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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위반으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뿌와쨔쨔의 영어이야기: 교통위반으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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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위반으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Posted: 28 Jul 2011 06:28 PM PDT

'딱지'를 떼다


미국에서 5년여간 생활하면서 주변 분들의 '법정 체험담'을 많이 들어는 보았지만, 제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건은 두달여 전인 5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퇴근 시간의 교통정체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급하게 잡힌 촬영이 있던 탓에 일단 골목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아파트가 많은 골목길, 일단정지 표지판을 보고 잠시 차를 멈춘 뒤 비상등을 켜고 우회전을 했는데 아뿔싸. 이곳은 좌회전만 가능한 일방통행길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마음을 추스리며 비상등을 켠 채로 조심스럽게 후진을 해서 길가 주차라인으로 차를 일단 넣었는데 잠복하고있던 순찰차가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이쿠, 큰일이네. 그래도 뭐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지."

경찰관에게 내 잘못입니다.를 연발하는데 경찰관이 뭔가 이상하더군요. 장난끼어린 눈으로 제 면허증과 자동차 등록증을 가져간 뒤 제 자동차를 이 잡듯 살피기 시작합니다. 마치 더 적발할 건수는 없는지 말이죠. 미국에 온 이후로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자동차 등록 주소지와 면허증 주소가 다른 이유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더니 벌점과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제 면허증을 들고 순찰차로 잠시 돌아갔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불거졌습니다. 평소 같으면 5분 정도면 전산 입력을 마치고 저에게 면허증과 딱지를 준 뒤 끝날 일인데, 20분이 지나도 줄 생각을 안합니다. 이 때, 차에서 내려  경찰관에게 가면 경찰관을 향한 공격으로 오인당할 소지가 있으므로 수신호를 보낸 뒤 차 너머로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냐?'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경찰관 왈.

"Wait. Two more tickets." (기다려, 두 장 남았어.)

두장 더? 머리가 복잡해 졌습니다. 내가 위반한 건 일방통행길에서 역주행을 한 것 뿐인데 두장을 더 써야 한다니. 혹시 내가 걸리기 전 위반자들것도 같이 처리중인 건가 했습니다. 10여분을 더 기다린 뒤, 경찰관은 저에게 총 4장의 위반 딱지를 가져왔습니다.

"왜 이렇게 딱지가 많은 거죠?"
"일방통행 위반, 정지 신호 위반, 방향지시등 안켬, 그리고 일방통행 도로에서의 불법 후진."


어이가 없었습니다. 경찰관은 제가 분명히 준수한 일단정지 신호, 그리고 우회전 전에 켰던 방향지시등마저도 위반한 것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게다가 일방통행길에서 법규 위반 상황을 인식한 뒤, 제딴에는 더 위험한 상황을 막고자 비상등을 켜고 했던 후진인데 그것마저 불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총 벌금 320달러, 벌점 8점(2점x4)

"만약 내가 다음번에도 이렇게 실수를 했을 경우엔 그럼 어떻게 해야 최선인거냐? 다른 차들에게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비상등을 켜고 후진한 것 까지 어떻게 불법으로 간주하는 거냐?"
 

"응? 그런 건 재판에 가서 따지렴."

황당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저에게 재판에 가서 이야기하라는 말을 남기고 경찰관은 유유히 떠났습니다.


무죄 탄원제에 기대를 걸다

그리고 일주일 뒤, 어떻게 알았는지 수많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재판을 진행할 경우 자신을 고용해달라는 것이죠. 보통 과태료 위반으로 끝나는 신호 위반이나 속도 위반 등의 단순한 죄목의 경우엔 재판이 필요 없이 부과된 벌점와 벌금을 내면 끝이지만, 무죄 탄원(Plead not guilty)라는 이 제도를 이용하면, 재판을 통해 부당하게 경찰에게 적발을 받았을 경우 그 상황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받았던 4장의 딱지는 모두 재판 출석 의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멀쩡히 지킨 정지신호나 방향지시등,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했던 후진까지 벌점과 과태료를 부과한 경찰을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재판을 신청했습니다. 무엇보다 벌점이 하나도 없었던 제 기록에 난데없이 8점이라는 엄청난 벌점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죠.

재판 날짜는 2개월여 후인 7월 26일로 잡혔고, 그사이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경찰에 적발된 당시 촬영해두었던 핸드폰 사진(하단).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제가 서 있는 위치를 지도와 함께 표시함으로써 '만약 내가 우회전 전에 정지신호와 방향지시등 규정을 위반했었다면, 내가 저 위치까지 후진할 때까지 경찰이 오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찰이 내가 우회전을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는 설명이 가능한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백한 실수였던 일방통행 위반에 대한 벌금은 미리 납부했습니다.
 

사건 당시 찍어둔 사진

그리고 법정 영화를 보여 법정에서 쓸 수 있는 단어들과 표현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재판 장면과 달리, 경범죄 때문에 이뤄지는 법정은 매우 심플합니다. 따라서 일부러 법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지난 5년여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쓴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표현들에 대한 난감한 상황에 어떻게든 대비해야 했습니다.

"I'm afforded my rights to speak in my own defense by our constitution, sir"
(실제로 쓸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쓸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재판 당일

courtroom의 모습
 

그리고 재판날이 밝았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법정에 출두. 저는 4번 재판정으로 갔고, 저와 함께 재판을 받는 사람은 모두 20여명, 그 중에는 변호사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고, 저처럼 스스로를 변론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재판장은 불을 별로 켜 놓지 않아서 매우 엄숙하고 무서웠습니다. 겁을 잔뜩 먹고 있었는데, 귀엽게 생긴 아줌마 경찰이 오시더니 "I'm sorry." 하며 나머지 형광등을 모두 켜고 갔습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갑자기 원고측에 출석한 검사(prosecutor)가 예상치도 못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검사는 법정에 출두를 약속한 사람들의 출석 여부를 확인한 뒤, 한명한명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제 차례가 되자, 검사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총 4장, 8점이구나, 벌점을 4점으로 깎아주겠다. 벌금은 200달러 정도. 어떻게 생각하냐?"
"????"


처음 겪어보는 범죄 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에서 가끔 보는 "이대로 있으면 최하 무기징역이지만, ~~를 하면 10년형까지 가능하다."는 식의 대화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8점을 4점으로 깎는다고 얼씨구나 하고 덥썩 물면 너무 억울한 것 아니겠습니까? 명백히 4가지 죄목 중 3가지는 제가 잘못한 사실이 없는 부분이니까요.

"난 내가 잘못한 죄목(일방통행 위반)은 바로 벌금도 냈고 잘못을 인정하지만, 나머지 세가지 중 두 가지는 법규를 위반한 적도 없고, 마지막 하나는 필연적 상황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검사는 갑자기 종이에 펜으로 적었던 4점, 200달러를 북북 그은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벌점 없는 걸로 하고, 75~110달러 정도의 벌금은 어떻게 생각하냐?"
"....그렇게 하겠습니다.(아싸!!!)"

결국 흥정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처음에 미리 인정했던 일방통행 위반에 대한 벌점 2점, 그리고 추가 벌금. 끝.

흥정이 끝나자, 판사는 저를 불러들여 저에 대한 정식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얘기가 끝난 검사와의 흥정 결과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검사와 너와의 대화에 의하면, 너는 4가지 잘못을 했지만, 75~110달러 정도의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재주는 검사가 부리고, 판사님은 뭔가 편하다!)"

이렇게 해서 3달여를 끈 교통법 위반 사건은 끝을 맺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할인 혜택'을 입었습니다. 아마 영어를 못해서 자신이 없었다면, 꼼짝 없이 벌금을 내고 넘어갔었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억울한 위반을 재판으로 끝내는 것은 일견 좋은 제도인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지루한 재판까지의 기다림과 검사와의 대화를 감내할 자신이 없으면 부당한 벌점과 엄청난 과태료를 물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의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일일이 신문전단지를 오려 모으고, 구입한 제품에 동봉된 할인권을 본사에 보내지 않으면 할인 혜택(rebate)을 받을 수 없는 미국의 판매 제도들 처럼 말이죠.

관련 웹툰: 미국의 교통 경찰 이야기
관련 웹툰: 미국 쇼핑에서의 리베이트란?

게다가 한국과 달리 교통 경찰과 격의 없는 대화가 불가능한 미국이다 보니, 위반 현장에서경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는 상황이 해결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미국경찰들은 대체로 내가 피해자인 상황에서는 한없이 친절하지만, 내가 위반자인 경우에는 너무나 그 태도가 가혹합니다. 같은 위반 상황이라도 경찰-운전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찰-운전자-법원-(변호사) 등의 절차를 거쳐 더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태계'가 구축된,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구조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