 선생 문하에 들어갔고, 그 기대감이 충족된 것만으로도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예비후보자들은 이수자나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전수 조교가 되기 위해 또 심의위원들과 보유자들에게 사례를 한다.
결국 예비 후보자만 골탕을 먹는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예비 후보자들은 문화재의 이수자란 자격만으로 그들의 제자들로부터 그 대가를 지불 받는다. 스승의 작품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작품료니 수강료니 하는 똑같은 명목으로 또 많은 돈을 챙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재의 선정과 보존, 전승의 문제는 온통 돈과 결부된 것으로 비쳐진다. 물론 비인기 종목의 경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위 인기종목의 경우는 한마디로 심각하다.
심의위원들에게 수백만 원 도자기 선물한 인간문화재
이같이 추한 사례가 공공연하게 드러난 예는 많다. 그중 하나만 들어보자. 몇 년 전의 일이다.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받기 위해 문화재 전문위원들과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을 대상으로 로비 자금이 필요했던 한 예술인은 한 젊은 예술가 지망생에게 전국 규모의 국악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주겠다고 언약하고 8백만 원을 받았다.
한 예술인은 당일 대회에서 안면이 있는 심사위원들에게 청탁을 해 약속한 젊은 예술인을 1위에 입상시켰다. 다음해에 그 예술인은 그토록 바라던 '인간문화재' 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러자 그에게는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수강료도 덩달아 뛰었다. 보유자의 이수자가 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아우성이었다.
제대로 수련가정을 거치기보다는 문하에 들어간 지 2년도 채 안 돼 이수자 자격증을 따냈다. 그때부터 태도는 돌변한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기연습조차도 빠지기 시작한다. 보유자는 노발대발한다. 그러나 확실한 보장성 보험을 들어놓은 그 이수자는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1993년에 문화재관리국이 보유자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화재위원들의 심의만으로 보유자 후보자를 선정해 문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그 해 9월 이에 발끈한 김소희, 박동진, 이매방이 주축이 되어 인간문화재의 권익보호와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한국인간문화재진흥회' 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문제가 됐던 보유자 승인에 관해 이수자, 전수자, 전수장학생, 조교, 보유자 후보 등에 관한 선정은 보유자의 승인을 얻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문화재관리국에서는 1994년 6월 중요 무형문화재 운영개선에 대한 공청회를 통해 제도 개선을 꾀했다.
개정된 운영안에 따르면 인간문화재 선정시 문화재위원, 전문위원, 관계 전문가 3인이 공동심사를 거치도록 했다. 보유자나 보유단체의 이수증 발급과 관련해서는 보유자가 전수교육을 실시하고 문화재관리국이 이수증을 발급하던 이원화된 제도를 폐지하고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의 명의로 이수증을 발급하고 이수증 발급 후 즉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토록 했다.
또 이수평가 제도와 관련해 문화재관리국이 심사위원을 구성해 이수평가를 실시해 왔으나 이수자의 기. 예능은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기에 자율적으로 심사토록 했다. 즉 보유자인 인간문화재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명분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보유자의 절대적인 책임이 뒤따라야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이 '인간국보' 에 걸맞는 도덕성과 품격을 갖추지 않는다면 전승과 보존에 있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같은 우려는 제도가 개정된 지 1년 만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1년에 한번씩 있는 전수활동 발표회를 통해 기껏 한 명 정도의 이수자가 선정되든가, 이수자를 뽑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어떤 종목의 경우는 한꺼번에 5명의 이수자들이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종목의 보유자 문하에는 현재까지 무려 22명의 이수자들이 뽑혀 있다.
무형문화재의 경우 보유자 개인이 지정하긴 하지만 심의위원들 앞에서 공개적인 발표회를 갖는다. 심의위원들의 채점표는 공개되지 않는다. 보유자의 참고자료로 활용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이수자가 되려는 희망자들은 별도의 사례비를 준비해야 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쯤되고 보면 '돈으로 문화재를 샀다' 는 말이 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 종목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내 평생의 실수"
우리나라에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진 것은 1964년 12월이다. 155페이지의 (표)에서 보듯이 무형문화재 제1호는 종묘제례악이 지정됐다. 그후 중요 무형문화재는 음식과 무예부문까지 확대되어 1996년 2월 현재 99가지 종목이 지정되어
있다. 보유자 수는 168명이 인정되어 있으며, 보유자 후보, 조교를 포함한 전승자가 18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인간문화재에게는 매월 60만 원의 지원금이 지급되며, 전수교육 실시 및 매년 1회 이상 발표회를 통한 중요 무형문화재 공개의무가 주어진다. 한편, 각 시. 도 지정문화재는 총 159종으로 보유자 수는 217명에 이른다.
금전거래에 의해 움직이는 문화재 전승 못지않게 더 중요한 것은 무형문화재 종목의 지정이다. 지정받을 가치가 없는 종목을 지정할 경우 그 폐해는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
"그 종목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내 평생의 실수였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네." "그 종목의 예술성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어요. 그것 자체만으로는 보존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한 문화재 전문위원과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가 사석에서 털어 놓은 말이다. 지정받을 가치가 없는 종목이 어떻게 지정받을 수 있었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부끄러워하는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종목의 연희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그 페해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음악의 경우는 판소리 기능보유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서 보존하자는 것이 무형문화재보호법의 취지이기 때문에 보존가치가 있는 종목은 연희자가 살아 있을때 지정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 국가 문화재가 될 수 없다는 규정도 개정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애써 연구, 조사해 놓은 종목들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위원들이 전격적으로 교체되면 모두가 무위로 돌아가는 상태에서는 효율적인 행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물교체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지만 적합한 인물이 선정되는 것은 이보다 더 중요하다.
일본의 경우 종목 선정시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엄격함과 신중함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많은 예인들이 그들의 예술성을 남기지 못하고 간직한 채 세상을 떴다.
이제라도 잘못된 지정이 있다면 문제를 제기해 바로잡고, 꼭 지정되야할 종목이 있다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금전이나 안면에 의해 이수자를 배출하는 인간문화재가 있다면 각성해야 한다. 금전을 건넨 바로 당신의 제자들이 훗날 당신을 비난하는 참담함이 두렵기 보다는 바로 역사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문화재' 는 그 '명예' 만큼 '책임' 도 뒤따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객석 1996. 2월호(특집)
글. 장광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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