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길 운봉-인월 구간
국악의 성지 (2)
2009년 06월 06일 . 날씨 : 맑음
송우룡은 「수궁가」를 잘 했으며, 그의 더늠은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현재 부르고 있는 것보다는 길이가 매우 짧고, 또 장단도 중모리가 아니고 진양조로 되어 있어 전승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송우룡은 아들 송만갑(1865~1939), 유성준(1874~1949), 이선유(1872~?) 등을 제자로 두었다.
남원국악성지 전시관의 모습
장재백(? ~1907)은 『조선창극사』에 장자백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과 전라감영의 문서에 장재백으로 나오므로 장재백으로 불러야 한다. 또 『조선창극사』에는 전라북도 순창 출신이며 김세종의 제자라고 하나, 호적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 10통 10호까지만 확인된다. 장재백의 부모가 순창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 순창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소리폭포 - 득음의 장소를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장재백은 1885년 전라감영의 잔치에 김세종과 함께 참여하여 오십 냥을 받았다는 기록이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라는 전라감영의 문서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크게 이름을 떨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1887년 무과 병과에 2,593인으로 급제한 장재백의 교지가 전한다. 장재백은 「춘향가」를 잘했으며, 더늠으로 「춘향가」 중 ‘적성가’가 전한다. 장재백의 묘는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에 있다.
가까이 가서 본 소리폭포 - 물줄기를 조금 세게 만들어야 폭포가 될텐데...
송만갑은 송우룡의 아들로서 근세 오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자기 가문의 소리 전통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소리 세계를 개척하여 새로운 소리를 개발하였다. 특히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리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야외 공연장으로 올라 가는 계단길
『남원지』에는 송만갑이 일곱 살에 판소리에 입문하고, 아홉 살 때 아버지인 송우룡을 따라 구례군 용방면으로 이사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다른 문헌에는 모두 구례 출신으로 되어 있다. 송만갑 자신은 자서전에서 전라남도 순천군 낙안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1895년(고종 32)까지는 구례군의 일부가 남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 같다.
주변 풍경
그러나 송만갑은 어디까지나 남원 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소리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리의 전통이 남원 운봉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들 역시 남원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송만갑은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은 장판개(1884~1937, 순창), 김정문(1887~1935, 남원), 박봉래(1900~1933, 구례) 등이다.
야외공연장의 일부분
유성준도 『남원지』에는 남원군 수지면 출신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기록에는 구례 출신으로 되어 있다. 유성준은 구례뿐만 아니라 하동 등지에서도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송만갑과 마찬가지로 유성준도 남원 판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소리꾼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성준은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임방울·김연수·정광수 등이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이들은 동편제 판소리 중에서도 「수궁가」와 「적벽가」의 전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솔길 이름도 예쁘다
이화중선의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이며, 1988년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현재의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 장좌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열세 살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남원권번에 기적을 두고 판소리를 배웠다. 당시 수지면 박씨 문중의 박해창이 머리를 올려주어 이것을 인연으로 박씨 문중으로 찾아갔으나 쫓겨났다.
국악인들의 묘역으로 들어가는 운상문
이 무렵 소리에 전념할 것을 결심했는데, 이때 만난 사람이 수지면 장국리에 살던 장득진이다. 15세 때 장득진의 첩으로 출가하여 남원을 오가며 소리를 하다가, 17세 되던 해에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위해 장득진의 고향인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하여 약 5년간 소리 공부를 하였다. 23세 경 상경하여 활동을 시작한 이화중선은 26세 때인 1924년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심청가」 중 ‘「추월만정」’을 불러 당시 최고 명창으로 대접받던 배설향을 압도하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화중선 또한 남원 출신은 아니지만, 남원 판소리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묘역 안쪽의 사당 악성사
이화중선은 식민지 시대 최고의 여자 소리꾼이었다. 그녀가 부른 ‘「추월만정」’(「심청가」 중에서 황후가 된 심청이 부친을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이나, 동생인 이중선과 함께 부른 남도 민요인 「육자배기」는 그야말로 공전의 대히트를 하여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악성사 앞에 선 현량, 리아, 버들이(왼쪽부터) - 이 사진은 6월 7일 인월-금계 구간의 일부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다시 들려 찍었음
그녀가 중심이 된 협률사(음악 공연 단체)는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어 이화중선이 고을 돈을 모두 쓸어 가 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이화중선의 이름이 1960년대의 서정주의 시구에도 등장하고, 우리 민요 속에도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 놀고요,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고 바람에 논다’는 구절이 있으며, 무슨 일이 잘 돼 신이 날 때 ‘화중선이가 삐종 물고 나왔다’고 말할 정도면 짐작이 갈 것이다.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은 호적에 의하면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출신이다. 그러나 남원군 주천면 주천리로 이사하여 남원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유성준의 생질로서 유성준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가르치는 대로 따라서 하지 못한다고 얻어맞은 후에 유성준의 문하를 떠나 송만갑의 수행 고수를 하다가 명창이 되었다.
후에 다시 서편제 소리꾼 김채만에게 배워 동편제 판소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문은 또 남원권번의 소리 선생을 오래 하면서 박초월(1913~1987), 박녹주(1906~1981), 김영운(1917~1975), 강도근(1917~1996)과 같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김영운은 김정문의 형 김정식의 아들로 호적명은 김기순이다. 뒤늦게 자신의 작은아버지인 김정문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김정문은 크게 이름을 떨친 소리꾼은 아니었으나, 남원과 운봉에서는 상당히 이름 있는 소리꾼으로 행세했다. 김영운은 김정문 사후에 남원국악원의 소리 선생을 했는데, 명창 안숙선도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김영운은 강도근과 처남 매부 간이다. 김영운은 김정문으로부터 배운 「흥보가」를 장기로 삼았다. 목은 좋지 못하여 방안 소리에 적합한 소리꾼이었다. 김영운은 김정문 사후 강도근 등장 이전까지의 공백기에 남원국악원에서 남원 판소리를 지켰다.
김정문의 제자로서 남원 판소리를 이어온 가장 대표적이 사람이 강도근이다. 강도근은 남원읍 향교리 출신으로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후에 송만갑에게 미진한 부분을 배웠다. 유성준에게는 「수궁가」를 배웠다. 그러나 강도근이 이름을 얻은 것은 「흥보가」 때문이었다.
강도근은 1953년 이래 별세하기까지 남원에 머물며 남원의 판소리 전통을 지켰다. 그는 “나는 자작(自作)은 안 한다.”고 공언하면서 스승에게 물려받은 판소리 전통을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88년 「흥보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강도근은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안숙선·전인삼·이난초 등의 제자를 두었다.
박초월은 전라남도 승주군 출생인데, 어려서 남원 운봉 비전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송만갑·김정문·유성준·오수암 등에게 배워 해방 전후로부터 별세하기까지 박녹주·김소희와 함께 판소리 여창의 트로이카의 한 사람으로 군림하였다.
박초월은 서슬 깃든 고음과 애원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박초월의 소리는 특히 서민적 애환을 표현하는데 뛰어났으며, 이로 인해 호남 지역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애호를 받았다. 박초월의 소리는 최난수·조통달·김수연 등에게 전승되었다.
'~음악과 함께~ > 국악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판소리의 유파와 명창 (0) | 2010.03.20 |
---|---|
김소현,박정선,김새야 (0) | 2010.03.20 |
신명나고 웅장한 "광대의 노래" 공연했어요. (0) | 2010.03.20 |
지리산 '동편제' 소리 여행 다녀왔어요 (0) | 2010.03.20 |
개구리 소리 - 이오덕 시, 김영동 곡 (0) | 2010.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