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 안나
최근 생활 속에서 큰 기쁨을 얻어가고 있다. 성모상 앞에서 딸이 보내준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하는 즐거움이다. 기도의 내용이야 늘 내 자식이 잘 되게 해달라는 것과 나를 병마에서 해방되게 해달라는 것이지만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의지가 되고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기실 나는 일흔 다섯이나 살았으니 살만큼 살았다. 늙으니 마음 한 구석이 꼭 한 겨울을 앞둔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 같기만 하다. 아침마다 앞산을 오를 때면 작은 암자를 지날 때마다 내 딸을 위해서 축원을 올렸다.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가는 것 외에 지금까지 별다른 종교가 없었다.
나는 타고난 기질이 예민하여 걱정이 그칠 날이 없다. 늘 내 안엔 불안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쉽게 용서를 못하고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가 괴로운 만큼 어느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나면 내가 못견디게 괴로우니까.
인간의 원죄가 질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매일 감아도 금방 기름이 돌아 또 감아야 하는 머리칼처럼, 잘라내도 또 잘라줘야 하는 손톱처럼,.....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안에 든 죄를 닦고 또 닦으며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작년 중반 쯤부터 딸아이가 변하기 시작해졌다. '우리 아이가 바뀌었어요'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자꾸만 딸아이가 떠올랐다. 무엇이 우리 애를 변하게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예전과 달리 내가 어떤 노파심을 드러내도 즉각 반응을 하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딸의 목에 걸린 작은 목걸이가 예쁘다고 했더니 망설임없이 빼서 내게 주었다.
"성모님의 기적 패라는 건데. 엄마 가져."
"이기, 마리아라 카는 뭐 그기가?"
작년부터 딸의 목걸이를 걸고 다녔다. 딸은 그때도 성당에 다니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아니,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귀담아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딸은 나의 안 좋은 기질을 그대로 빼닮아 미리 아파하는 성격이다. 무엇 때문인지 항시 자기 응시 속에서 싸움을 치열하게 하는 얼굴이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위태롭고 섬세한지 나는 딸 아이 때문에 '한 걱정'을 하면서 살았다. 유난히 가을병이 심해 방문을 닫아 걸고 힘들어하는 날들이 있어 가을만 되면 우리 부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도 나이가 들었다. 세월 탓일까. 내 딸의 성격이 느긋하고 눈에 띄도록 차분해졌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보살처럼 변해가는 딸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그 후 작년 추석에 다시 내려왔을 때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친척 오빠들이 딸에게 술을 권했다. 소주 두 세 병은 눈도 깜짝하지 않던 딸 아이가 그날은 술이 당기지 않는다면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오빠들이 왜 안 마시냐, 다이어트 하냐고 묻자, 아이는 "성당에 다니고 부터 술이 저절로 싫어지네" 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아하! 하고 내 딸이 성당에 다닌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다. 눈빛이 차분하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크게 불안해하지 않는 아이가 정말 고마웠다. 딸을 서울로 보내놓고 무엇이 우리 아이를 변하게 했을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종교의 힘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딸만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시도때도 없이 세상을 향해 막 소리치고 싶었다. "우리 아이가 바뀌었어요", "우리 딸이 달라졌어요!"라고......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내 딸을 그렇게 바뀌게 해준 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인 안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아침, 내 발로 성당을 찾았다. 누가 데리고 간 것도 아니었지만 가겠다고 작정을 하자 어렵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지만 저절로 발걸음이 성당으로 옮겨졌다. 가까운 성당으로 들어가서 아무나 붙잡고 오늘 처음 왔노라고 했더니 예쁜 아주머니 한 분이 성당 안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무척 성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음악이 울리고 합창을 하듯 기도문을 외치며 사람들이 일어섰다, 앉았다 했다. 그들을 따라 엉겹결에 일어섰다 앉았다 하다보니 뭘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천주교에서 <미사> 라고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날 이 후 화요일마다 교리공부를 하고 있다. 수선화 같이 생긴 수녀님이 교리를 가르치는데, 목소리가 얼마나 작은지 칠순 노인의 귀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수녀님이 내게 질문이라도 할까 겁이나 살포시 숨죽이고 있다가 온다. 성당엔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이 나이에 공부라니.... 겨우 천신만고 끝에 외운 것이 '주의 기도' 달랑 하나다.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너무 어렵다. 사법고시도 이보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일요일 마다 미사를 빠지지 않고 본다. 다른 사람들이 예쁜 미사포를 쓰는 걸 부러워 했더니 딸아이가 얼른 그걸 사서 보내 왔다. 그보다 앞서 교리를 배운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모상부터 시작해서 아기 예수님상과 고상, 묵주, 촛대와 초까지 택배로 하나 가득 보내왔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합창단의 찬송을 들으면 가끔 눈물겹다. 일주일에 두번씩 왔다갔다 하는 동안 우울한 기분도 조금 없어지는 것 같다. 천주교에는 어떻게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절제와 겸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우선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 좋다. 또, 다른 종교처럼 열렬히 환영을 하지 않는 것도, 떠들썩 하지 않는 것도 내 맘에 든다. 암튼 천주교는 육중한 돌솥처럼 은근히 뜨거워지는 무엇이 있다.
성당에 다니면서 내가 장 탄식을 하는 일은 장동건 보다 더 잘 생긴 젊은 신부님 때문이다. 그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미사 때마다 사람들에게 동그랗게 생긴 동전 만한 것을 모두 입 안에 넣어주는데, 나는 세례를 받아야 받아 먹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 맛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딸 아이는 전화 때마다 내 말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아하하' 하고 웃어댄다. 수녀님이 미리 지어주신 내 세례명이 '안나'라고 했더니, 하루는 시침을 뚝떼고 목소리를 바꿔서 "김 안나 자매님 계신가요?" 해서 나를 깜짝 놀래키기도 한다.
딸아이의 세례명이 '젬마'라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세례명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으니, 뭐든 알아야 면장을 할 게 아닌가. 그나저나 주의 기도 말고 다른 기도문은 죽어도 못 외우겠으니 신부님이 세례를 주실지 걱정이다. 딸 아이는 할머니들은 다 못 외워도 괜찮으니 걱정을 붙들어 매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례는 꼭 받아야 한다고 한다.
며칠 전, 딸 아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심금을 울리고 있다.
"울 엄마 세례 받는 날, 나 많이 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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