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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이해~/신앙상식

[역대 공의회를 배운다]<2>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체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라는 두 차례의 세계 공의회를 통해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과 관련해 일어나던 수많은 이단 논쟁을 종식시키고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했다.

 

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에게 나온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하느님과 동일할 수 없다는 주장을 거슬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한 하느님을 믿을 교리로 선포함으로써 분열로 치닫던 교회를 일치의 길로 이끈 것이다.

 

삼위일체 신학은 해결되었지만 분쟁의 불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존재하는 동시에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그리스도론에 집중돼 있었는데, 이를 두고 두 가지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일치해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소 아시아의 안티오키아 학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구분되어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인간 예수는 근본적으로 범죄할 수도 있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결합은 ‘의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마치 성전 안에 하느님이 거처하시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의 핵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네스토리우스(381∼451)다.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던 381년 소 아시아의 안티오키아(오늘날의 터키)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안티오키아의 한 수도회에 입회, 안티오키아 학파의 사상에 심취했다.

 

수도회 사제로서 뛰어난 설교로 이름이 높았던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자리에 오른 뒤 정통 교리의 수호자를 자청하며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선봉에 서게 된다.

당시 교회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분을 강조하던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했던 네스토리우스는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성모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갖춘 분이지만 성모는 인간 예수만을 낳았기 때문에 인간 예수의 어머니는 될지언정 결코 하느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교회의 정통 교리를 대변하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당시 교황이던 첼레스티노 1세(재위 422∼432년)의 지지를 얻어 430년 알렉산드리아 주교회의를 열고,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게 된다.

 

이에 네스토리우스는 반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파문하고, 세계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최된 것이 바로 제3차 세계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431년)다.

431년 6월22일 성령강림대축일 에페소(오늘날 터키의 셀주크)에 모인 주교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거슬러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온전한 결합을 이루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이를 낳은 성모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정통 교의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자로 단죄되면서 주교직도 박탈당하게 되었고, 공의회 이후 유배생활을 하다가 451년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에페소 공의회는 니체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이후 교회를 뒤흔든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란을 일시에 종식시키면서 나아가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규정하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학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