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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의 생각~/우리문화엿보기

한국의 설 (설날)

설은 새해의 첫머리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다. 설은 묵은 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날이며 첫머리다. 설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듯도 하다. 새해에 대한 낯설음, 즉 새해라는 문화적인 시간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속성을 가장 강하게 띠는 날이 바로 설날이기 때문이다. 설은 묵은 해에서 분리되어 새해에 통합 되어가는 전이 과정으로서, 새해에 통합 되기에는 익숙하지 못한 단계이다. 바로 이 점에 ‘설다’는 의미가 내재하고 있다.

설의 의미

각종 세시기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하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새해라는 시간질서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조심하고 삼가해야 된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뜻은 원일(元日),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 라는 말에도 담겨 있다. 원시적 농경민족은 식물의 채취, 재배, 생산의 주기가 자연력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음을 그들의 실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1년이라는 것은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1회 주기를 의미하였다.

한자 ‘염(稔)’의 뜻이 ‘연(年)’에 통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겠고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정세와 사계절을 모르고 다만 봄갈이와 가을 거두기를 익혀서 연기로 삼았다(不知正歲四節 但記春耕秋收 以爲年紀)”고 한 문의(文意)도 필경 역법 이전의 생산력과 자연력의 관련을 잘 지적한 표현이다. 자연력이 생산력을 규제하고 그 생산력에 따라 기년(紀年)이 이루어졌음을 가르쳐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자기 나름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중국인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삼국지》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 달력을 만듬)하였다는 기록에서 미루어보아도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라기보다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 분명히 신라 독자의 명절로 보이는 가위나 수릿날의 습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는 거의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 이외에 우리의 것을 찾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설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는 잡곡재배의 축원의례를 주축으로 하는 상원(上元)이 설이었고, 따라서 모든 연초의 축원의례가 보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벼재배가 보급되어 쌀이 가장 귀한 곡식이 되고, 설날이 제정되면서, 중국에서 수용된 연초의 의례들을 사회상층·관변측에서 원단으로 이행시키면서 반례화(班禮化)하였다.

이에 따라 상원에 집중되어 있었던 모든 연두세시의 축원의례는 원단의 의례와 상원의 의례로 분화되었다. 잡곡재배에 대한 모방주술적 의례인 내농작(內農作)을 비롯한 농경세시가 오늘날에도 상원에 집중되어 있고, 이른바 유교적 의례는 원단에 편재하는 정초의 반례와 민속의 분화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한 해에 대한 적응, 예측의 미숙성, 낯설음은 그해가 시작되는 첫번째날에 가장 강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가 부여되었을 것이다. 그 하루 가운데서도 미숙성과 낯설음이 더욱 강한 시간이 아침이므로 여기서 생긴 말 또한 정조(正朝), 원조(元朝), 원단(元旦) 등일 것이다.

■  동지, 설, 대보름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한다. 설, 즉 정월 초하루에 시작되는 새해의 의미는 정월 대보름까지 지속된다. 여기서 동지, 설, 상원의 시기와 의미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역법(曆法)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지》에 부여족이 이미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경우는 《서경》에 태양력에 관한 기록이 보이나 4,000여년 전부터 태양력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태양력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24절기의 역법으로도 알 수 있다. 24절기는 태양년을 태양의 황경(黃經)에 따라 스물 넷으로 갈라서 계절을 구분한 것이다. 그러나 24절기의 명칭이 남중국에서 형성된 관계로 우리나라의 기후조건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온변화와 농사의 시절 변화의 기준으로는 5년에 2회의 윤달을 만든 태음력보다 24절기의 태양력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은 태양태음력을 사용해온 것이다. 태양력과 태음력의 병용을 근거로 동지, 설, 상원의 관계가 해명될 수 있다

 태양력의 하나인 24절기 가운데 입춘과 동지는 대표적인 명절로 남아 있다. 동지는 태양력에 기준한 명절이고, 설과 상원은 태음력에 기준한 명절이다. 동지가 작은설로 관념되고, 또한 동지를 지내면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고 관념되어왔다.

《후한서》 율력지(律曆志)를 보면 "세수지야(歲首至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세수, 즉 연초를 동지로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동지나 하지는 해그림자가 가장 짧은 때와 긴 때로서, 특히 동지는 역법의 계산기준이 되는 시기이므로 동짓날의 측정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위의 문구에서 후한시대에는 동지를 세수로 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 1년의 12개월의 명칭에 십이지의 이름을 붙여서 동지가 드는 음력 11월을 자월(子月), 12월을 축월(丑月), 1월을 인월 (寅月)…등의 순으로 부르게 된 것도 동지를 세수로 쳤던 시대의 관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지는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태양의 힘이 가장 약화된 날로 인식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낮이 점차로 길어지면서 태양의 힘이 차츰 왕성하여지므로, 동지가 1년의 출발기준이 되었다. 즉, 동지에 태양이 죽었다가 그 다음날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동지를 한 해의 출발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해(태양)의 변화를 통하여 1년 주기를 인식하였다는 것이며, 우리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해’라는 말에는 태양·연(年)·낮시간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태양을 해라고 하고 1년을 한 해라 하며, ‘해가 길다’, ‘해가 짧다’고 할 때의 해는 ‘낮의 시간’을 뜻한다. 이리하여 ‘태양=연’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태양을 통해 1년이라는 시간 주기를 인식하였다는 의미가 이해된다.

동지는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설이 될 수 있었는데, 후대에 작은설로 격하된 이유는 적어도 태양력과 태음력의 선후관계, 즉 태양력문화와 태음력문화의 복합현상에서 추적되어야 할 것 같다. 동지가 원래 설이었다가 차츰 태음력의 설로 대체되어가는 과정에서 작은설로 되었는지, 태음력의 설에 태양력의 설인 동지가 끼어들면서 작은설로 인식되었는지는 더욱 깊은 고찰을 요한다.

그러나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한 데는 태음력 기준의 설에 버금하는 종속적이고 하위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우리민족의 역법은 태음력이 근간이 되어왔고, 그러면서도 24절기에 의한 태양력의 가치도 인정되므로 태양력이 태음력에 종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설날(음력 1월 1일)은 태양태음력에 의한 새해의 출발이다. 오늘날의 음력 정월은 동지에서 두 달 지난 입춘이 드는 달로 되어 있다. 태음력은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한 달력이므로 태양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과는 그 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력에서는 매달의 삭망(朔望)을 양극으로 하는 날짜와 차고 기우는 달의 모양이 정확히 일치한다.

매달 초사흘이면 초승달이 떠오르고, 보름이면 보름달이 솟아오르며, 초하루에는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차고 기우는 달의 모습을 근거로 생겨난 새해의 시작이 설이다. 사람들은 오랜 예로부터 달의 모양과 동식물 및 인간생활의 변화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믿어왔다.

그러므로 달이 없어지면 물리적인 삶이나 한 집단 또는 사회내의 생활이 중지되는 전이기(轉移期)가 된다는 것이다. 정월초하루는 달이 극도로 이지러진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묵은 해와 작별을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전환점이므로 통과의례의 전이기에 해당한다.

기존의 질서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질서에 통합되기 전까지 전이기를 거치게 되는데, 새로운 질서와 상황에 순조롭게 통합되려면 이 전이기를 삼가하고 조심하는 가운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설이 신일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대보름 역시 태음력에 기준한 날짜이다. 보름은 설과 반대로 달이 완전히 차오른 상태이다. 잠복과 죽음의 시기인 그믐이나 초승의 전이기를 끝내고 활동과 활력의 시기인 보름의 통합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설과 대보름이 완전히 별개의 성격을 지닌 명절은 아니다. 설과 대보름을 달의 기울고 차는 상태로 본다면 대칭적이지만, 명절로서의 설과 대보름은 그 사이에 전개되는 각종 세시풍속과 새해의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로 연결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설은 작은 설이던 동지에서부터 정초를 거쳐 설의 대단원인 대보름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정월초하루는 설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설과 농경의례

농경의례란 농업생산의 주기에 따라서 전개되는 신앙적 의식을 말한다. 연중행사로도 일컬어지는 명절도 계절의 리듬에 따라서 전개되지만, 날짜가 고정되어 있어서 농경의례와 생업력(生業曆)의 시작에서 파종·성장기를 거쳐 수확에 이르기까지 풍년을 예축하는 축원과 감사의 제의로 이어지는 한국의 농경의례는 전통적으로 농경생활에 대한 지배적 관습으로 정착되어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설을 전후하여 전개되는 축원의례이다. 동지에서 보름까지 때로는 2월까지 관행되는 농경의례와 이에 수반되는 세시풍속은 대체로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생산의 풍요로운 수확을 상징적으로 축원하는 유감주술적 (sympathetic magic)인 예축적 의례다. 그 대표적인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농작으로 가농작(假農作)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둘째는, 원래는 주로 청소년 집단에 의해서 관행되던 인태(人態) 혹은 동물로 가장한 영격(靈格)들에 의한 도신(禱神), 즉 ‘지신밟기’로 대표되는 것으로 ‘탈놀이’가 그 원래의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는, 1년의 풍요를 점치는 점세(占歲) 의례다. 그 가운데는 직접 곡물의 풍흉을 점치는 주술신앙적 점세행위와 여러가지 편싸움의 승패로써 풍흉을 점치는 의전(擬戰)이 있다. 여러 가지 점년(占年)의 행위와 팔매싸움·편싸움 등으로 불리는 석전(石戰), 동채싸움 (차전놀이), 나무쇠싸움, 횃불싸움 등에서 그 전형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넷째는, 주로 조선시대의 양반·관변측의 사회에서 발달한 풍속으로 그 원류를 중국에 두고 이 땅에 전래하여 발전한 관습들이다. 앞의 세 가지 유형에 다소 동화된 측면도 있지마는 세말의 나례, 새해의 다례(茶禮), 그리고 하례(賀禮)의 관습 등을 들 수 있다.

▶ 주술적 축원의례
모방주술적 축원의례는 유감주술에 원리를 둔 예축행사다. 정월에 그해의 농사가 풍년이 들 것을 가상하여 관행되는 의례적 행사이다.

광복전까지 황해도 장연(長淵)지방에서 행해지던 모의농작은 비교적 자세한 모습을 알려준다. "상원일(上元日) 아침부터 마을 청년들이 산 쪽과 해변 쪽으로 나누어 윷놀이를 하는데 이기는 쪽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윷놀이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마을 광장에 나와서 이앙극(移秧劇)을 한다. 그 극의 진행 중 미리 선발된 산신역의 사나이가 암소를 거꾸로 타고 유관도포 (儒冠道袍)의 차림으로 산 쪽에서 내려온다. 그러면 청년들은 산신을 맞이하여 가무한다. 이것은 모심기를 할 때와 꼭 같은 분장으로 손마다 종이나 짚으로 만든 벼이삭을 쥐고 농악에 맞추어 노래를 하면서 모심기의 흉내를 낸다. 산신은 소 등에 거꾸로 탄 채, 유유히 둘레를 돈다.

모심기가 끝나면 다시 농악에 맞추어서 가무한다. 마을의 남녀노소는 거의 이곳에 모여서 하루를 즐긴다. 산신이 된 사나이는 이 날 하루동안 신과 같이 절대적 존경을 받으며 손윗사람이나 노인도 신에 대해서 불경스런 말을 쓸 수 없다. 산신은 또한 어떤 사람에게도 허리를 굽혀서는 안된다. "

위의 보고는 내농작뿐만 아니라 농경의례의 전반적 구성요소인 곡신내방, 유감주술적 축원, 점세행위, 그밖에 유교문화의 습합양상까지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농작의 예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축원의례로서 최근까지도 경상북도지방의 여러 마을에 남아 있었다.

▶ 가장자(假裝者)
내방관행 청소년집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가면 가장자의 도신 관행이다. 가면극, 탈놀이는 가장자의 내방행사의 원형에 가까운 연희라 생각된다. 탈놀이에서 여러가지 영격(靈格)으로 가장한 청소년들이 촌락의 집들을 방문하여 기복(祈福)·기양 행위를 하고, 금품·음식 등의 향응을 받는다.

기호지방의 거북놀이·사자놀이, 중부지방의 탈춤, 영남지방의 광대놀이, 동부 ·북부의 해안지방에 남아 있었던 처용놀이, 중남부의 걸립, 동해안의 범굿, 특히 영남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지신밟기 ·별신굿 등은 모두가 이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때로는 이 중 두 가지 이상이 복합된 연행들도 보인다.

이러한 가장자의 연행은 정월 외에도 단오·추석, 곳에 따라서는 2, 3, 4월에도 공동오락의 형태로 행해진다. 가장연행의 원초적 형태는 농신(農神), 곡신의 강림을 가장한 의례적 행위로 파악된다.

▶ 점세(占歲)
일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점세는 곡물·천체 등의 양태를 이용하여 직접 점치는 점세와 의전(擬戰)의 승부 등에 의하여 간접 점치는 점세로 나눌 수 있다. 직접적 점세는 한민족이 고대부터 천체와 그 변화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져온 데서 비롯하고 있다. 천체의 변화를 통하여 미래를 점쳐왔던 것이다.

이러한 천체에 대한 관심은 이미 서기전부터 일식을 관찰할 정도였다.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에 보이는 ‘달맞이’, ‘월점(月占)’ 등은 현존 민속의 ‘달맞이’, ‘달불놀이’와 함께 농경의 결과를 예측하기 위한 점세적 행위들이다. 경상남도 고성 지방의 ‘달집사르기’에는 액연(厄鳶)을 같이 사르고, 달집 주위를 돌아가며 가창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때의 가사는 필시 풍요에 관한 예축적인 내용이었다고 생각된다.

전라남도지방에서는 달집 속에 대나무를 넣어서 폭죽같은 소리를 내어 그 음향으로 액을 쫓는다고 한다. 달집이 타는 모양을 보고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달맞이와 달집사르기에 이어서 대개 달불놀이로 일괄해서 불려지는 ‘횃불놀이’,‘횃불싸움’이 있다. 이것 역시 불의 세기에 따라 풍요를 점치는 뜻을 아울러 지닌다.

한편, 〈동국세시기〉에 목영점년(木影占年), 계명점년(鷄鳴占年) 등의 점세법이 보이고 〈열양세시기〉에는 맥근점(麥根占)이 보인다. 목영점년은 대보름날 밤에 한자 정도되는 나무막대를 뜰 가운데 세워놓고 자정 때가 되어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그해 곡식의 풍흉을 점치는 것이다. 즉, 그림자가 여덟치면 풍우가 순조로워 대풍이 들고, 일곱치나 여섯치가 되어도 모두 길하며, 다섯치가 되면 불길하고, 네치가 되면 수해와 병충이 성행하며, 세치면 곡식이 여물지 않는다고 점친다.

계명점년은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 소리를 기다려 우는 횟수가 열번 이상이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점친다. 맥근점은 입춘일에 보리 뿌리를 캐보아서 그 뿌리가 세가닥 이상이면 그해 풍년이 들고, 두가닥이면 평년이고, 한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점치는 것이다.

간접적 점세는 의전의 승부에 의하여 풍흉을 점치는 관습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석전·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경기는 원래 신전에서 행하던,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오신행위(娛神行爲)에서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리고 신전에서 거행되는 경기의 승부는 그것이 곧 신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로 생각된다. 따라서 승자의 편에 그해의 행운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믿음이 민중에 유포되어 마침내는 간접적 정세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석전(편싸움)에 대한 기록은 이미 〈수서 隋書〉 고구려전을 비롯하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등 많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왕이 진두 지휘하여 행하던 수변(水邊)의 석전은 시년식(始年式)의 일부이며 재생의례(再生儀禮)의 뜻이 강하다. 이것은 재생 의례로서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며, 생산력 증대의 목적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물속 혹은 강가에서 석전희(石戰戱)를 행한다. 이것은 강하, 즉 물이 가지는 생산력을 한층 더 증폭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석전의 원초적 형태는 상무적(尙武的) 의례이기에 앞서 선행적으로는 농경의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줄당기기, 줄다리기, 줄싸움놀이 등으로 불리는 색전(索戰)은 수도 재배권에 공통적으로 분포된 점세적 세시풍속이다. 특히, 수도 재배권의 농경사회에서 생산신인 지모신(地母神) 신앙에 바탕을 둔 용사(龍蛇) 신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암줄과 수줄이 교구하는 성행위의 모방주술적 행태를 상징하고 있으며, 생생력(生生力)이 보다 왕성한 소년·여성들에 의하여 선행된다. 줄다리기는 농촌의 축원의례적 오락으로서 정월 상원을 중심으로 주로 고을 단위로 동·서편이 나뉘어 승부를 겨루는 의전이다. 그 승부에서 서쪽(여성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다.

설의 민속관행

정월은 농촌의 생업력에서 본다면 농한기이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기도 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 조건은 이 시기에 모든 식물의 생장을 중단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장의 계절이 오기를 기다리게 한다.

이때는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새생활을 얻기 위한 여러가지 축원, 점세의 의례를 행하는 시기이다. 정월의 제의력(祭儀曆)으로는 1월 1일의 설과 1월 7일의 인날〔人日〕, 1월 8일의 곡식날,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동제·상원·귀신단지날 등을 들 수 있다.

설에 대하여는 신라 소지왕 때 궁주와 중이 공모하여 왕을 해치려 하였는데, 이를 모면한 것은 까치와 쥐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라 하여 정월에 쥐·말·용의 날은 몸을 닦고 삼가는 날로 정하여 전승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도지방에서는 신라시대 미천왕이 까마귀와 쥐와 돼지의 반대로 목숨을 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일지방에는 이날 비가 와서 질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안동지방에서도 ‘설은 질어야 하고, 보름은 말라야 한다. ’고 하여 설에는 비나 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설날은 한민족의 고속(古俗)과 전래된 중국의 민속이 동화되어 하나의 관습이 된 것이라 믿어진다. 고려시대에는 원정(元正)· 상원· 한식· 상사(上巳)· 단오· 중구(重九)· 동지· 팔관(八關)·추석의 구대속절(九大俗節)을 명절로 삼았으나, 조선조의 〈동국세시기〉에는 4명절이라 하여 정조· 한식· 단오· 추석을 들었고, 이에 동지를 더하여 5명절이라 하였으니, 설날은 오랜 전통을 가진 명절임에 틀림없다.

설날이 되면 객지에 살던 일가친척들이 고향으로 모여들고, 어른에게 세배하며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 설날의 세배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사람들의 의례적인 행위이며, 조상에게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였음을 알리는 의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배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덕담’으로 새해에 전개될 새로운 시간의 건강과 복을 빌어주며, 조상의 묘소와 사당에 세배하는 것이다.

설날의 제사는 다례와 성묘로 대별된다. 설날 아침 일찍 사당이나 대청에 세찬(歲饌)과 세주(歲酒)·떡국 등을 진설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라 하고, 조상묘를 찾아가 간단한 세찬과 세주를 차려놓고 예를 올리는 것을 성묘라고 한다. 설 차례는 떡국차례라 하여 떡국을 올리는 것이 상례이며, 그밖의 제수는 기제사와 마찬가지이다. 차례를 지낸 후에는 집안의 남녀노소가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음복(飮福)을 하는데, 장만한 여러가지의 음식을 고루고루 맛보아야 다복하다고 한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가까운 집안끼리 모여 성묘를 한다. 상석이나 소반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서 예를 올린 다음 묘 앞에 둘러앉아 진설한 음식을 음복하고 묘 주위를 살피기도 한다. 이때 어린 자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이야기며, 묘가 위치한 곳의 풍수지리 등을 이야기하여 조상을 기리기도 한다.

설날에는 차례를 위해서 여러가지의 음식을 장만하는데 이것을 세찬· 세주라고 한다. 이런 시식(時食)은 지역과 살림의 빈부 등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떡국과 농주·엿·강정류 등은 거의 일반적이다. 특히, 떡국은 제수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산 사람도 세식(歲食)으로 반드시 먹어야 되는데, 이는 나이와 관련되는 종교적인 음식으로 인식된다.

정월의 또 다른 제의력으로 정월 7일의 인날을 들 수 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으로 보아도, 인날은 중국 전래의 세시로서 주로 조선왕조의 궁중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서는 사람의 생을 축하하며, 잡귀신을 막아 한 해의 질병을 예방하고 해충을 구제하는 날로 믿고 있다.

예컨대 경상북도일원에서는 이 날 가족의 나이 수만큼 쌀을 내어 떡을 해 먹으면 일년 동안 무병하다고 믿는다. 곡식날(정월 8일)은 풍작을 축원하고 점치는 날로 알려져 있다. 이 날 오곡을 볶아 먹으면 그해 곡식이 좀 치지 않고, 떡을 해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안동지방에서는 저녁에 국수를 섞은 수제비를 끓여 먹는다. 수제비는 열매를 나타내고 국수는 덩굴을 의미하는 것으로 빨리 익을수록 그해 농사를 빨리 짓는다고 한다.

또 수수깡이나 호박으로 보리나 나락 모양을 만들어 거름에 묻어두면, 동네 아이들이 거름을 흩어버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때 곡식모양이 쓰러지지 않으면 그것을 태워서 그 재를 도토리 껍질로 측량하여 그 양이 많으면 그해 곡식이 많이 난다고 믿었다. 이것은 일종의 내농작의 형태이며, 옛날 향리에서는 물론 궁중에서까지 성행하였다.

정월의 십이지일도 연초의 주기적인 점세·제액(除厄)·초복(招福)의 의례 행위들이 관행되는 날들이다. 십이지일은 먼저 설날에서부터 열이튿날까지의 일진(日辰)에 의해서 털날인 유모일(有毛日)과 털 없는 날인 무모일(無毛日)로 나눈다.

즉, 십이지에 따라서 일진을 정하니 자일(子日)은 쥐, 축일(丑日)은 소, 인일(寅日)은 호랑이, 묘일(卯日)은 토끼, 진일(辰日)은 용, 사일(巳日)은 뱀, 오일(午日)은 말, 미일(未日)은 염소, 신일(申日)은 원숭이, 유일(酉日)은 닭, 술일(戌日)은 개, 해일 (亥日)은 돼지날이라고 부른다. 이들 동물 중에서 털 있는 동물인 쥐·소·호랑이·토끼·말·염소·원숭이·닭·개·돼지날은 유모일, 털 없는 동물인 용·뱀날은 무모일이라 한다. 설날이 유모일일 때는 오곡이 잘 익어 풍년이 들며, 무모일일 때는 흉년이 든다고 전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상해일(上亥日)과 상자일(上子日)에 궁중에서 환관 수백명이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주둥이 지진다” 하면서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워 주머니에 넣어 재신(宰臣)과 근시(近侍)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모두가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또, 상자일에 시골에서는 콩을 볶으면서 주문을 외우는데 “쥐주둥이 지진다. 쥐주둥이 지진다. ”고 하였다.

옛날에는 간지일마다 심한 금기가 따랐으나, 오늘날에는 약화되거나 소멸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통적 유습 중에는 첫 축일에 솥 안에 놋그릇을 넣어 음식을 태워 먹으면 소가 큰 연장에 다친다고 하여 금한다든가, 첫 묘일에 여자가 먼저 남의 집 출입하는 일을 금하는 등의 풍속이 남아 있다.

정월 3·4일에서 상원에 이르는 사이에 대부분의 마을들은 동제를 지낸다. 동제를 지내는 목적이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평안과 각 가정의 안택(安宅)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제의의 내용 및 풍속에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가령, 그 명칭을 해안지방(영덕·울진)에서는 ‘골매기 고사’ 등으로 부르는가 하면, 내륙지방에서는 당신제· 동신제· 동제· 동고사· 당제· 성황당제 등으로 부른다.

제일(祭日)도 대부분 정월 보름날로 하지만 1월 14일, 2월 1일에 지내는 곳도 있다. 또, 한해에 1회 지내는 곳이 대부분이지마는 연 2회 또는 3회 지내는 곳도 있다. 가령, 동해안지방에서는 대부분 연 2·3회의 동제를 지내는데, 제일을 보면 정월보름, 유월보름(신곡제사), 시월의 길일(吉日, 가을신곡제사)에 제사지낸다. 여기서 정월 보름의 동제는 대표적인 축원, 점세의례이며, 유월 보름은 밭작물의 수확의례, 시월의 동제는 벼농사의 수확의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이밖에 동제의 대상인 신체(神體:당나무, 당집, 바위 등), 금기의 표지물, 제수, 제사절차 등의 차이점도 나타난다. 상원(대보름)은 신농씨에게 풍년을 기원하고, 달에게 풍년을 빌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날로 믿는 날이며, 가장 많은 민속연희들이 집중되는 명절이다. 대보름날 아침에는 오곡으로 밥을 지어 먹고 김, 두부, 취나물, 콩나물 등을 먹는다. 아침에 찰밥을 지어 성주(成主)에게 바치고, 이때 성주에게 바쳤던 술을 ‘귀밝이술’이라 하여 마신다.

설은 떡과 떡국으로, 보름에는 오곡밥으로 의례행위가 행해진다. 잡곡 재배와 수도재배에 기반을 두는 한국 기층문화의 투영이다. 이때 팥이 문제가 된다. 팥은 설의 시루떡에도 보름의 잡곡밥에도 불가결의 곡물이기 때문이다. 팥의 원산지는 한국에 수도재배를 이식한 화중지방이며, 팥은 수도재배에 선행하는 화전경작민의 문화의 소산이다. 뿌리깊은 주술종교적 의례식품인 팥은 떡에서나 오곡밥에서나 불가결한 곡물이다.

따라서, 화전경작시대부터 원래는 오곡밥에 쓰인 팥이 쌀의 문화에도 곁들이게 되고, 시루떡에서 변용된 모양으로 두꺼운 쌀가루 사이사이에 깔리게 되었을 것이다. 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부스럼 깬다’ 하여, 알밤, 호두, 은행, 콩자반 등을 깨물며 ‘일년 열두달 동안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사. ’고 축수한다. 그리고 아침 식사 후 소에게 오곡밥과 나물을 먹여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점친다.

이밖에 아이들은 정초부터 보름까지 연날리기를 하여오다가, 대보름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자 하나를 쓰기도 하고, ‘송액(送厄)’, ‘송액영복 (送厄迎福)’ 혹은 ‘모가모생 신액소멸(某家某生 身厄消滅)’이라고 써서 띄우다가 해질 무렵에 그 연줄을 끊어버린다. 그해의 재액을 쫓아보내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축원·점세적인 성격을 띤 보름풍속은 궁중이나 관아, 양반계층 등 사회상층의 관습이 아니라, 서민사회에서 민중의 큰 명절로 존속 유지되어온 것이다. 이 점은 세시풍속이 사회계층적으로는 이중구조를 가진다는 암시를 주기도 한다. 결국 대보름의 모든 민속사상(民俗事象)들은 기복·축원·제액이라는 민속신앙적 행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신단지날(16일)은 집안에 귀신이 내왕하는 날이라고 한다. 이날에는 출입하는 귀신을 막아 그해의 액을 방지하려는 온갖 제액행위가 관행된다. 따라서, 귀신단지날의 행사는 제액·초복(招福)을 목적으로 하는 제의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주기적 의례행위이다.

본래 주생업이 농사인 한국의 마을사회에서는 농한기인 정초에는 돌아오는 한해 동안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축원·점세 등의 제의행사 이외에 같은 목적을 가진 갖가지 민속유희들이 행하여졌다. 윷놀이, 널뛰기, 농악, 연날리기 등의 공동오락은 친척과 동민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계기가 된다. ‘지신밟기’ 등 동제에 따르는 여러가지 연희가 설과 보름 사이에 성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동오락이나 연희는 집약적 노동을 요구하는 농경사회의 촌락에서 두레나 품앗이 등의 협동체계를 구현하는 모태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설

설이 되면 신문·잡지·방송들은 다투어서 보도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언론매체들은 ‘양력설’에 치중하여 보도하고 있다. 양력설을 국가에서 제도화해온 때문일 것이다. 양력설이 되면 신문·잡지들은 현대판 세화(歲畵)를 비롯하여 현대판 덕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두시, 각계 인사의 신년사를 싣게 된다. 전통적인 설에 대한 의미와 기능·원류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바뀐 데 대한 소감, 새해에 부치는 기대감, 12간지에 의한 해당연도의 동물의 속성, 정계나 각계 기관장들의 신년인사 등이 주가 된다. 이때부터 신춘문예의 당선작도 발표된다.

‘음력설’의 경우에는 양력설과 자못 양상이 달라진다.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행하여지던 연행(演行) 민속예술들을 비롯하여 세배, 설빔, 세화, 다례 등에 대한 현장감 있는 사진과 해설이 실리게 된다. 전문학자의 해설과 전승과정, 그 계승의 방법, 원류, 본래의 의미와 기능 등에 대한 내용들이 재현된다.

그러나 브라운관을 통한 민속축제에는 민중이 직접 참여하여 체감하는 굿판이 없다. 따라서 실생활에 밀착된 민속이 아닌 모방된 민속예능들을 보이게 된다. 설의 재정착과정이 보이는 과도적 양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산업화 과정의 피할 수 없는 경향이기도 하다.

농경문화는 민족사의 상한에서부터 민족문화의 기층이 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상공업국가로 전환됨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과정에서 1976년에는 도시인구가 50%를 넘어섰고, 1982년에는 60%를 웃돌게 되었다.

농촌인구의 도시집중, 상공업으로의 전환은 세시풍속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민이 농업력의 주기인 1년 단위로 생활해온 데 비해, 도시인들은 연·월·주의 삼원체제의 생활주기에 얽매인다. 이들에게 있어 주말과 공휴일의 휴식과 행락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통적인 명절과 동일한 차원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아직도 농민의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멀리 두고 생각하던 고향을 큰 명절에 찾아가 눈으로 보고, 선영을 찾고, 제사를 받들며 그리던 부모형제, 이웃과 친지의 체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설과 한가위는 ‘민족 대이동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설은 원래 조상숭배와 효사상에 기반을 두고 먼저 간 조상신과 산 자손이 함께 즐기는 신성기간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도시생활과 산업사회의 강박감 긴장감에서 일시 해방될 수 있는 날이다. 설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됨에 따라, 이런 의미가 더욱 강하게 전승될 것이다.

양력설과 음력설

중국의 경우 세시풍속의 기준이 되는 역법을 가장 먼저 태음력으로 체계화하였다. 중국은 양력으로의 개력(改曆)이 가장 늦어 1912년에 공표하였다. 대만은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를 개국기념일로 명명하고 있다. 1911년 10월 10일에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1912년 1월 1일을 정식 개국일로 삼았으며, 1월 1일부터 3일까지 모든 관공서가 쉰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양력 정초보다 음력설이 훨씬 성대하다. 음력 정초의 3일이나 5일 정도를 쉬는 것은 보통이고, 예전에는 15일간 또는 30일간도 쉬었다. 그러나 중국은 1949년부터 양력 정월초하루를 신년 휴일로 하루 쉬고, 음력 정월초하루부터 4일까지를 춘절(春節)이라는 이름으로 쉰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872년에 태양력을 채용하고부터 음력에서 양력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완전히 양력만으로 과세하고 모든 생업력도 양력에 따르고 있다. 그들은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를 ‘국민의 축일’이라는 명칭으로 공휴일로 제정하고 있다.

설이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 명확하게는 알 수 없다. 《수서》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도 구대속절(九大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었고, 조선시대에는 4대명절의 하나로서 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설의 수난은 일제시대에 시작되었다. 우리의 설을 빼앗긴 1930년대는 우리말, 우리글,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시기였다.

광복 후에도 양력이 기준력으로 사용됨으로써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지속되어왔다. 1989년까지만 해도 양력 1월 1일부터 3일간이 공휴일이었다. 음력설인 고유의 설이 '민속의 날’로 단 하루 공휴일로 되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없는 공직자들은 양력의 3일간의 연휴 때, 차례를 모시고 세배도 드리고, 선물도 교환하며, 집안도 회동하였다. 또한, 각 관공서나 직장들도 1일에 신년하례식을 하고, 신년 시무식을 양력설 3일간의 연휴가 끝난 4일에 하였다.

이와같이, 양력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도 연속되어 크게는 정부와 사회상층 주도의 의례행사와 그에 따르는 공공적이고 관변적인 세시풍속을 형성하였다. 이리하여 민족 고유의 설을 이중과세라는 명목하에 오랫동안 억제하여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민의가 반영되어 1985년에 비로소 ‘민속의 날’이라는 어색한 명칭으로 나마 부활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1일 정부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고쳐 음력 1월 1일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지정, 시행함에 따라 종래 양력과세를 하던 사람들도 대거 음력과세로 되돌아오고 있다.

되찾은 설은 원래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명절 중의 명절이며, 1년 중 가장 신성한 날이었다. 설의 분위기는 달빛, 불빛과 더불어 온 백성이 즐기던 대보름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설날에는 차례 ,세배 등을 통해서 혈연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즉,  설은 상하관계와 이웃관계, 혈연, 지연의식을 다시 가다듬어 생산을 촉진하고 사회를 결속시키고, 소속을 재확인시켜주는 명절의 뜻이 가장 풍성하게 나타나는 명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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