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과 함께~/사물놀이 방

이광수와 김용배 이야기 - 옮긴 글

*****이광수/ 비나리, 상쇠 *****

민족음악원 원장, 국악협회 이사, 중앙대·한서대 출강

1952년 충남의 예산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전문연희패(남사당패)를 이끌던 그의 부친 이점식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풍물과 함께 생활하며 남사당패 행중으로 활동하며 타고난 예술적 천재성을 발휘하게 된다.

남운용(남사당 꼭두쇠), 최성구(남사당 상쇠) 등의 대가들로부터 꽹과리,장구를 사사받았고, 차기준, 황금만(남사당 비나리)선생께 비나리를 사사 받았으며, 전통예술의 공연을 통한 실제적 체험 속에서 성장한 그는 1962년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하는 등 일찍이 그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전국의 곳곳에서 공연 활동을 계속하던시절 그는 깊고 무한한 우리 전통예술의 각 부문에 심취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타고난 감성으로 그것을 소화해내 자신의 내면세계 속에 깊게 간직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예를 익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그의 피나는 노력은 오늘날 어떤 무대나 어느 장소에서도 관객을 사로잡는 마력으로 승화되었다.

사물놀이의 앉은반 중에서 펼치는 그의 쇠가락은 가히 일품이며 특히 살풀이, 액풀이, 축원 덕담〈비나리〉등 각종 소리에서도 세계 최고의 예술성을 볼수 있으며 지구촌 방방곡곡에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광수의 비나리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독특한 개성으로 창출해 내는 풍부하고 심오한 소리와 가락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 받을 수 있으며 판굿에서는 상쇠놀음을 할 때에 펼치는 각종 부포놀음과 상쇠발림, 까치 놀음 등을 통하여 이미 그의 몸짓과 흥에 합일되어 버린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후 사물놀이의 중요한 과업이며 보람이기도 한 인재의 발굴과 양성에 기여하고 있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버슴새가 안정되고 신명을 안으로 다지는 기질로 그의 노력과 성실이 가져다준 밝은 미래를 우리에게 예견케 해준다

이 광 수 의 예 술 세 계


북 장구 징에 달통한 최고의 꾕쇠
북이 구름이고 장구가 비라면 징은 바람소리다.
사물중에서 꾕과리는 뇌성벽력에 비유된다.
혼신을 다해 신바람나게 두드려야만 산맥 하나가 태어나고 바다가 숨을 멈춘다.
이 시대의 최고의 꽹쇠는 두말의 여지없이 이광수라 할 수 있다.
그의 꽹과리는 어느때는 흐르는 계류와 같고 장단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만의 타법으로
인간의 고통과 환희, 고뇌와 한을 능란하게 다스린다. - 이세기의 인물탐구 -

천부적 '광대' 비나리의 '명인'

이광수는 꽹과리뿐만이 아니라 박동진옹에게서 찬사를 받은 비나리도 일품의 경지에 다달았다. 91년 사물놀이패가 발전적 해산을 하기까지 100여국에서 600회 이상의 공연을 했고 혼자 독립한 후에도 100여회 이상의 공연을 해오고 있다.

뉴욕타임즈에 예술평론을 기고하는 제니퍼 디닝은 "꽹과리 소리는 지구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소리, 블랙홀이 따로없다. 그의 가락에 무한하게 빠져든다"고 표현할 정도니 '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뜬쇠중의 뜬쇠'라는 뜻의 노름마치가 바로 이광수 자신인 것이다.

한군데에 머무르지 않는 타고난 광대의 기질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기세가 꺽이지 않아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신성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그의 혼과 성은 아마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신명을 언제까지나 멈추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명인_김용배*****

"저게 아녀, 저게...."
"사람들은 잘 몰라!"

평소 조용한 성격이라 웬만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말을 잘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남기수씨에게 만은 무심결에 독백처럼 되뇌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힘없이 한숨을 내 쉬며 한말이라고 합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정배씨의 말에 의하면 무대에서 김용배의 가락을 듣고 박수를 보내며 "저게 우리의 것이고 우리음악의 본질"이라고 치켜 세우지만 정작 "남사당패" "쟁이"로 불리던 그는 우리땅에서 쇠잽이 김용배를 이해해 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단언을 내렸다고 합니다.

쓸쓸히 34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던 전통 끝자락의 마지막 예인 김용배!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얼마되지않아 서울의 신대방동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집부근엔 관음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 남사당패가 상주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뜬쇠(남사당의 은어로 잽이의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가 찾아와 어린 용배를 데려 가겠노라고 얘기를 했고,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관계로 형이라도 배 곯지 않을것 같으니 반신반의로 허락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6~7살 때의 일이라고 동생 정배씨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행중을 거느리고 있었던 남운용씨(남기문씨의 아버지) 밑에 최성구, 양도일, 송복산씨가 이끄는 세 행중이 있었는데, 최성구씨에게서 쇠를, 양도일씨에게선 장구를 배웠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12~13살 되던 해에 가장 친했던 남기수씨를 만나게 되는데 남기수씨의 아버지인 당시 진도박씨로 통하던 북잽이 박종희씨가 아들인 남기수씨(어! 성이 다르네)를 데리고 행중으로 들어 오면서 부터 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유랑의 연속이고 집시같은 생활이지만 박종희, 김용배, 남기수씨는 한몸처럼 늘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어렸을적 용배형이랑 둘이 장구를 배웠어요. 전 지금도 소고를 하지요. 그런데 형이 이쁘고 귀엽기도 하거니와 장구가 뛰어나서 인기도 대단했는데 그 인기를 노려, 어른들이 쇠도 잡게 했어요. 어른들이 한 몫 받을때 용배형은 두 몫에서 두몫반을 받았지요. 사당패에서는 나이보다 예능을 더 쳐 주었어요. 그래서 우리를 어느 패에서도 함부로 못 했어요." "남사당패"하면 유랑 천민집단으로 조선시대부터 천대의 세월로 오늘에 이르지만 그 길을 버리지 않고면면히 지켜온 사당패의 후예 남기수씨의 산 증언입니다.
"형은 떠돌면서 번돈을 속옷 깊숙이 자기가 실로 꽤매 만든 주머니에서 꼬깃 꼬깃한 돈을 꺼내 주고 가기도 하고, 쌀을 메고 와서 우리에게 쌀밥 구경도 시켜주곤 했어요. 가난과 돈에 한이 맺혀 있는 형이지만 항상 좋은 얘기도 해주고... 지난 4월 "신춘국악대전" 서울공연 때도 늘 어머니 편히 모시고 싶다면서 싼 집이 나오면 연락 하라고 해서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생 정배씨가 가족에게는 늘 자상한 형이었다고 하며 들려준 얘기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남사당패 생활을 하던 김용배 선생님은 1978년 남사당의 후예들인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과 함께 사물놀이패를 만들게 되는데, 기존의 서서 발림을 하고 각종 놀이를 벌이던 판굿형태의 풍물에서 벗어나 실외의 판이 아닌 실내라는 공간에서 기존의 풍물가락을 이용해 훨씬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한 곡으로 감상할 수 있게 했는데 당시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있었던 네명의 공연은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탄생시켰으며 그때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사물놀이는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민속악의 한 장르로 당당히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인 84년 돌연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 원래 사물의 리더는 쇠인데, 김덕수 선생님은 장구가 리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음악적 갈등으로 그만 두게 되었다는 얘기와, 국립국악원의 보이지 않는 계략이 팀을 갈라서게 했다는 등 주위의 말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 중부지방과 그 위로는 상쇠라 해서 쇠를 리더를 했고, 남부지방에서는 설장구라 해서 장구를 리더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모 교수는 어느 한 라디오 프로에 나와 사물놀이를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음악"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국립국악원하면 왕을 위한 음악과 국가의 행사를 위한 의식음악을담당하며 정악의 산실처럼 굳어져 있었던 배경으로 보면 이해가 되고도 남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80년부터 국립국악원에 근무했던 김용배 선생님은 당시 김덕수 사물패 전원이 "대마초 흡연" 관계로 바로 팀을 구성할 수 없었는데 김덕수 선생님과는 전통을 바라보는 시각 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 부터 결별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는 당시 한만영(서울대교수)원장님이 국립국악원내에도 사물패가 있어야한다는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국립국악원 풍물패를 지도하던 김용배 선생님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게 되었고 84년 팀과 결별하며 그해 바로 장구에 전수덕, 북에 방승환, 징에 박은하와 함께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습실 하나 없이 끼어 생활해야만 했던, 그러면서 겪어야 했던 보이지 않는갈등은 극심했었을것 이라 생각합니다.

84년 3월 9일 국립극장에서 국립국악원 정기공연으로 창단 연주회를 가질때 "호남 풍물과 웃다리 풍물이 함께 자리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깼다"고 전문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교통이 좋으니 못 가볼 곳이 없지만 옛날에는 "쇠"하면 충청, 호남 이북지방 "장구"하면 호남지방으로 통했다고 하는데 웃다리에서 쇠를 배운 김용배 선생님과 명창 임방울이 이끌던 협률사에서 설장구로 신화를 남겼던 전사습의 아들 전수덕 선생님의 장구가 만나 풍물가락을 엮어 냈으니 그 절묘함을 두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
그러나, 이것도 잠시 돌연 전수덕 선생님이 마당패 "뜬쇠"를 만들며 85년 9월 16일 국립국악원 사물패를 떠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기문 선생님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잦은 구성원의 교체도 문제이지만 김용배 선생님과 나머지 3명의 기량 차이가 너무 커 겪는 갈등이 심했다고 합니다.

"보통 연습때 잘 맞지 않는듯 하면 아무 말 없이 쉬자고 해요. 이렇다, 저렇다 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성격이려니 했고, 또 연주실력 차이가 엄연했으니까요." (어렸을적 양도일 행주에서 장구를 배우며 오빠처럼 따랐던 박은하 선생님의 얘기가 마음고생이 많았을 김용배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86년 일본 YMCA 초청공연을 몇달 앞두고 연습에 몰두해 있었으며 점점 호흡도 맞아 갔고 "이번에 일본에만 갔다오면..."하며 내심 일본공연에 대한 기대가 많았는데 5월 1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을 맨체 발견되었고 지금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정확한 사인을 알지 못한체 86년 5월 1일 그날로 묻혀 있습니다.

※ 위 자료는 1986년 전통문화 6월호의 고 김용배의 예술과 인생에서 발췌정리한 글입니다.



"신들린 쇠쟁이" "남사당의 마지막 후예" 김용배 선생님!
그가 남긴 자료는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사물놀이의 "사물놀이"앨범과 Video자료, 워너뮤직에서 발매된 "사물놀이"(김용배, 김덕수, 최종실, 이광수)사물놀이패 원년 멤버들이 남긴 유일한 음반임)
신나라레코드에서 발매된 "김용배 설장고 가락 모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