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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영성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 평신도 영성 (토마스 H. 그린, S.J.)
[들어가며: 평신도의 시대]
2. 자캐오를 부르심
저자가 자캐오의 이야기를 택해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이 이야기가 "평신도 시대"의 도래를 설명하는데 있어 우리들에게 좋은 패러다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복음서 중에 특히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쓰여진 루가 복음만이 우리들에게
예리고의 자캐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루가 19:1-10)
루가 복음에서 예수는 그의 전 공생활을 통해 단 한번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나신다.
루가는 이 단 한번의 예루살렘 여정을 예수의 모든 전교와 소명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여정은 출발에서부터 십자가의 수난, 빠스카의 신비, 부활 그리고 승천을 향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드라마틱한 긴장은 19장 그에게 있어 운명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전 장을 통해 증가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예리고에서의 자캐오와의 만남은
그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사건이었다.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는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다." (루가 19:1-2)
세관장은 예수님 시대에 있어 경멸의 집단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로마의 식민지통치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그들의 백성들과 국가를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창녀들이나 세관장과 같은 인물들은 공적인 죄인으로서 루가복음에서 이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의 복음은 특별히 그들을 위해
선포된 듯이 보여진다.
"그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가 5:32)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심지어 술주정뱅이, 탐식가 그리고 세관원과 죄인들의 친구(루가 7:34)라고
알려지기까지 했다.
물론 예수는 그들의 죄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들을 회심으로 초대하였으며,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이미 모든 이들에게 죄인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들에게는
굳이 어떤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가리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보다도 더 솔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캐오 역시 이미 모든 이들에게 죄인으로 알려져 있기에 굳이 자신의 모습을
거짓이나 위선으로 가리울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를 보려는 열정에 나무 위를 올라가면서까지 기꺼이 스스로를
바보처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루가 19:3-4)
요한복음 1장 35절에서 51절의 구절들은 우리가 자캐오의 불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요한복음은 여기서 예수의 첫 번째 다섯 제자들의 부르심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일반적인 특성처럼 요한은 우리들에게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부르심에 대한 신학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는 모두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각각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 첫 번째 안드레아와 요한 자신, 베드로, 필립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나엘
―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주님을 따르려는 열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필립보처럼 직접적인 부르심이 있고,
세례자 요한과 같이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통한 부르심이 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요한 6:4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항상 먼저 우리들에게 열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은 결코 우리들에게 응답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의 부르심에 우리가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것은 안드레아와 요한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들은 자유로이 예수님을 따라갔으며, 예수께 질문하였다.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요한 1:38)
여기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은 제자로의 부르심뿐만이 아니라
신앙으로의 부르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패턴을 자캐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은 이 세관장의 마음에 예수를 보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자캐오에게 있어서 이러한 열망에 응답하는 것은 자유였으며, 그는 돌무화과나무 위로
오르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자존심까지도 잊을 정도로 이에 응답하였다.
하느님의 친절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러한 바보 같은 행동은 자캐오의 전 인생을
변화시키게 하였다.
"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 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하며 못마땅해하였다."
(루가 19:5-7)
요한의 부름심에 대한 신학적 고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 열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러한 그 분의 부르심에 우리가 자유로이
응답하도록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분은 또한 우리 각자를 고유하고도 개별적인
방법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급하고도 다열질적인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셨고,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필립보를 어떤 드라마틱한 방법을 통하지 않은 그저 단순한 방법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니고데모와는 성서에 대해 함께 토론하시면서 그를 부르셨다.
이렇듯 주님은 늘 그들이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각자의 성격, 재능
그리고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부르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각자를 부르시는 그 분의 부르심은 개인적이고도 유일한 것이다.
베드로, 요한, 안드레아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도록 불림을 받았다.
그러나 분명 자캐오는 결코 그들과 같은 불림을 받지는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자는 자캐오 이야기를 평신도 영성을 고찰하기 위한 복음 구절로
선택한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 삶인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제자로 그리고 거룩함으로 불림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그의 집에 예수를 모시고난 후 드린 말씀을 보면 명확해진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9:8-10)
자캐오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희생제물을 드리고자 했다.
그를 위해 자캐오는 가난한 사람들과 재산을 나누고, 그가 그 동안 속였던 사람들에게는
되 갚아 주리라고 말씀드렸다.
이처럼 회심에는 항상 어떠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동안 자신의 삶을 통해 지은 죄와 이기적인 욕망들을
타파한다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심을 통한 변화된 삶이 수녀원 또는 신학교에 들어가거나 결혼 또는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꼭 포함될 필요는 없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결코 유일한 방법도, 일반적인 방법도
그리고 심지어는 더 좋은 방법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각자 이러한 자기만의 고유한 부르심을 발견하고 관대함을 가지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 분의 부르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응답일 것이다.
자캐오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는 물론 교회에서 늘 즐겨 읽혀지는 에피소드이다.
저자가 평신도 영성에 대해 책을 쓰고자할 때 바로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자캐오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자캐오의 부르심을 통해 저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를 올라가야만 예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길을 지나가시며 자캐오를 향해 내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5)
자캐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독신 또는 수도자의 삶이라는 나무 위에 오를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의 일상 삶 바로 그 곳에서 두 발을 땅에 디딘 체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예수가 그를 만나고자 하였던 곳은 독신이라는 나무 위에서가 아니라
그가 그의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가정 바로 그 곳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자캐오에 대한 발견을 통해 아마도 예수의 공생활 동안 불림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나무 위의 작은 사람의 부르심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루가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와 같은 평신도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16개 이상 더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서 복음서 안에서 평신도 부르심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몬의 장모(4:38-39)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중풍병자(5:17-26), 백인대장(7:1-10),
나인의 과부(7:11-17), 죄 지은 여인과 시몬(7:36-50), 집으로 돌아간 게르게사의
마귀 들린 사람(8:26-39),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 그리고 야이로와 그의 딸 (8:40-56),
간질병 걸린 사람과 그의 아버지(9:37-43), 마르타와 마리아(10:38-42), 안식일과
허리 굽은 여인(13:10-17), 감사를 하기 위해 되돌아왔던 사마리아 나병환자(17:11-19),
부자 청년 - 이 이야기는 특별한 경우로, 그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자신이 부르심을 거부하였다(18:18-27), 예리고의 소경 (18:35-43), 과부의 헌금(21;1-4),
십자가 위의 죄수(23:39-43)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활한 예수의 무덤에 있던 여인들
(24:1-11)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평신도 삶으로의 부르심"이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세우셨던
하느님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것은 자캐오의 부르심에서처럼 어떠한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과 예수를 만났던 이들은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설적으로 예수와 함께 살기 위하여 그들의 가정이나 일상의 관심과
책임들로부터 떠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가정을 변화시켰지 결코 그것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 평신도 영성 / 예수회 손우배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