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님께
안녕하십니까? 분도출판사의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봄바람이 부활이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사순 시기도 벌써 반이 지났고,
사순 제4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지난 편지 탕자의 비유에 이어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루가 16,19-31)를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병을 안고 20년 30년씩 사시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분들의 경우, 가정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다른 사람들은 건강하게 재물도 가지고, 잘도 사는데 왜 나는 한 평생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정말 억울해서 못살겠다’하고 항변한다면, 아마 하느님께서도 대답하시기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지 라자로의 삶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누구는 복을 주어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게 하시고, 또
누구는 복 대신 가난에다 병까지 안겨주시다니...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너는 생전에 복을 누렸지만
라자로는 그만큼 불행을 겪었지. 그래서 지금 그는 위로를 받고 있고 너는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단다.”라고 말합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단 말인가?하는 의문도
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결코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지상의
삶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됩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인간이 너무 억울하게 느낄 만큼 고통을 허락하심으로써, 더 좋은 것, 즉
사랑과 감사의 태도를 배우게 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는 천국에 가니 거지같이 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여기서 부자는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렸기 때문에 자기 욕망을 이기는 포기의 삶을 살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 여기서 건너가려 해도 할 수 없고 거기서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말했는데, 그
구렁텅이는 마음의 구렁텅이였습니다.
라자로는 그 숱한 고통을 통해 아마도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빵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 수 있는 처지에 감사하고, 자신의 종기를 핥아주는 개들을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라자로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기
전에 이미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감사와 사랑을 배우는 것. 이것이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환자이든,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 못 받았다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는 그분의 큰 사랑의 섭리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지금 여기서 결정될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희망사항으로 남기 쉽습니다. 생각을 하되,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내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사랑의 눈이 감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긴 눈을 뜨게
도와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내가 원하지 않는 고통, 내가 겪는 시련들입니다. 그 고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스로 나의 약함을 고백하고
하느님만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큰 믿음을 주십사 남은 사순 시기 동안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도록 합시다.
김정태님 내내 건강하십시오.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