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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공동체~/성가대원 방

국악미사의 이해(강수근신부)

 

Ⅰ. 국악미사(國樂MISSA)란?


1. 정의


  「국악미사」란 예수고난회 강수근 신부가 1987년에 한국전통음악(국악)의 어법에 따라 작곡한 미사곡을 말한다.


2. 배경


  「국악미사」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작곡되었다.

  1972년 국악중학교에 입학하여 국악을 공부하기 시작한 강수근 신부는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왜 성당에서는 우리 나라 음악으로 된 성가는 부르지 않고 외국 음악으로 된 성가만을 부르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때부터 기회가 되면 국악성가를 만들어 보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83년 군생활을 하던 중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작곡하게 되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예수 고난회에 입회한 강수근 신부는 수련을 받던 중 우연한 기회에 군생활 중에 작곡했던 곡을 부르게 되었고, 예수고난회에서는 이 곡을 그 해 성 금요일 전례 때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부활대축일에는 ‘알렐루야’를 작곡하도록 하여 사용하였다.

  당시 수련장이었던 손어진 신부는 나머지 미사곡들도 모두 완성해 보도록 권고하였고, 강수근 신부는 그 해에 은경축을 맞이하는 손어진 신부에게 선물할 마음으로 나머지 곡들도 작곡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이 미사곡은 1987년 9월 24일 미리내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경당 앞에서 거행된 전국 남자수도회 수련자대회 미사에서 처음으로 불리어졌고, 1987년 10월 17일 예수고난회 서울 우이동수도원에서 거행된 손어진 신부의 은경축 미사에서 정식으로 봉헌하게 되었다. 

  그 후 몇몇 수도원들과 광주신학교에서 이 미사곡이 불리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녹음 테이프와 악보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1988년 8월에 ‘성바오로 딸 수도회’와 ‘예수고난회’ 수도자들의 합창과, KBS 국악관현학단의 반주(이상규 편곡)로 녹음 테이프가 제작되었고, 동시에 악보도 발간되었다. 이 때 이 미사곡의 명칭이 「국악미사」로 정해진 것이다.


  테이프와 악보의 보급으로 「국악미사」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전국의 많은 수도원들, 신학교들, 본당들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파 과정에서 다소 용어의 혼동이 생기게 되었다. 즉 「국악미사」라는 용어가 이 ‘미사곡’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미사곡을 사용하여 거행되는 ‘미사’를 지칭하게도 된 것이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이 미사곡을 지칭 할 때는 ‘국악미사곡으로, 그리고 한국적 미사곡들이나 성가곡들을 사용하여 거행되는 ‘미사’를 지칭할 때는 「국악미사」로 용어를 구분지어 사용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3. 내용


  국악미사」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대영광송․알렐루야․거룩하시다․신앙의 신비여․아멘․주의 기도․우리 주 천주께․천주의 어린양」 등 미사곡 9곡과, 「시편 95-온 세상에 가서, 시편 30-성부여 내 영혼을」 등 응송곡 4곡, 그리고 성가곡인 「십자가 길의 성모」 등 모두 14곡의 전례성가가 수록되어 있다. 이 곡들은 주로 5음 음계에 단선율 위주로 되어 있지만, 부분적으로 양악식 화성을 도입하고 있다.

  선율의 형태는 모두 국악적인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국악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미는 소리, 꺾는 소리, 굴리는 소리, 홀리는 소리, 맺는 소리 등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박자중모리장단, 굿거리장단, 자진모리장단, 동살풀이장단 등 전통적인 한국 장단들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신앙의 신비여․아멘」과 「주의 기도」의 사제 선창 부분, 「시편 115」 등에서는 교회의 소중한 음악 유산인 그레고리오 성가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시편성가들은 교회음악의 전통대로 신자들과, 성가대가 교창형식으로 후렴과 시편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성가대가 부르는 시편 부분은 무박자 형태에 한국적인 선율을 담아 길이가 다른 가사들을 무리없이 소화하도록 하고 있다.


4. 한국전례음악의 토착화


  여기서는 ‘전례음악’과 ‘토착화’의 개념 문제는 다루지 않고, 주로 전례음악 토착화의 당위성과 그 구체적 실현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토착화의 당위성

  ‘한국 전례음악의 토착화는 왜 필요한가’ 그 해답은 바로 전례헌장 112항과 119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①  전례헌장 112항은 전례음악을 ‘말과 결부된 거룩한 노래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곧 전례음악과 전례문(말)의 밀접한 관계를 명시하는 것으로서, 전례음악이 전례문의 정확한 전달을 담당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굳이 이러한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말과 음악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악곡들에 있어서는 그 곡의 가사가 변경되면 반드시 그에 따라 선율의 형태도 변화되어야만 그 변경된 가사의 의미를 더 잘 살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그 가사의 정확한 전달도 가능해 진다. 즉 가사가 선율의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언어구조 안에서도 가사의 변경에 따라 선율의 형태가 달라지게 된다면, 다른 언어구조에 있어서는 그 음악적 변화가 더욱 심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언어의 구조는 단순히 음악의 선율을 지배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악의 전체적인 형식을 좌우한다. 즉, 서양음악은 서양말을 잘 표현하기 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고, 한국음악은 한국말을 잘 표현하기 위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말을 서양음악으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한국음악으로 표현해야만 그 말이 자연스럽고도 힘있게 전달될수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말 미사를 제대로 거행하기 위해서는 전례음악의 토착화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②  전례헌장 112항에서는 성가의 목적‘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 들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토착화는 필수적이다.

    먼저 ‘하느님의 영광’이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하느님께서 여러 민족을 세상에 내신 이유는 각 민족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찬미 받으시기 위함이다. 시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숨쉬는 모든 것들아, 야훼를 찬미하여라”(시편 150, 6)할 때 우리는 천하 만물이 제각기 자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장엄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 민족의 목소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게 된다면, 마땅히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할 우리 몫의 부분이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민족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불경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례음악의 토착화는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자들의 성화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자기 음악이 아닌 남의 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틀림없는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우리 음악을 들으면 몸과 마음과 영혼이 저절로 감동을 받도록 되어 있다.

    더욱이 전례 안에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전례 안에서 한국적인 묵상 음악을 듣고, 보다 깊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 신자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신자들이 우리 음악을 낯설어 하고 어색해 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 안에서 국악이 제대로 자리잡아 왔다면, 틀림없이 신자들의 성화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음악적 공헌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전례 안에서는 국악을 듣거나 부를 기회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신자들이 우리 음악을 통해서 성화될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질적으로 보다 깊은 ‘신자들의 성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도 전례음악의 토착화는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④ 전례헌장 119항에서는 포교지방의 고유한 음악 전통을 전례 안에 도입함에 있어 토착화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중한 태도로 장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선언, 그리고 그 후속 문헌들을 통해서 보더라도 토착화는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2) 한국전례음악의 토착화 상황


  한국 교회 안에서는 초대교회 때부터 전례음악의 토착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왔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러한 노력들이 제지되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 맥이 끊기고 서양성가 중심으로 변질되었다가,  최근에 이르러 다시 조금씩 토착화 노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① 1780년대~1930년대 : 초대 교회 때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천주가사」라는 독특한 형태의 성가를 만들어 불러왔다.

「천주가사」란 조선시대의 대표적 문학형태인 ‘가사문학’의 형식을 빌어, 천주교의 교리와 성서 내용들을 주 내용으로 하여 지어진 4.4조의 노랫말을 한국의 전통적인 민요가락에 얹어 부른 성가이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 등을 지어 불렀고, 최양업 신부(1821-1861)는 19곡의 「천주가사」를 지어서 널리 불리우게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평신도들에게 이어져 계속 천주가사들이 저작되어 불리었으며, 190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 저작 활동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신문학의 등장으로 가사문학이 사라지게 되면서 천주가사의 저작 끊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근 150여 년간 통틀어 200여 편의 천주가사가 저작되어 불리었다고 추정되며, 1982년에 이중 1편 홍민자에 의해 채보 되었고, 1989년에는 최필선에 의해 20편이 채보 되어 악보화 되었다.

    이들 천주가사는 구전전승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게 되므로, 각 개인의 음악적 소질에 따라 음의 첨삭과 변형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현재 채보된 악보들이 얼마나 그 원형에 가까울른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악보들을 통해 대충의 윤곽을 살펴보면, 「천주가사」는 3음음계 또는 5음음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요조로 된 단순한 선율들을 계속 반복하는 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 시초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위하여 노력하였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루어왔음을 알 수 있다.


② 1930년대~1980년대 : 이러한 토착화 노력과는 반대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들은 전례를 거행 할 때에 천주가사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들여온 프랑스성가와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죠션어 셩가≫(1924)를 필두로 하여 발행하기 시작한 성가집들 안에는 주로 프랑스성가, 그레고리오성가, 독일성가, 미국성가 등이 실렸고,  얼마되지 않는 한국인 작곡가들의 창작곡 역시, 서양음악의 어법에 따른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가톨릭 성가≫(1985년 발행)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풀이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토착화의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가집 안에서, 이문근 신부의 미사곡 (321~324    장)과 손상오 신부의 미사곡 (310~313장), 그리고 구명림 수녀의 「우리는 목장의 백성이로세」(57장),  김진균의 「주의 백성 모여 오라」(66장)와 「거룩한 어머니」(239장), 원선오 신부의 「좋기도 좋을시고」(416장),  나운영의 「야훼는 나의 목자」(470장) 등은 토착화의 좋은 모범으로 꼽힐 수 있다.

    그러나 신귀복의 “풍악을 울려라”(공동체 성가집 150장)와 같은 훌륭한 한국적 성가곡이 ≪가톨릭 성가집≫에 누락된 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0년대~1980년대의 한국 전례음악은 다소 토착화의 시도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노력은 실로 미미한 것이었으며, 대개는 서양성가들의 번역에 치우쳤고, 비록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서양음악의 어법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③ 1980년대 이후 : 1980년대에 들어서서 토착화와 연관된 몇 가지 중요한 성가곡들의 발표가 있었다. 1987년 2월 25일에 발행된 손상오 신부의 ≪시편성가≫, 1988년 6월 15일에 발행된 이종철 신부의≪전례미사곡 바단조≫, 그리고 1988년에 발행된 강수근 신부의 ≪국악미사≫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적 선율을 담을려고 노력한 것들로서, 한국 교회 안에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부각시킨 소중한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국악미사≫는 전례음악 토착화에 있어서 새로운 측면을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제까지의 모든 한국적 성가들은 ‘서양음악의 기초’ 위에 ‘한국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전례음악 토착화라는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양편에서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앞으로는 ≪국악미사≫와 같이 한국 음악적 기초 위에 서양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리라고 본다. 그러한 작품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한국 성가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한국적인 성가들을 작곡하는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위하여 실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1994년 2월에는 김종국 신부의 노력으로 ‘가톨릭국악실내악단’이 창단됨으로써 한국 전례음악의 토착화에 밝은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3) 토착화를 위한 제언

  한국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① 전례음악 작곡자들의 한국 음악에 대한 공부

  전례음악의 토착화는 일차적으로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책임자들, 특히 작곡자들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한국적인 곡들을 많이 작곡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부르게 한다면 토착화는 빠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적인 곡을 작곡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악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물론 전례음악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례와 전례음악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교회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인들을 보면 어느 정도 이에 대한 지식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에 반해 국악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다. 이러한 처지에서는 토착화의 의욕이 제아무리 높다해도 전례음악의 토착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참으로 전례음악의 토착화를 원한다면 작곡자들이 반드시 국악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론보다는 실기 위주로 연마해야 할 것이다.

  성음악 훈령 제 61항에서도 전례음악의 토착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례와 교회의 음악전통’ 또한 그들이 일하는 각 민족의 언어와 민요 및 특수한 표현양식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결국 제대로 된 한국성가를 작곡하려면 적어도 단소 한가락, 시조 한 수, 민요몇곡, 판소리 한 대목 정도는 능숙하게 부르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전례음악의 작곡자들은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연마한 그 시간만큼 한국 음악을 공부하고 연마해야만 비로소 전례음악의 토착화가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