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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사물놀이 방

임실 필봉굿의 이해

필봉굿의 유래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산간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필봉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이 붓끝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해서 유래됐다 한다.

필봉리는 본디 마을 단위의 마당밟이, 당산굿등 풍물이 아주 옛날부터 전승되어 왔으나 판굿과 외지의 걸궁굿 같은 수준 높은 풍물굿의 모습을 갖춘 것은 115년전 유명한 상쇠 박학삼을 초청하면서부터라 한다. 박학삼은 강진면 출생으로 걸궁굿과 마을굿의 유명한 상쇠였으며 박학삼의 타계 후에 송주호가 상쇠를 이었다.

송주호는 필봉리 출생으로 지금 살았으면 92세쯤 되며, 타계 후에는 양순용이 상쇠가 되어 지금의 풍물굿 형태를 이끌어 왔다. 양순용은 어려서부터 사랑방에서 쇠를 배워 14세 때는 박학삼, 상쇠 밑에서 끝쇠를 침으로 상쇠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18세 때에는 송주호 상쇠 밑에서 부쇠를 하다 송주호가 연로하자 상쇠를 맡아보았고 23세 때는 순창 동계의 김문숙에게서 퍼넘기기, 양사 등 부포놀음을 배웠고, 24세 때부터는 걸궁굿의 상쇠를 했으며 1970년초 부터는 점점 쇠퇴해가던 호남좌도굿을 복원하고, 풍물굿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풍물굿을 전수하였다.

허튼가락과 부들상모의 명인이셨던 상쇠 양순용은 필봉리 출신으로 필봉굿의 정리와 체계를 마련하고 그동안 단절된 마을굿의 형태를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현재 연행되고 있는 풍물굿의 전승과 보급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여 전국에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필봉굿을 전수하는데 일생을 바쳐 활동하시다가 1995년 별세하고 그의 아들 양진성이 그 뒤를 이어 필봉굿을 전승하고 있다.

즉 필봉굿의 계보는 전판이 - 이화춘 - 박학삼 - 송주호 - 양순용 - 양진성으로 전승되고 있다..

필봉굿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허드잽이(잡색)가 많이 편성되어 있고 가락적 구성은 호허굿 가락. 채굿 가락. 영산굿. 도둑잽이굿. 수박치기. 싸잽이굿 등은 필봉굿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며 앞굿 중심이 강한 다른 지방의 농악에 비해서 필봉굿은 뒷굿 중심. 또는 놀이 중심에 치중한다 .

보름날에 치는 찰밥걷이굿. 보름날 장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고사굿. 보름지나서 다른 마을에서 치는 걸궁굿. 여름철 김메기에 치는 두레굿. 큰 농악을 치기전에 치는 기굿. 큰 마당에서 치는 연희적인 판굿 등이 있다.

마당밟이 굿에서는 문굿. 샘굿. 마당굿. 조황굿. 철륭굿. 샘굿. 곡간굿. 성주굿. 등이 이루어지며 화려한 판굿의 순서는 길굿. 칠채굿.(일채에서 칠채까지) 호허굿(진다드래기 . 호허굿. 돌호허굿. 자진호허굿. 중삼채. 휘모리) 풍류굿(느린풍류. 반풍류. 갠지겡. 휘모리) 미지기 영산. 가진영산. 다드래기영산. 노래굿. 수박치기. 등지기. 군영놀이. 도둑잽이. 탈머리. 대동굿의 순서로 진행된다.

필봉굿은 1988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11-마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전국에서 필봉굿을 배우기 위해 연 3000여명이 찾아와 필봉굿을 전수받고 있다.

필봉마을에서는 정초에 치는 「마당 밟기」, 섣달 그믐밤에 치는 「매굿」,
정월 아흐레에 치는 당산제, 보름날에 치는 찰밥걷기 풍물, 보름날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고사굿, 다른 마을로 걸궁할 때 치는 걸궁굿(걸립굿),여름철 김매기 때의 「두레굿」, 풍물을 치기 전에 치는 「기굿」, 큰 마당이나 저녁 내내 치는「판굿」등이 있다.


1) 마당 밟기
정초에 신년을 맞이하여 풍물패가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집의 구석구석의 액을 몰아내고 집안식솔의 무사 평안함을 빌어주는 곳이다. 또한 풍물패의 구성원은 당연 그 마을의 사람들로 구성이 되고 풍물패의 구성원이 마을의 두레 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을사람 성원 모두가 주체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위해주면서 사악한 액과 가정의 잡귀를 물리치므로서 마을의 안녕과 마을 구성원의 무사태평을 빌어 주는 굿이다. 이처럼 마당밟기라는 굿을 통해서 구성원 서로서로의 끈끈한 공동체적 정서를 엿볼 수 있다.

필봉마을에서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까지는 신년 인사 때문에 굿을 치지 않고 나흘 이후 동네 총회에서 날을 잡는다. 날이 잡히면 그 날 아침 식사 후에 나발수가 삼초하면 치배들은 복장과 악기를 챙겨서 동청 마당에 모여든다. 치배가 다 모이면 상쇠는 어름굿을 내어 짧게 마당에서 굿을 맞추어 보고 상쇠의 신호에 의하여 기굿을 치러간다.

기는 마을 동청 마당 옆에 있는데 마을의 상징적 기인만큼 큰 굿이 있을 때마다 제일 먼저 기굿을 빼놓지 않는다. 기굿은 길굿을 치면서 기를 위주로 치배가 둘러서면 상쇠는 가락을 휘모리로 맺는다. 한 사람이 깃대
밑에 술을 세 번 부으면 상쇠는 군어룬굿을 치면서 치배 일제히 세 번의 절을 한다. 절이 끝나면 상쇠는 된삼채나 삼채굿을 내어 푸지게 친 다음 휘모리로 맺는다.

기굿을 마치고 나면 당산굿을 치러 가는데 일반적인 행렬법과는 반대로
영기. 잡색, 소고, 장구, 징, 쇠의 순서로 몇 바퀴 돈 뒤에 상쇠의 신호에 의하여 원진 방향(시계반대)으로 돌게 한 다음 상쇠는 가락을 휘모리로
맺고 "당산님전 문안이요"라는 말을 하며 굿을 칠 것을 고하는 문안을 드린다. 절을 세 번 한 뒤에 상쇠는 된삼채 가락이나 삼채 가락 등 상쇠의 즉흥굿에 따라 한바탕 치면 매굿이나 마당밟기등의 당산제는 필봉굿에서는 짧게 지낸다.


당산굿이 끝나면 마을로 올라와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샘굿을 친다. 샘굿을 치고나서 집집마다 들려 마당밟기를 시작한다. 마당밝기의 순서는 길굿을 치고 집의 대문에 도착하면 "쥔 쥔 문여소, 문 안열면 갈라요"라는 상쇠가 덕담을 먼저하고 덕담과 같이 "갱 갱 갠지갱 개갱 갠지 갠지갱"이라는 문굿을 먼저 친다.

문굿이 끝나면 마당으로 들어가 마당굿을 치는데 마당굿은 상쇠의 즉흥 판굿을 진행한다. 앞치배들이 마당굿을 치는 동안에 허두잽이들은 집주인에게 고사상을 차리게 한다.

고사상은 소반에 쌀을 가득 담은 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쌀을 담은 대주 식기를 올려놓는다. 식기 위에는 양초에 불을 켜서 꽂고 물그릇도 함께 올려놓는다.

집주인이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마당에 차려 놓으면 영기를 좌우에 꽂고 집주인의 따뜻한 마음과 음식에 감사드리는 술굿을 친다.
술굿의 덕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필봉굿상쇠 양순용씨는 주로 "두부국에 김난다. 어서 치고 술먹세"라는 덕담을 많이 하며 덕담과 함께 술굿을 치고 음식을 먹는다. 치배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잡색들은 재미있는 재담이나 춤으로서 악이 끊긴 공백을 메워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식을 다 먹고나면 상쇠는 참굿 가락을 치면서 마당을 돌며 모든 치배들은 풀어놓았던 악기를 재정비를 한다. 참굿을 치면서 마당을 몇 바퀴 돈 다음 정지굿을 친다. 대포수나 창부가 솥뚜껑을 거꾸로 세워들고 그 위에 대주식기에 쌀을 가득 다마 촛불을 꽂고 다시 이것을 솥 위에 올려놓는다.

 

정지굿의 진행은 "갱갱개/갱갱개"이라는 참굿가락을 치면서 부엌에 들어가 솥 위에 차려있는 고사상에 절을 세 번 한다. 절굿이 끝나면 상쇠는 "화동"이라 부르며 모든 치배들은 "예히"라 크게 대답한다.

대답이 끝나면 상쇠는 집주인을 위하여 덕담을 걸판지게(재미있게)해준다.

덕담은 덕담자가 즉흥적으로 하는데 필봉리의 상쇠 양순용씨의 덕담을 간단히 응용하면

"아 이 집이 아무개 집인데, 옛부터 이르기를 바깥차지는 대주차지요. 안방차지는 조항차진데 말이야 이집 대주님, 안방님, 식솔 모두 다 일년 열두달 삼백육십오일 물 묻은 바가지 깨달라 붙듯이 복 많이 충만하시고 나쁜 액들이 있거들랑 저 섬진강 물에 내던져 버리고 좋은 것만 충만하라"는 덕담을 한다.

또한 그 지방에 내려오는 노동요나 성주풀이를 부른다. 이어 "오방신장 합다리굿에 객귀잡신을 몰아내고 명과복과로 굿을 치세"라는 사설을 한 뒤 반풍류 가락을 내고(갠지갱→휘모리→짝드름→휘모리로)맺고 정지굿을 마친다.

 

이어 참굿 가락을 치면서 장독대가 있는 곳에 가서 철륭굿을 친다.

집주인이 쌀을 가득 담은 식기 위에 촛불을 켜 꽂아 장독위에 놓으면

상쇠가 "철륭 철륭 우철륭 좌-철륭 우철륭"이라는 소리를 하고 나면

치배들은 거기에 맞추어 휘모리 조의 가락을 친다.
철륭굿을 마치고 나면 샘굿을 치는데 형식은 철륭굿과 같고 덕담은 상쇠가 "아따 그물 좋구나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말세. 아따 그물 좋구나 벌컥벌컥 마시세"라는 즉흥 덕담을 한다.

이어 집을 구성하고 있는 노적굿이나 치간굿 등을 같은 형태로 치고나서 다시 마당으로 나와 짧게 마당굿을 친다. 마당굿을 치는 중간에 성주굿을 더할 수도 있고 집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음 집으로 간다.

다음 집의 마당밝기 형태 역시 이와 같은 형식으로 한다.

< 마 당 밟 기 순 서 >
기 굿 - 당산굿 - 공동우물굿 - 문 굿 - 마당굿 - 조황굿 - 철륭굿 - 가청샘굿-노젓굿(기타) - 성주굿(마당)

2) 매 굿
필봉마을에서는 일년의 마지막 밤인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마을의 사악한 것을 쫓고 경사스러운 것을 불러들이는 벽아진경(벽아進慶)을 위하여 치는 굿으로서 매굿을 친다.

그믐날 밤 어두컴컴하면 나발수가 나발소리를 3초 분다. 마을의 풍물치배들은 복색과 악기를 갖춘 다음 동청 앞마당에 모인다.
상쇠는 치배들이 모두 모였다 생각되면 굿내는 가락을 친 다음 길굿을 치면서 당산으로 향한다.

당산에 당도한 치배들은 동구밖에 있는 당산나무 앞에 일렬 횡대로 서서 굿가락을 맺고 절하는 가락을 치면서 당산나무에게 세 번의 절를 한다.

절하는 가락이 끝나면 삼채가락 등의 가락을 휘몰아 친 다음 길굿가락을 치면서 공동우물에서 샘굿을 치고 마을 집집이 들러 집굿을 친다.

매굿의 형태는 마당밟기와 비슷하여 집굿을 칠 때 그 집주인은 고사상에 금전과 쌀을 올려놓는데 이것을 마을 집사가 거두어다가 정초에 당산제 비용이나 마을의 공동이익에 쓴다.

필봉 마을에서는 매굿을 치기 전에 풍물 악기 등을 준비하는데 꽹과리나 징 등이 깨졌으면 인근 장에 가서 사오고 장고나 북 등이 부서진 것이 있으면 다시 만든다. 장구통이나 북통은 매우 굵은 소나무나 오동나무를 몇 해 전에 베어다가 그늘에 말린 다음 톱으로 켜고 옷자귀나 깎낫으로 속을 파서 만들고 개가죽이나 노루가죽을 준비해서 장고나 북 등을 만든다.

용기 등이나 영기 등은 사고, 치배들의 복색, 전립, 고깔 등은 직접 만들어서 굿물을 준비하기도 한다.

3) 당산제
필봉 마을에는 윗당산, 아랫당산이라 하여 당산이 두 군데가 있다. 당산이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성소인데 윗당산이라 하면 당산할머니를 모신 당으로 마을의 윗쪽 언덕 위에 있고 아랫당산이라 하면 할아버지 당산으로서 마을 입구 언덕에 있으며 당산나무 아래는 평평하게 터를 닦아 당산제를 지낼 때 당마당으로 쓰게끔 되어 있다.

필봉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아흐레날 밤에 지내는데 당산제의 날이 다가오면 마을에서는 궂은 일이
없고 부정이 끼지 않는 사람(재주)을 정하여 그믐날 매굿을 치면서 걷었던 쌀을 몇 알 주어 제수를 장만하게 한다.
매굿을 치면서 걷은 쌀은 깨끗한 집에서 걷은 쌀과 궂은 집에서 걷은 쌀을 분리해서 놓았다가 깨끗하고 우환이 없는 편안한 집에서 걷은 쌀은 재물을 장만하고, 굿은 집의 쌀은 팔아서 그 돈으로 제수를 사온다. 제주는 당산제의 사흘 전부터 집과 당산나무 지위에 금줄을 치고 제주는 목욕재계하고 깨끗하게 지성으로써 제수를 장만한다. 당산제는 "철륭제"라고 부르는 윗당산제부터 지낸다.

윗당산에 모신 할머니는 매우 까다로워서 음식도 가리기 때문에 고기 국이나 생선 등의 비린 것은 쓰지 않고 무나물, 고사리나물, 취나물, 묵, 밥, 백설기 떡 등을 차리며 궂은 일이 있던 사람은 제 지낼 때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아흐렛날 밤이 되어 저녁을 먹고 동청 마당에 모이면 소규모의 치배를 편성하여 동네 사람들과 길굿을 치며 윗당산으로 간다. 윗당산제는, 영기는 가지고 가지 않으며 제물, 허두잽이, 꽹과리2,3, 징1, 장고1, 동민 순으로 가며 소고는 딸리지 않고 치배들은 치복을 갖추지 않고 평복으로 깨끗하게 입는다.
길굿 가락을 치면서 윗당산에 도착하면 길굿가락을 맺고 삼채가락을 치는 가운데 제물을 차린다. 제물을 다 차린 후에 제주가 절을 세 번하고 지신 밥(쌀로 지은 멧밥)을 묻는다. 지신밥을 묻을 때 전년에 묻었던 멧밥이 잘 삭았으면 올해는 풍년이라 하여 모두들 기뻐하며 멧밥이 잘 삭지 않았으면 흉년이라 하여 걱정을 한다. 지신 밥을 묻게 되면 치배들과 동민들은 한바탕 푸지게 (걸판지게) 친 다음 다시 길굿을 치며 밑집으로 향한다.

동민들과 치배들이 밑집에 당도하면 굿가락을 맺고 치배들이 잠깐 쉬는 동안에 제주는 당산제에 쓰일 제물을 준비한다. 이때 치배들은 제대로 된 복색과 굿물, 영기 등을 갖춰 입고 나오면 제주는 제물을 들고 나온다. 치배들이 다 모였다 생각되면 상쇠는 굿머리가락을 걸판지게 친 다음 영기를 앞세우고 아랫당산으로 향한다. 길굿을 치며 아랫당산에 도착하면 치배들은 당산마당에서 당산나무를 향하여 일렬 횡대로 서서 계속 길굿을 치며 영기잽이는 당나무 양편에 영기를 단단히 꽂는다. 혹시라도 영기가 쓰러지면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하여 무척 조심한다.

제주가 당나무 밑에 제물을 다 차려 놓으면 치배들은 굿가락을 그친다.
아랫당산의 제물은 윗당산과는 다르게 어물, 고기, 채소, 나물, 백설기 멧밥 등을 모두 차리며 제주는 술잔을 올리고 축관은 축문을 읽는다. 축문이 끝나면 치배들은 굿가락을 이루고 동민들은 돌아가면서 당전에 술을 올리고 절을 한4다. 절이 끝나면 당나무 밑에 술을 붓고 지신밥을 묻는다.
굿가락을 그치고 제관과 치배들이 음복을 한다.

음복이 다 끝나면 치배들은 당마당에서 판굿을 한바탕 걸판지게 친다.
판굿을 마치면 치배들과 동민들은 영기를 앞세우고 길굿을 치면서 마을로 온다. 밑집에 와서 가락을 맺고 쉬었다가 다시 길굿을 치며 풍물고로 와서 가락을 맺고 나서 풍물을 풍물고에 넣고 당산제를 마친다.

4) 찰밥걷기풍물
역시 정월 대보름날 치는 굿으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쇠1, 징1, 장고1, 소고2개에 대포수, 화동, 창부 등 허두잽이 서넛 정도의 간단한 편성으로 평복을 입고 풍물을 치며 집집이 들르면 그 집 안주인은 찰밥을 한 덩이씩 떼어준다. 이렇게 거둔 찰밥으로 술을 빚어 훗날 걸궁굿이 끝나고 파접례를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5) 노디고사굿
정월 보름날 노디(징검다리)에 금줄(왼 새끼줄에 종이를 드문드문 끼운 것)을 미리 감아 놓고, 길굿을 치며 노디에 가서 푸지게 굿을 친 다음 상쇠가 즉흥적으로 한 해 내내 노디에서 빠지거나 물이 트게 불어 떠내려가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의 축원을 하고 나서 길굿을 치며 돌아온다.

6) 걸궁굿
과거 필봉마을은 정월 보름이 지나서 다른 마을에서 굿을 보기 위해 부르거나 혹은 마을의 공동사업에 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걸궁]을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걸궁은 보통 정월 열 엿새에서 그믐사이에 많이 하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간이 다른 마을에 가서 굿을 [푸지고 맛있게] 놀아주고 그 대가로 금품을 받아오는 것이므로 굿을 웬만큼 잘 치지 못하는 마을은 걸궁 나갈 염두를 내지 못했고 뒤에 언급이 되겠지만 나가 보아도 걸궁 받는 마을의 텃새를 제대로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한다.

걸궁을 나가는 날에는 아침 일찍 영기하나와 잡색들을 걸궁할 마을로 보낸다. 그들이 그 마을의 큰 마당에 영기를 꽂고 마을 유지들을 찾아다
니며 허락을 얻은 후 다시 영기를 앞세우고 돌아오면 걸궁패가 필봉리에서 그 마을로 떠난다. 길굿을 치며 당산에 가서 '다른 마을로 가서 굿을 치겠으니 아무쪼록 잘 성사되게 해 주심사' 하는 뜻으로 당산굿을 친 다음 다시 길굿을 치며 얼마쯤 가다가 가락을 맺고 그 마을까지 걸어간다.

그 마을 인근에 당도하면 동구 밖에서 나발을 [홀......]하고 분다. 그러면 마을에서는 걸궁패가 온 줄 알고 나발을 들고 나와서 화답한다. 걸궁패가 일초하면 마을에서 일초하고, 이초하면 이초하고, 삼초하면 삼초하여 응답한다. 만일 그 마을에서 삼초째에 응답을 하지 않는다면 걸궁패가 들어오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나발 삼초로 화답하여 걸궁패의 입동을 허락해 놓고도 걸궁패가 들어오기는 들어오는데 그냥 불쑥 들어와서는 안되고[門]굿을 치고 들어 와라 하는 의미로 문을 잡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그 마을 젊은이들이 자기에 영기를 가지고 나와서는 동네어귀에서 두 영기를 [입을 쫙 벌린 가위모양}으로 엇갈리게 세워 놓고 막걸리 세동이와 북어 세쾌, 담배 세발, 짚신 세줄을 갖다 놓는데 이를 [門을 잡는다]고 하고 이 때 걸궁패가 쳐야만 하는 굿이 {門굿]이다.

문굿은 삼진삼퇴 방울진, 가새진 등의 여러 가지 진법놀이와 갖가지 맛있는 가락, 다양하고도 멋있는 기예 등으로 구성되는 만큼 힘도 들고 까다로우므로 "북어를 안주 삼아 막걸리도 먹어가며 담배도 태우면서 열심히 쳐보아라. 그리고 문굿을 다 치고 나면 신고 온 신이 다 닳을 터이니 짚신도 갈아 신으라."는 뜻으로 아예 마을에서 막걸리 등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문굿이 끝날 무렵에도 장난을 하고 싶으면 그 마을에서 문제를 내 놓기도 하는데 이때도 역시 걸궁패는 그 마을에서 풀어야만 걸궁을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까치작(鵲)자를 써서 내 놓으면 치배들이 까치걸음으로 굿을 치며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고 짚신에 곯은 달걀을 넣어 갖다 놓으면 문굿을 치는 것을 보니 [문굿이 골았다]하여 좋지 않은 뜻이 된다.

문굿을 마치면 안내를 받아서 마을에 들어가 들(入)당산굿을 치게 된다.
잡색, 소고, 장구, 징, 꽹과리의 순으로 치배들을 거꾸로 세워 놓으면 그 마을 영기가 나와 앞을 서고 치배들이 가져온 영기 하나가 같이 앞을 서며 다른 하나는 치배의 뒤에 딸려 길굿을 치면서 그 마을 영기를 따라 당산으로 간다. 당산으로 가서 당산을 왼편으로 돌고 상쇠가 치배를 오른쪽으로 돌리어 치배를 바로 열 지우고 당산에 세 번 절한 뒤 가새진, 방울진, 미지기 등의 작은 판굿을 치고 나서 치배의 순서를 거꾸로 하여 길굿을 치면서 다시 그 마을 영기의 안내로 공동우물로 가서 샘굿을 친다.
샘굿을 마치면 굿을 잠깐 쉬는데 그때 그 마을 도청과 마당밟이를 할 것인지 아니면 판굿만 칠 것인지를 의논한다.

마당밟이를 할 때 집집마다에서 추렴되는 쌀과 금품을 상당하기 때문이다. 판굿만 쳐 줄 때는 그 대
가로 얼마간의 금품을 받는다.

그 마을에서 걸궁굿을 마치면 날(出)당산굿을 치고 나온다. 마을 사람들이 구경차 둘러선 가운데 그 마을 당산마당에서 가진영산, 재능기 등 여러 맛있는 가락을 한바탕 친 뒤 가락을 싸잽이(휘모리-짝두름-휘모리)로 바짝 몰아 붙여놓고 상쇠가 잡색들을 거느리고 살짝 빠져 서른발 정도를 나온다.
이 때 부쇠는 나머지 치배들을 데리고 그대로 이어가는데 상쇠가 쇠가락을 치며 사사로 상모를 돌리다가 부포를 앞으로 펴 넘기면 부쇠는 이것을 신호로 굿가락을 바꾼다.
상쇠는 다시 잡색들과 서른발쯤 빠져나간다. 이런 식으로 삼퇴한 다음 상쇠가 부포 놀음을 푸지게 좌우로 하고 나서 쇠채를 높이 던지면 부쇠는 이것을 신호로 당산을 중심으로 두줄백이나 외줄백이로 진을 쌓고 당산에 삼배한 후 마을에서 나온다.

여기서 상쇠가 잡색들을 데리고 먼저 은근슬쩍 마을을 [도망]나오는데는 이유가 있다. 그 마을 집집이 들어가 굿을 치면서 '좀 더 내놓지'하는 식으로 [감 놔라, 배 놔라]충동질하고 조르는 임무를 맡고 수행했던 이들이 바로 [허두잽이]요, 또 그 굿을 총괄하여 진두 지휘했던 이가 바로 [상쇠]이기 때문이다.
걸궁굿이 끝나면 마을로 돌아와 [파접례]라는 것을 한다. 몇 집에서 닭을 잡아 죽을 쒀서 낮에 일정한 집 마당에 내놓으면 도청과 치배들이 마을 사람들과 보름날 거두었던 찰밥으로 빚은 술을 나누어 먹으며 그 동안 걸궁한 것을 결산하고 밤에는 판굿을 치며 논다.

7) 두레굿
당산제 마당밟이와 더불어 마을굿의 공동체적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굿이다. 여름철 마을 장정들이 모여 공동으로 [두레노동]을 할 때 두레굿을 친다. 쇠1, 징1, 장구1 의 간단한 편성으로 영기를 앞세우고 길굿을 치며 농군들이 들로 나간다. 논에 당도하면 영기를 논둑에 꽂고 어름굿으로 굿을 이루어 느린 풍류가락으로 김을 매기 시작하여 김매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면 반풍류로 넘기고 다시 겐지갱으로 몰았다가 김매기를 마치면 휘모리로 끝낸다.

다음 논의 김도 같은 식으로 풍물소리와 함께 메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그 힘든 [노동]이 [놀이]와 어울려 승화되어 [생산]의 능률이 오르게 되는 [공동체적 정서]와 [선조의 슬기]를 발견하게 된다.
만두레 (세벌 김매기를 모두 마치는 날) 때에는 일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올 때 그 들에서 가장 농사가 잘된 집의 상머슴을 소나 사다리, 지게 등에 태우고 길굿을 치며 주인집에 들른다. 이를 [장원례]라고 하는데 농꾼들이 장원이 난 집에서 풍물을 치고 놀면 주인은 닭 잡고 음식 장만하여 농군들에게 장원례 술을 대접한다.

또 김매기를 모두 마치면 백중 (음력으로 칠월 보름)무렵이 되는데 이때 날을 받아서(흔히 백중날)마을 사람이 다 모여 굿을 치며 논다.

이것을 그 힘든 김매기가 다 끝났으니 김맬 때 썼던 호미를 모두 모두어 [호미씻이]라고 한다. [호미씻이]는 정월의 [당산제] [마당밟이]와 더불어 연중 마을의 가장 큰 행사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