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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이해~/하느님 사랑

2012년 12월 수사님의 편지

그림: 김 선명 스테파노 수사,ssp

 

가난한 과부의 헌금(루가, 1-4)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한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 중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이 가장 큰 행사이고 그만큼 바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쁜 하루 중에 정신없이 사도직을 마치고 제 방에 들어와 쉬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주 작고 아늑한 공간입니다.
옷장 하나 그리고 작은 책상과  침대를  놓으면 움직이기도 힘듭니다.
너무 비좁아서 의자를  들여오는데 30 분가량이 걸린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하다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해놓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 거냐” 불평을 늘어놓고 투덜거린 적이 많았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 가신 길을 따르는 수도자가 본분을 망각한 것이지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근사하게 입고 편히 자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요.
그게 어찌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또 바라시는 길이겠습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방과 방 사이에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열악한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 한 몸 누일 장소가 허락된 일이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수년 전 일입니다.
어렵게 살고 계신 분들을 방문하고 수도원에서 준비한 작은 선물들을 전달해주던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독 할머니 한 분이 기억에서 잊히질 않습니다.
사시는 곳에 들어가 보니 아무런 온기도 없이 방이 썰렁했습니다.
보일러 설치도 안 돼 있고 난방시설도 없이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의 이런저런 가정사를 듣다보니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머니의 구구절절 어려운 사연에 오랜 병중에 계셨던 어머니와 수발하던 동생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잠시 머무는데도 춥고 견딜 수 없었는데 그곳에서 매일을 살아야하는 할머니야 오죽했겠습니까.
할머니를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엔 내내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습니다.
한편 제가 살면서 조금 불편하다고 불만을 드러냈던 일들이 떠올라 문득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세상에 어디 할머니 사연뿐이겠습니까.
경제위기 이 후의 그 많은 애달픈 사연들이야 어찌 말과 글로 다하겠습니까.
불안한 비정규직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직장에서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내몰린 가장들. 날마다 넘쳐나는 끔직한 기사들.

너무나 낯익은 일들이지만 당연하다고 할 수만 없는 불편한 진실들. 모두가 외롭다고 아우성치는 듯합니다.
화려한 불빛으로 넘쳐날수록 어떤 이들에겐 우울한 세밑 풍경이 되겠지요.


박스나 파지를 주워 하루에  몇 천 원정도 되는 돈을 모아 손자 손녀들과 라면으로 연명해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박스와 파지를 찾아 우리 수도원에 들르시는 분이 요즘 들어서 부쩍 늘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마음뿐입니다.

기도 외에는 실질적으로 그분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사회 활동을 하기위해서 돈이 필요 하지만 수도자에게는 월급이 없습니다.
그저 받는 거라고는 식사 몇 번 하면 될 정도의도 최소한의 품위유지비 정도입니다.
그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 일에 바빠 스치듯이 그냥 지나친 적은 얼마일까요. 

몇 푼 안 되는 것을 나누었다고 해서 그분들의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중요한 건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따듯한 관심을 보내는 것이겠지요.


가난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헌금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과부의 행동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표현일겁니다.
그것을 지켜보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감동 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습니다.
소외되고 헐벗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 사이로 오신 가장 고귀하신 이의 의미이기도 할 겁니다.


저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 감사하고 제가 처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렵니다.
현재 제게 내려진 소명은 인터넷서원을 통해 아기 예수님을 여러분 안에 태어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곧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길과 관심을 거두지 않는 것이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이 세상 그늘진 구석구석 모든 상처받고 버려진 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말구유에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
제 마음이 당신을 닮아 가난하고 투박한 말구유가 되게 하소서.
순수한 마음이 되어 당신을 모시게 하소서.
가난 때문에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수도자가 되게 하소서.
나자렛의 가난한  성 요셉의 아들로서목수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하고 소외 된 이들에게 내어 주게 하소서.
또한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
저도 작은 것이나마 헐벗은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주소서.

성바오로 인터넷서원지기 할배 수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