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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안에서의 혼란
세상은 신체적인 고통과 사회적 고통이 따르는 가운데
그리고 망각과 적의가 덧붙여진 가운데 열려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나 만의 자리를 열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생활 안에서 망각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뒤늦은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망각은 단순히 잊어가는 것이 아니라 평온으로 가득 찬
내면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때로는 착각 속에서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열심한 기도 중에
하느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도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신앙인들은 시인들이 묘사한 신체적이고
사회적인 상황 안에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방식을
더 권위 있고 힘 있다고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점을 보고나서 고백성사를 드리는 것도
바로 이런 혼란 안에서 빗어진 일들 중 하나입니다.
기도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순간의 내 마음 자체를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 안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며,
자신의 뜻, 그대로를 하느님께 울림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 몸 막아주는 바위 되시고 성체 되시어
저를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소서....
저의 바위, 저의 성체는 당신이시니.........”
소유격, 곧 ‘저의’ 바위, 저의 성체가 지적하듯이 이 대조는
기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로의 표현이 되고
우리가 하느님 손에 달려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약할 때, 하느님은 나의 바위이시고, 내가 박해를 받고
고통 속에 허덕일 때, 하느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시어 보호하고
보살펴주신다는 의미가 담겨진 마음의 울림의 기도,
이것이 순수한 기도의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때로는 망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딜레마에 빠져 허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평소 온전한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자신의 문제로 야기되어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땐
자신의 믿음에 의심이 생겨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오직 맡기고 위탁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돌보심입니다.
간혹 우린 하느님 안에 자신을 두려하지 않고 자신의 틀에
하느님을 가둬놓고 그 안에서 뜻을 펼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깊이 묵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삶인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위탁하셨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맡기신 생명을 죽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대체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기도 생활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자신을 의탁한 것처럼
당신의 손에 또 당신의 권능 안에, 당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하며 기도 중에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버려야 혼란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숨 쉬는 동안 하느님 안에서 시간을 누리고
악과 결정적인 위험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도
자신이나 부모 형제 이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입니다.
나의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이고,
위탁된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과 나와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아버지의 자애하심으로 기쁨을 누리게 되고
행복을 누리게 되며 하느님 영광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수천마디의 기도보다 아버지의 자애로 죽음의 순간에서
구해주시기를 청하며 당신의 종에게 사랑을 베푸셔서
아버지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있는 영광을 달라는
온전한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