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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사물놀이 방

사물놀이의 상쇠(김용배 님)

* 이는 [월간 징기스칸 2004년 12월호 통권4호](서울:월간조선사) 80~84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요절한 천재 사물놀이 상쇠 김용배
        글/盧載明(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오늘날 국악 하면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표적인 음악은 아마도 사물놀이가 아닌가 싶다.
  최근 몇 십년 동안 국내외 공연장에서 사물놀이 만큼 갈채를 받은 국악 장르는 드물고 그에 따라 방송 매체에서 사물놀이는 단골 메뉴였고 사물놀이 음반 또한 여타 국악에 비해 압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국악 음반이 극히 드물게 제작되었던 1980년대에도 사물놀이 음반만은 꾸준히 발매되었다.


  1978년 첫선을 보인 사물놀이가 짧은 기간 동안 이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국악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전무한 신기록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를 통틀어도 ‘월드 뮤직’으로서 사물놀이 만큼 단기간 내에 선풍을 일으킨 음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물놀이 탄생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쇠잽이 김용배(金容培)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가 않다.
  허나 사물놀이 발생 초창기에는 사물놀이의 기둥은 김용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 실례로 당시 대표적인 국악 공연 행사였던 조선일보사 주최 ‘국악 대공연’ 제1~3회(1982~1984년) 모두 사물놀이 부문은 줄곧 김용배에 초점을 맞추어 초청 공연되는 등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김용배가 사물놀이의 주도적인 인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1983년 미국 넌서치레코드에서 제작된 사물놀이 음반에는 김용배가 네 명의 연주자 중 맨마지막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해외 시각이나 국내 대부분의 관중들 사이에선 많이 인지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반된 결과가 나타난 까닭은 우선 그의 다소 내성적인 성격, 자신을 자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점, 대외적인 언변에 능숙하지 못했던 면모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물놀이를 얘기하면서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으며 그는 사물놀이의 대명인이라는 사실이다.


  쇠퇴해 가는 집단 풍물놀이의 꽹과리, 장고, 북, 징을 각각 한사람이 담당하여 연주하는 형태로 처음 무대화하여 ‘사물놀이’라는 단체를 결성한 김용배!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기가 막힌 연주를 들려 주었던 상쇠 김용배! 1952년에 태어나 1986년 세상을 떠났다. 언뜻 짐작하기에 고작 한국 나이로 35세를 살았는데 무슨 명인이고 어떤 일가를 이루었겠느냐고 의문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이야 사람의 수명도 길어지고 35세면 아직 청춘이라 여기지만 전통사회에서 음악가 30대 나이면 이미 나름의 일가를 이룬다.


  판소리의 경우 과거에 이동백(李東伯), 송만갑(宋萬甲), 김창룡(金昌龍), 장판개(張判介), 박봉래(朴奉來), 김정문(金正文), 김록주(金綠珠:동명이인 중 김해 출신), 임방울(林芳蔚), 이화중선(李花中仙) 등 수많은 명창들이 이미 30대에 굉장한 두각을 나타냈고 생명력이 강력한 이 전통음악의 물줄기 끝자락인 1970년대에 안향련(安香蓮)과 같은 명창도 30대의 나이로 원숙한 기량을 보여 주었다.


  김용배는 사물놀이라는 없던 장르를 개척했고 일찍이 남사당 가락,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농악, 여러 무속음악 장단을 두루 섭렵하였다. 꽹과리뿐 아니라 장고, 북, 징 등의 풍물 악기 에 대해 골고루 깨우친 사람이다.


그리고 김용배는 악기들의 장단과 더불어 그에 따른 율동도 제대로 아는 이다. 풍물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신기에 가까운 쇠가락을 두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야외 풍물굿의 기나긴 가락들을 간소화, 핵심화하여 실내, 야외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구성하여 연주했다.


  김용배가 사물놀이에서 주로 담당한 쇠가락은 장고, 북, 징을 두루 잘 알아야만 출중한 연주가 가능하며 그러기에 거의 모든 풍물을 제대로 익힌 그는 장고, 북, 징 가락의 기본축 사이사이를 날렵하게 누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고, 북, 징의 역할도 중요하고 이들의 기량 역시 쇠가락을 꿰뚫고 있어야만 하지만 뛰어난 고수의 바탕 위에 소리꾼의 기량에 의해 판가름 나는 판소리의 경우에서처럼 사물놀이도 어디까지나 쇠가락의 중심 구실은 막대하다 할 것이며 그런 면에서 사물놀이의 발생과 진보에 있어서 탁월한 상쇠였던 김용배는 큰 구심점이었다 하겠다.


  근래에 사물놀이 만큼 성공을 거둔 창작, 신작 국악은 없다. 120~130여년 전에 민속악과 심지어 정악까지 수용, 융합시킨 산조가 발생하였고 그 산조는 단 1세기만에 대표적인 국악 장르로 도약하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산조 이후 가장 혁신적으로 만들어지고 급속도로 떠오른 국악 장르가 바로 전국의 풍물굿에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한 사물놀이인데 그 중심에 김용배가 있었다고 하겠다.


  김용배는 상쇠와 부쇠가 어우러지는 쌍꽹과리의 짝드름을 극대화시켰다. 급격히 사라져 가는 경기 충청권의 웃다리풍물 맥을 제대로 이었고 후배들에게 물려 주었다. 그가 다른 지역에 비해 좀더 일찍 전승이 끊어져 가던 경기 충청 지역의 농악 가락을 대가들한테 거의 판막음으로 제대로 이어받았다는 점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더불어 그가 한 지역 음악의 관심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토의 장단에 호기심을 가지고 학습했다는 점이 특히 주목되는데 이는 한가지 음악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구 음악과 접목을 시킨다든지, 그것을 현대적으로 편곡하는 오늘날의 보편적인 양상과 사뭇 다른 매우 긍정적인 면이라 하겠다.


  그리고 김용배는 황당하거나 무모한 창작 시도보다는 철저하게 정통 음악에 기반을 둔 연주를 했다는 점에서도 유난히 돋보인다. 사실 전통적인 국악 창작 원리와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감동 체계는 기존의 것과 전체가 완전히 다른 국악 창조에 의해 큰 쾌감이 전달되고 느껴지기 보다는 단순한 엇붙임, 일부분의 미세한 엇박자 변화로도 신선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김용배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관중의 박수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학습 과정에서 느낀 옛 명인들의 구성지고 담백한 멋, 들을수록 깊은 맛이 나오는 연주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마한 사람이다. 종교적일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꿋꿋이 전통음악 뿌리에 따른 편곡과 새로움을 개척했다.


  이는 전래 국악이 시대에 뒤쳐지거나 질이 낮은 것이 아니라 단지 많은 시간 국악에 무관심했던 대다수 대중에게 그 음악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을 뿐이고 20세기 격동기를 거치면서 귀명창(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이)의 숫자가 극히 적어졌을 뿐이니 처음 풍물 가락을 접하는 이들에게 정통과 전혀 다른 꾸밈으로서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는 믿음에서였다고 판단된다.


  그는 동해안 굿음악의 꽹과리 가락을 농악 장단에 접목하였으며 전통적으로 서로 연주를 같이 하지 않는 관습을 깨고 경기·충청 웃다리농악과 호남농악을 함께 합주하는 시도를 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김용배는 부지런히 정통 국악을 공부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단단히 기초로 한 색다른 연주를 추구하였다.


  또 정통 국악 장단의 기록 작업에도 성실했다. 이는 연주자로서는 드물게 보는 경우인데 녹음, 문자 기록에 열성적이었던 스승 지영희(池瑛熙:해금 연주자, 인간문화재)의 영향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사물놀이를 탄생시킨 김용배, 김덕수(金德洙), 이광수(李光壽), 최종실(崔鍾實) 이 네 사람 공히 열성적인 학습과 창작력을 보여 주었고 많은 결실을 이루어냈다. 그들 모두 유년기부터 수 십년 외길을 걸었고 일찍이 젊은 나이에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이 모두가 뿌리깊은 우리네 전통문화의 질긴 생명력의 결과라 하겠다.


  이들 네 명의 ‘사물놀이’라는 연주단 이름이 이제 하나의 국악 장르명이 되었다. 사물놀이라는 장르가 전통음악이 급격히 단절된 경기 충청권 출신의 김용배를 비롯한 여러 젊은 연주자들이 주축이 되어 탄생되고 그 직계 후배들 핵심 역시 그 지역 출신이라는 것은 독특한 점이다. 이는 과거 막강했던 이 지역 국악의 진한 연속성과 급히 전통음악이 사라져 가는 이 지역의 특수성에 따른 뛰어난 젊은 풍물인들의 절박한 몸부림의 결실이었다고 하겠다.


  모든 무형문화재 종목이 그러하지만 어떠한 초강력 문화재보호법으로도 가장 지켜내기 어려운 분야가 풍물굿인데 김용배 일행은 바로 그점을 절감하고 사물놀이 악단 창단이라는 묘안을 짜낸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전국민 생활의 일부나 다름 없던 농악이 현대에 들어 설 자리를 잃었을 때 김용배 일행은 너무도 유효 적절하게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무대화시켰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물놀이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사물놀이를 처음 연주한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의 개인기가 모두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사물놀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비판의 소리가 들리는 것과 김용배의 요절은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여타 음악 장르보다 연주자들 사이의 호흡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물놀이에서 거물급 한 사람의 몫은 그 만큼 소중한 것이다.


  동서고금 어떠한 악기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다루는 사람이다. 악기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그 악기가 크게 부각되기도 하고 하나의 음악 장르가 성쇠(盛衰)하기도 한다.


  그 실례로 남북한에서 수 십년 동안 국악기의 개량과 새 악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지만 그 수많은 악기 가운데 철현금이 국악계에서 유독 돋보이고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게 된 것 역시 그 악기를 만들고 산조로까지 직접 짜낸 줄타기 인간문화재 김영철(金永哲), 그 제자 안향련, 성창순(成昌順)과 같은 명인들의 뛰어난 연주력 덕분이다. 그리고 김용배가 보여준 접신의 경지가 사물놀이를 세계적인 음악으로 발돋음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김용배가 음악적 견해 차이로 사물놀이 창단 단원들과 헤어져 홀로 되자 1984년 국립국악원이 그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사물놀이라는 국악 그룹이 누구패라는 이름으로 변모, 갈라지게 된 데는 사물놀이의 세계적 성공과 수익성, 이권이 발생한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정악(正樂) 중심으로 운영되던 국립국악원이 기존의 관습을 깨고 김용배를 주축으로 사물놀이패를 조직하지 않았더라면 김용배의 단명은 더욱 짧았을지 모른다. 다시금 생각해 보아도 국립국악원이 당시 파격이었던 신진 음악 세력을 박봉(월 보수:7~10만원)이나마 어엿한 일원으로 포용한 것은 분명 획기적인 일로 기억된다.


  김용배와 함께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 창단 일원으로서 김용배 작고 6개월 전까지 같이 연주 활동을 한 방승환(方勝煥)의 기억에 따르면 김용배가 역대 연주자들 가운데 사물놀이를 가장 잘 연주한 명인이라 한다. 그리고 김용배는 굿거리에다 자진모리 가락을 많이 넣어서 연주했다 한다. 방승환의 생각에 김용배도 스스로 요절하기까지 완벽하지 못했고 그도 결함은 있었는데 동해안 무악(巫樂)의 ‘푸너리’ 장단 활용을 잘 못하고 태극 타법 등 동해안 별신굿 타악 기법 2~3가지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다.


  방승환의 증언에 의하면 김용배가 평소 기가 막히게 연주를 잘했었는데 1985년 하루는 이상하게 주눅이 들어가지고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당시 부산에서 동해안 별신굿의 악사 김정희가 찾아와 지켜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김용배가 1978년 ‘사물놀이’ 악단 창단 직전 단원 모두 단체를 결성하기 전에 끝으로 전국의 풍물 명인들을 찾아가 배울 수 있는 기예는 모두 배워 가지고 다시 모이자고 제의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김덕수는 송순갑한테 가서 웃다리풍물을 익히고 김용배는 임실 필봉농악을 찾아갔으나 큰 학습을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동해안 별신굿 풍물이 특이하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으로 가서 김석출(金石出:인간문화재) 명인에게 6개월 동안 ‘자부라깽’(다드라 따따따) 등을 사사했다 한다.


  김용배가 여타 사물놀이꾼들에 비해 특히 돋보였던 결정적 이유는 동해안 무속 가락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데 있다. 지금도 그 난해한 동해안 가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풍물인이 드문 현실에서 약 27년 전에 이미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사물놀이에 응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후 여러 명인들이 동해안 무악 가락을 사물놀이에 적용시키는 노력을 했음에도 김용배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는 경이로운 작업을 해낸 것이다.


  그럼에도 김용배 스스로도 직,간접적으로 인정했듯이 김용배가 생전에 그 동해안 가락을 결국 완벽히 소화해내지 못하고 그걸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은 영원히 미완성의 아쉬움으로, 끄끝내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김용배가 그 수많은 학습과 경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초월하지 못한 깊은 전통의 숨결, 동해안 무속 장단! 이는 소탈하면서도 솔직하고 담담한 당시의 젊은 김용배로서도 어쩌면 숨기고 싶은 약점이자 그 시대 천재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허나 낯설고도 새로운, 그러면서도 기량이 높은 주전공 이외 분야의 근사치에 김용배 만큼 근접한 젊은 국악인은 많지 않았다.


  사물놀이 역사상, 사물놀이 연주자들 사이에서 김용배 만큼 연구 대상이 된 사람은 없다. 어떻게 그렇게 연주할 수 있나 늘 신비의 대상이었다. 그의 후배 방승환의 경우 비디오라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 김용배와 함께 사물놀이 공연을 할 때 단단히 마음 먹고 꽤 많은 자비를 들여 그의 연주만 집중적으로 촬영, 분석하기도 했다.


  음악가가 공연을 하면서 관람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지만 김용배는 관중을 과다하게 의식하지 않고 가락에 깊이 몰입하는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결승점을 지나도 멈추지 않고 달리던 속력에 의해 좀더 뛰다가 서듯이 그는 유달리 연주가 끝난 후에도 몰입되었던 감정을 한참 동안 유지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한폭의 그림이자 환상적인 춤이기도 했던 그의 유연한 손동작과 어느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음악에 푹 빠져 빛나던 그의 눈빛은 그의 음악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그런데 김용배는 이 세상에 없고 음반에만 그의 연주가 남아있는 지금 실제 공연이 아닌데도 음반만으로도 그의 연주는 농도가 너무 진해서 자주 감상하기 조차 부담스럽다고 할까, 두렵다고 할까 그럴 정도이다.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직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그가 세상을 등진 1980년대 국악계 원로들이 너무나 급속도로 타계하는 시기였고 그래서 필자는 당시 연로한 명인들을 조금이라도 많이 만나 기록을 남기는 데 주력했다. 그때 김용배가 그렇게 일찍 작고할 줄 몰랐다. 그리 일찍 떠날 줄 알았더라면 그 신기 마저 감돌았던 그의 손과 악수라도 해보았을 것을...


  1980년대 들어 급격하게 가속이 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 속에서 우린 전통사회 명인들의 마지막 훈도를 제대로 받은 거문고 명인 임동식, 판소리 명창 안향련, 사물놀이 명인 김용배를 1980년, 1981년, 1986년에 각각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당시 국악계의 젊지만 거물급이라 할 만한 이들은 당시 모두 30대의 나이였고 공히 국가의 무형문화재 보호법 밖에 있어서 생활이 넉넉치 못했다. 그 당시 인간문화재가 아니면 대다수 국악인들은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는데 이들은 모두 그 생존의 살얼음판을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그리하여 안향련은 한때 의욕적으로 가요 음반을 내면서 대중음악계로 진출하려고도 시도했고 김용배의 경우는 2년간 국가 기관인 국립국악원에 음악 연주 공무원 신분으로 몸담으며 길고 긴 유랑 예인의 길을 접고 비교적 안정된 정착 생활을 갖기도 했다. 


  허나 안향련은 가요계 진출이 좌절되고 다시 판소리계로 복귀한 후 얼마 안돼서 자살하고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길을 걸었던 김용배는 국립국악원의 고압적이고 경직된 분위기가 맞지 않았는지 그런 점을 반영하듯 공교롭게도 그는 공무원 독신자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용배는 국가 기관의 배려보다는 전통사회의 예인들처럼 진실로 그 음악을 좋아하는 민중의 관심과 박수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비극은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는 데 있다. 결국 국악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 천재를 요절케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죽기 위해서 산다”라고 한 어느 지하철 노숙자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김용배의 죽음에 얽힌 여러 일화가 있고 의문점들이 있으나 그가 생전에 연주장에서 줄곧 보여준 진지하고 비장한 모습들을 연결 지어 보면 그는 즉흥적인 광기로 목숨을 끊었다기 보다는 무언가 예감을 하고 진작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짧지만 제대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애쓰지 않았나 싶다. 


  특히 지구레코드에서 제작한 그의 유작 사물놀이 연주 동영상, 사망 직전 사진들을 대하면 마치 죽기 위해 기를 모으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4월 23일 무렵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코자 한 순간 그가 겪었을 고통은 살아있는 자는 짐작키 어려울 것이다.


  아픔, 고통, 슬픔이 너무 크면 그 당시엔 실감이 잘 안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후 핵폭탄 후폭풍과 같이 엄청난 상실감과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김용배의 죽음이 당시엔 얼마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인지 필자는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떠난 지 수년이 흐르고 난 뒤에야 그 대사건이 실감이 나고 아픔과 슬픔과 전통음악의 손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밀려왔던 기억이 난다.
  음악이라는 것이 마약과 같아서 첫 발걸음은 가벼워도 거기에 몰입하다 보면 모든 걸 걸게 되기도 한다. 김용배는 어려서 가난 때문에 풍물굿과 인연을 맺었으나 그가 다 성장했을 때 그는 이미 그 음악에 중독이 되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걸 바칠 만큼이 되었다.


  그땐 돈도, 명예도 2차적인 문제가 되고 음악 그 자체에 환장하고 오로지 득음, 득도를 향해 나갈 뿐이었다. 짧지만 굵게 그 길로만 정진하다 생을 마감하였기에 그는 오래도록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의 예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굵으면서도 길게 그러한 길을 가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램이겠으나 이는 왜 사막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냐는 무리한 투정일지 모른다.


  거의 모든 국악 장르가 그러하겠으나 풍물 장단은 아무리 완벽한 녹음이 남아있고 체계적인 악보로 정리되어 있고 이론이 정립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론 후대에 전승이 제대로 되기가 어렵다. 이론보다는 풍물, 굿 현장의 실기 체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사그러지던 전통 연희 현지에서 몸소 체득한 김용배의 가락이 너무도 소중하고 요절한 그가 아깝다.


  더불어 그와 한 시대를 한 땅을 밟으며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이 우주에 그와 같은 천재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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