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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로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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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두 제자는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묵고 계시는 곳에 가서 하루를 지내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님이 묵고 계시던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탈무드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벤 레비라는 한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메시아는 언제 오십니까?”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가서 그분에게 물어보시오.”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상처투성이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상처를 치료할 때, 감았던 붕대를 전부 풀었다가 다시 감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이 아파하면 금방 달려가 도와주려고
자신의 상처에 감았던 붕대를 조금만 풀고 치료를 하십니다.”
이 전설에 따르면 메시아는 상처 입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며,
자신도 상처를 입은 처지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이 전설 속의 메시아는 우리 예수님과 무척이나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항상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 계셨고,
날이 저물도록 그들을 고쳐주시곤 하셨습니다. 급기야는 인간이 지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시고자 당신 손발에는 못 구멍이 뚫렸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계시던 그곳,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그곳은
바로 ‘아픔의 자리’였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예수님시대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지만,
아픔의 자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제일
필요한 것은 돈이나 약품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하는 친구입니다. 그 아픔의 자리에
이제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더욱 간절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여기 아픔이 있다. 이제는 너희 차례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파하는 그곳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안전지대에는, 무풍지대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습니다.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픔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아픔을 보고, 아픔을 함께하고,
아픔을 치유하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픔이 있는 곳에 있건만 우리의 몸은 마냥 편하기만 원합니다.
서 있는 것 보다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 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합니다.
또 그냥 누워 있는 것 보다 잠자는 것이 더욱 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편한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육체적 편함의 마지막은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우리는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늘 편안함을 떠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쾌락의 온상이라, 하느님을 모시는 그릇이며 이 일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고찬근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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