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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의 생각~/안토니오의 시사보기

웰다잉과 납골묘


웰다잉과 납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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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묘객 / 조선일보 DB

아직은 좀 이른 나이인데, 암(癌) 진단을 받고 극복한 친구가 여럿 있다.

최근 함께 모인 자리에서 투병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가 “암에 걸려본 뒤 인생관이 달라졌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암 수술을 받고 7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은 한 친구가 “처음엔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좀 지나니 마찬가지더라”고 말했다. 그는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라고 말 끝을 흐렸다.

이처럼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죽음의 의미를 망각하는데, 평범한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문병이나 장례식에 가보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만 그때뿐이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교회나 절에 가려는 데는 이런 건망증을 피하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神) 앞에 맨몸으로 서서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늘 되새겨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으로 죽음을 애써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 구분지으려고도 한다. 심지어 장례식장조차 산 자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아니라 산 자들만의 소란스러운 교류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최근 성당 내 납골당 설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추기경이 탄 차에 달걀 세례를 퍼부은 것도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분법적 인식이 반영된 것 아닐까.

납골당을 그토록 반대하는 것은 교육 환경이 악화되고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의 민도(民度)가 문제”라는 말이 나왔지만 사실 문제가 있다면 지역 주민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의 의식이다. ‘납골당은 교육에 나쁘고, 집값을 떨어뜨린다’는 집단 의식을 형성한 우리의 공동 책임이다.

얼마 전 호주 시드니를 방문해보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어김없이 고급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주변엔 또 공동묘지가 자주 눈에 띄곤 했다. 가이드는 “경치 좋은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보니 공동묘지 주변 집값이 대체로 비싸다”고 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사이 좋게 좋은 경치를 공유하고 공존하는 문화인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도 도심 한복판 묘지가 낯설지 않으며, 시민이 즐겨 찾는 공원이 되기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엔 웰빙(well-being)이란 말과 함께 웰다잉(well-dy ing)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또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애써 외면하기보다 천천히 죽음의 과정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웰다잉을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죽음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일흔이 가까운 시인 이정옥씨는 죽음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의 시(詩)에서 ‘너 어디쯤 와 있니? 가까이 오면 내게 연락을 주렴’이라고 했다.

이른바 ‘웰다잉 상품’의 하나로 임종 체험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생의 마지막을 경험해봄으로써 나태한 생활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에 충실하겠다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라고 한다.

납골당의 경우도 교육에 나쁜 것이 아니라 사자(死者)와 대화를 나누고, 삶의 깊이를 깨닫는 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추석 연휴 때 우리는 또 차례를 지내고 성묘도 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진정한 소통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