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0-25) 혹시 '낄낄 빠빠'란 말을 아십니까"? 한 마디로 낄 때 낄 줄 알고 빠질 때 빠질 줄 아야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 개입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투신할 줄 아고, 가봐야 본전도 못 건질 곳에는 기지를 발휘하여 미련 없이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살다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괜히 이 곳 저 곳 다 기웃거립니다. 여기저기 다 들쑤시고 다닙니다. 빠낄 낄빠 하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가벼운 사람으로 인식되는 지름길입니다.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지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부디 모든 이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자주 고민하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꼭 개입해야 될 사안인가? 내가 꼭 가야할 곳인가? 내가 가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지지고 불편해지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잘 간수하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지켜나가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노력이 '낄낄 빠빠'를 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예수님은 '낄낄 빠빠'의 名手이셨습니다. 정말 개입해야 될 일에는 목숨까지 걸고 개입하셨습니다. 백성들 전체를 그릇된 신앙으로 이끌고 있던 당대 유다 지도자들, 유다 본산을 향해 정면으로 반기를 드셨습니다.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들의 위선과 비리와 이중적 신앙에 맞서셨습니다. 그러나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할 때 어떠하셨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내가 떠날 순간이로구나, 직감하시고 몰래 빠져나가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낄낄 빠빠'의 전문가셨습니다. 헤로데 왕의 그릇된 결혼 앞에 목숨까지 걸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직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헤로디아의 미움을 사 참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낄 때는 목숨 걸고 낀 것입니다. 그러나 빠질 때 빠지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의 전성기 시절, 그의 위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세례자 요한 黨'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큰 스승으로 받들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전면에 등장하시자마자 스스로 자신을 '와르르'허물어트립니다.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반면에 베드로 사도는 '낄낄 빠빠'에 조금 서툴렀습니다. 끼지 말아야 할 때 자주 끼어들어 예수님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어련히 예수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어느새 다가와서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베드로가 요한을 바라보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0-25) 또 끼어든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웃의 흉허물을 바라보느라 너무 바쁜 우리들입니다. 동료들 약점 찾기에 혈안이 된 우리들입니다. 결국 허탈함뿐인 다른 사람들 실언이나 실수담 뒤적거리는 '뒷담화'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너는 그저 나를 따라라." - 로마 한인 신학원 정병조 신부 -
너무 재미 있어서 여기에 함께 나눕니다. 낄빠하거나 빠낄하지 않는 분별력과 주제파악을 청하며...
|
'~가톨릭의 이해~ > 하느님 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는게 罪인가? ~ 고해성사의 길잡이 (0) | 2012.07.17 |
---|---|
‘당신이 있어 기쁩니다’라고 말해볼까요 (0) | 2012.07.17 |
[스크랩] 참 크리스천인가? (0) | 2012.06.19 |
평신도 영성 /자캐오를 부르심 (0) | 2012.06.14 |
예수님의 고자론 -[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0) | 2012.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