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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냉담신자, 하느님의 죽비소리

냉담신자, 하느님의 죽비소리
[생활하는 신학-이미영]
2011년 03월 07일 (월) 11:07:24 이미영 기자 myciel212@gmail.com

가톨릭 신자이지만 성당에 나가지 않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에게 주일미사에 함께 가자고 권했더니 “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매주 만나러 가는데?”라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시각장애와 지체장애가 겹친 한 장애인 청소년과 자매결연을 하여, 주일마다 그 아이의 집에 가서 온종일 말동무도 해 주고 포근한 날씨에는 가까운 공원에 산책도 데려가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주일미사라고 했다.

그 친구도 한때는 성당 주일미사에 열심히 나갔다. 어린 시절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가족 모두 오랫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아 한동안 신앙을 잊고 지내다가, 직장에 다니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교적을 이향신자사목부에서 찾아오고 다시 교리를 받아 첫영성체도 하고 견진성사도 받았다. 그러면서 통신으로 신학 공부도 하고, 신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으면서 매주 주일미사도 꼬박꼬박 참례하였다.

마침 본당 신부님도 좋은 분이라, 주일미사 때 강론을 들으며 세상 안에서 깨어 살아야 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 친구가 미사를 안 나가게 된 것은 그 좋던 본당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쫓겨난 일 이후라고 했다. 당시 그 본당에 재정 비리가 발생했는데, 신부님이 그 일을 두고 사목회 임원들에게 회개를 권유하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사목회 임원들이 신부님을 무고하여 교구장께 인사이동을 요구해서 신부님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했다. 그 사건 이후 친구는 그런 신자들과 한 공동체라는 것이 너무 싫었고, 과연 그 본당 안에 하느님이 머무실지 회의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의 긴 냉담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본당 미사에 안 나가던 그 친구는 2008년 여름 시청 앞에서 열린 촛불미사에 참석했다. 미사를 마치고 친구는 벅찬 감동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미사 시작 때 “여러분 외로우셨죠?”라는 신부님의 한마디가 한 줄기 빛처럼 자기 마음을 따스하게 위로하는 느낌이었고, 정말 오랜만에 미사 안에서 하느님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친구가 ‘하느님을 정말 갈망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친구는 여전히 본당 주일미사에는 나가지 않는다.

요즘 그 친구는 아이 키우느라 바빠서 자칭 살아 있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봉사활동도 하지 않기에, 다시 한 번 본당 주일미사에 나가자고 권했다. 아이들 데리고 성당에서 미사 참례하며 애들 주일학교 들어가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 좋지 않겠냐고 권하니, “성당이 무슨 취미활동이니, 수다 떨러 가게?”하고 한소리 한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애들 좀 크면 애들이랑 함께 살아계신 하느님을 다시 만나러 가야지.”

바오로 사도는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말한다. 겉치레로 드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 뜻을 실행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세례를 받고 열심히 미사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삶 안에서 하느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더 엄히 해석하여,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한다.

"교회에 합체되더라도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교회의 품안에 “마음”이 아니라 “몸”만 남아 있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 …… 그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기는커녕 더욱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14항)

최근 교회 안에서는 주일미사 참례자가 줄어들고, 냉담신자가 늘어난다고 걱정이 많다. 나는 친구를 보며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진정 무엇인지 종종 생각해 보게 된다. 그저 습관처럼 주일미사에 참례하지만 ‘주일에 성당에서만’ 신자로 지내는 이와 진정한 신앙을 갈망하며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헤매는 이 중 누가 더 냉담자라고 할 수 있을까? 냉담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는 그들의 책임이 더 클까, 아니면 하느님 뜻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여 그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떠나가게 하는 교회의 책임이 더 클까?

요즘에는 끊임없이 성당에 다시 나가자고 권유하는데도 꿈쩍도 안 하는 친구가 걱정인 것이 아니라, 그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내가 하느님 뜻을 충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나 보다 싶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성당에는 다니고 있지만 삶 안에서 그 친구보다 하느님 뜻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더욱 그렇다.

이 냉담신자 친구는 내 신앙을 돌이켜보게 하는 거울이다. 교회가 무엇인지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는 이 친구야말로, 신앙을 장식이 아니라 삶으로 살라는 하느님의 죽비소리가 아닌가 싶다.

이미영/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