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우리 장단에 맞춰 성가를 부르고 연주하는 집단 ‘우리맥소리’(대표 최지애 미카엘라, 56세)를 찾았다. 사성부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음악과 달리 순수한 우리 가락을 고집하는 ‘우리맥소리’는 가야금, 해금, 대금, 피리, 아쟁, 장구 등을 반주삼아 2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성가대원들이 모여서 2000년 3월에 서울대교구 행운동성당을 중심으로 전례음악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전통민요 가락에 성경에서 빌어온 가사를 붙여 성가를 불렀는데 주변에서 반발도 많았다. 이른바 민간에서 쓰던 음악을 미사에서 성음악으로 사용하는 걸 꺼려했던 탓이다. 실제 민요라는 게 야한 대목도 많아서 가사만 바꾼다고 성음악이 되냐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흑인영가가 노예살이 하던 흑인노예들의 애환을 담고 있지만 성가로 손색이 없듯이, 민요란 우리 겨레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어서 관점만 달리 한다면 겨레의 믿음살이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겨레의 심금을 울리는 성가가 되지 못한다는 법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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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행운동성당에서 국악성가를 연습하고 있는 우리맥소리 회원들. 성가를 연습할 때는 최지애 씨가 직접 하기도 하지만, 미사전례에서는 지휘자 없이 성가대원들이 자연스런 호흡에 따라서 성가를 부른다. |
우리는 우리 소리로 하느님 만나야
전례의 토착화 차원에서 국악성가가 한국교회에 도입되기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 정착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데, 국악성가운동에서 ‘우리맥소리’를 설립한 최지애 씨는 특별히 우리 창법대로 ‘진성(眞聲)’을 낼 수 있는 성가를 작곡해 왔다. 서양음악은 대부분 두성이나 가성을 내려고 애쓰는 데 반해, 우리 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듯이 부르도록 돕는다.
“서양 클래식을 듣다보면, 디지털 프로그램처럼 직육면체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단절음의 연속으로 들리는데, 음과 음 사이가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 국악은 음과 음 사이를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선으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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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애 씨는 우리 성가는 우리 소리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
최지애 씨는 “성가도 일종의 기도인데, 기도를 가성으로 하지는 않는다”면서, “찬양도 읊조리는 것처럼 부르면, 더 진솔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의 신앙이 자생적인 신앙이라고 자랑하면서, “왜 성음악은 우리 소리로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실상 ‘연도’를 드릴 때에도, 최근에 정형화된 표준곡을 정해 두었지만, 사실은 지역마다 다 곡조가 틀리다면서, “우리말도 사투리를 빼면 개성이 안 살아나듯이, 연도도 제 색깔을 지니는데, 거기서 여유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른바 국악은 음정이 서양처럼 자로 재듯이 나오지 않고, 음간 역시 때로는 좁고 빠르게, 때로는 넓고 느리게 호흡에 따라 변화된다. 이를 두고 최지애 씨는 “국악은 인간 본성에 맞추어 부르는 자연미를 지녔다”고 말했다.
게다가 우리 소리는 서양인의 문화와 달라서, 아무리 판소리를 잘 하는 외국인이라도 제 맛을 내기가 어렵고, 가야금을 튕겨도 피아노 치듯 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우리 발성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소리로 우리 정서를 담아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국악은 기생이나 하는 것이야!”
최지애 씨가 국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부터였다.
“어릴 적에 미군들이 트럭 타고 지나가면 아이들이 쫓아가며 ‘기브미초코렛’을 연발했죠. 그 흑인들은 덩치가 컸는데, 한국인들은 그네들에게 함부로 못 했어요. 꼼짝 못한 거죠. 그래서 어린 마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비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면서도 정치적 소란이 많아서 늘 나라가 어수선했었죠.
이 당시 학교에서 글을 써도, 선생님들은 진하게 잘 써지는 미제연필로 쓰면 동그라미에 별 다섯 개를 주었는데, 질 나쁜 우리나라 연필로 쓰면 성적을 제대로 쳐 주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선 국산품 애용하라면서 이건 뭐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책에 모짜르트, 베토벤은 가르치는데, 국악 분야는 달랑 가야금이나 장구 그림이 나올 뿐 가르치지도 않았죠. 우리 것이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시절인 거죠.”
최지애 씨는 우리 것을 알고 남의 것을 더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그 반대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리고 “왜 우리는 자랑할 만한 우리 것이 하나도 없을까? 이게 무슨 나라지?” 생각하며, ‘우리 걸 뭔가 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니, 국악을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다들 반대했다. 어느 선생님은 “국악은 기생이나 하는 거야”하며 야단쳤고, 최지애씨는 그 말에 부아가 끓어올라 “선생님, 우리 것이 그렇게 창피하세요?”라고 대꾸했다.
결국 가족들의 반대도 물리치고 고집을 부려 ‘이왕직아악부’에 이어 세워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나라에선 남녀 중학생 20명 씩 국비로 국악을 공부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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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악보. |
국악은 방중(房中)악기, 가야금 개량에 몰두해
국립국악고등학교와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성신여대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최지애 씨가 국악을 하면서 가장 고민한 것은 ‘국악기는 공연장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대에 가야금이 10여대가 있어도 소리가 객석에 닿지 않았다. 피리나 태평소를 불어야 소리가 전달되고, 그마저도 꽹가리 등 사물이 들어서면 들리지 않는다. 가야금 등 국악기가 기존의 극장식 무대에 맞지 않은 것은 방안에서 연주하던 ‘방중악기’였던 탓이다.
가야금 등 우리 악기는 울림통이 바닥에 있어서, 방에 앉아서 명주실을 뜯으면 소리가 허공으로 날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서 음양이 마주쳐 소리를 낸다. 그런데 무대 의자 위에 앉아서 가야금을 뜯으면 소리가 닿을 바닥이 없어서 소리가 모두 달아나 버린다. 본래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 소리는 방안에 머물고, 그 소리가 이윽고 문풍지를 울리고 퍼지면 그 소리가 이를 데 없이 아름답다. 이럴게 공명하는 소리는 울림성이 좋아서 대청마루에 앉아서 뜯으면 마루짝 틈새로 소리가 내리고, 흙과 나무와 종이로 이뤄진 한옥 자체가 울림통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울림판이 없는 무대에서 국악기는 그저 ‘띵’하는 소리만 낼 뿐이어서 제 맛을 살릴 수 없다.
그래서 최지애 씨는 여러 차례 ‘무대’를 국악연주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과 KBS국악관현악단에 취직을 했는데,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최지애 씨가 몰두한 것이 악기개량이었다. 무대를 고칠 수 없다면 악기를 손봐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단체가 ‘한국음악발전연구원’이다. 여기서 동료들과 더불어 명주실로 연주하는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 등을 다루었다. “명주실 소리는 철사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행운동 성당에서 시작한 국악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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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애 씨는 가장 어려운 가운데 국악성가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행복해졌다. |
최지애 씨가 2000년에 ‘우리맥소리’라는 국악성가대를 만든 것은 순전히 개신교 신자였던 제자의 학부형 때문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최지애 씨는 개신교에 다니는 제자의 학부형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그 아까운 재주를 갖고 왜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 제자는 최지애 씨로부터 배운 실력으로도 교회당에서 반주봉사를 한다는 거였다. “하느님께 은혜를 받아놓고 그걸 하느님께 바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응답하기로 결심했다.
가르치던 제자들과 더불어 국악성가대를 만들기로 했는데, 다행히 당시 남아있던 제자들 십여 명이 모두 가톨릭신자들이었다. 이를 두고 천운(天運)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들은 당시 대부분 냉담중이었는데, 국악성가를 하게 되면서 신앙이 돈독해졌다.)
이재을 신부의 도움으로 서울대교구 행운동 성당에서 매주 주일 낮 2시에 국악미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다. 신자들이 처음엔 어색해 하였지만 매주 계속되는 국악미사로 익숙해지고 좋아했다. 이 당시 최지애 씨가 이끌던 ‘우리맥소리’는 매주 미사 때마다 성가곡을 준비하면서, 기존 민요에다 성경구절 등을 찾아서 가사를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락과 장단에 가사만 바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써먹을 전통음악이 동이 나고, 부랴부랴 작곡을 시작했다. 다행히 생각하지 않았던 곡들이 쏟아져 나왔고, 2006년에는 <가톨릭국악성가>집도 만들 수 있었다.
명동성당에서도 기회를 얻었다. 당시 최호영 신부를 만났는데, 명동성당에서 매주 토요일에 성음악미사를 하게 되면서, 첫 번째 주말에 국악미사를 하게 되었다. 이 명동미사는 2년 넘어 계속되었다. 그러다 주임사제가 바뀌면서 성음악 미사 자체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명동성당에서 국악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컸는데 아쉬웠다. 성가대는 이층에서 연주하고 노래했는데 성당 구조상 울림이 아주 좋았다”며 아쉬움을 남겼다. ‘우리맥소리’는 창단한 지 벌써 11년째 접어들었는데, 요즘은 독립문 무악동 선교본당, 둔촌동 보훈병원, 낙성대성당, 행운동성당에서 국악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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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국악성가> 우리맥소리, 2006. |
내 안에 계신 하느님 발견하게 만든 국악미사
최지애 씨는 국악성가를 하기 전에는 ‘하느님과 사이가 멀었다’고 고백한다. 그분은 늘 계시다고는 생각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애 수준이었다.
“대학시절에 학교에서 데모도 많이 했어요. 데모하다가 새로 산 구두끈이 끊어진 적도 있었죠. 그러면서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가난한 이들이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안타까울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죠. 여러 이유를 붙여 보았지만 분통이 터질 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리의 연속인데도 잘 살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과연 하느님이 계신지 묻곤 했죠. 성당에서 멍청하게 십자고상만 쳐다보곤 했죠.”
그런 최지애 씨가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국악성가를 시작하면서였다. 전통음악에 가사를 새로 써넣어야 하니 성경을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늘 평화방송 TV를 켜 놓고 살았다. 한 일 년을 그러다 보니, 성경말씀이 가슴 속에 들어와 박혔다. <가톨릭국악성가> 31번 “너희는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귀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도 먹이를 주시니 먹을 것 걱정하지 말아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분의 의로움 찾으면 모든 것 곁들여 받으리라...”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생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해도, 국악성가운동으로 오히려 없는 곳간이 더 비더라도 ‘걱정하지 마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성가를 만들며, 하느님과 더불어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성가를 자신이 작곡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 먼저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곡도 나올 수 없다”는 거였다. <가톨릭국악성가>에 담긴 성가가 219곡이나 된다. 최지애 씨는 이게 모두 그분 작품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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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성가운동을 하면서 겪는 실패도 성공도 ‘다 그분이 하시는 일’이니, ‘나는 걱정이 없다’는 게 최지애 씨 생각이다.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훤히 아시는 분이니 걱정할 것이 없는 법이다.
“하느님 당신께선 나를훤히 아시어 앉아서도 서있어도 저의생각 봅니다 걸을때나 누워서도 모든행실 아시어 앞과뒤를 막으시고 그위에 계시네
그아심 놀라운데 어느곳에 가리까 새벽날개 붙잡고서 동녘으로 가서도 바다끝의 서쪽가서 보금자리 잡아도 당신손이 붙드시어 나를 인도 하시네” (가톨릭국악성가 214번 1~2절)
최지애 씨는 국악성가로 봉사를 하면서, ‘봉사할수록 신앙심이 커짐’을 깨달았다. 더 행복해지고, 나눌 줄 알게 되고, 더욱 큰 깨달음은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었다.
최지애 씨는 이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물론 함께 있으면 더욱 좋지만. 예전에는 성당에 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든 그분과 함께 있는 것 같다. 하느님의 영이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심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성체를 모시듯 ‘그분이 내 안에 계시네’하고 느낄 때마다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솟는다. 그리고 “그래, 그걸 믿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해”라고 말한다. “나쁜 짓 하다가도, 그러면 하느님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계시네”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로 잡게 된다고 고백했다.
*오는 11월 19일 오후 4시부터 서울 돈암동에 있는 성공롬반외방선교회 선교센타 성당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주관하는 '국악미사'에서 '우리맥소리'가 참여하며, 미사 후 최지애 씨와 대담이 마련되어 있다. (문의: 070-8292-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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