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르실료 운동이 탄생되었던 1940년대와 그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의 스페인은 좌우익 간의 내전(1936∼1939년)과 이어진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년)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내 전은 끝났지만 그 후 몇 년 간 스페인 교회는 격동기를 겪고 있었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가톨 릭 국가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기여를 했는데 예수회의 창설자인 로욜라 의 성 이냐시오를 비롯해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및 성 피터 크레이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성인 성녀들은 스페인의 종교 전통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 다. 그럼에도 반성직자 중심주의는 스페인의 문화 역사 안에 깊이 뿌리박힌 스페인적 현상이다. 이렇게 스페인의 20세기 전반기는 폭력과 불안정으로 특정지어진다. 공산주의, 무신론 그리고 반성직자 중심주의가 많은 스페인인들의 생활에 침투했으며, 결국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의 사령 관으로 있던 파쇼 장군인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쿠데타로 군사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전쟁에 지친 이 나라에 평화와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으나 내전의 상처를 입은 나라로서 전쟁으로 받은 빈곤과 혼란, 도덕성 상실, 비인간적 형태 등의 사회적 혼란과 부정 부패 및 개인주의, 지 역주의 등이 스페인 사회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꾸르실료 운동이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된 프 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지 않고 스페인에서, 그것도 남쪽의 작은 섬 마요르카에서 탄생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스페인의 국민성을 이루고 있는 스페인 기질이다. 이 스페인의 기질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기질로서 가톨릭 교회 전통에 근거할 뿐 아니라 두 가지 특수한 문화인 유태 문화와 무어 문화에 영향을 받아 신권주의로서, 종교는 국가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특별히 18세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수 차례의 내전의 역사에서 스페 인적 기질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전의 성격은 모두 종교적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 은 어떤 측에 속했던 간에 그들을 끈질긴 투지와 전적으로 투신하는 적극적인 근성을 만들었다.
둘째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마지막 내전(1936∼1939년)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으로 무관심과 세속주의의 출현,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대한 반작용이다.
넷째는 유태교와 이슬람교에 의해 짙게 채색된 스페인의 가톨릭 특성이다. 신성을 강조하고 교 회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태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다. 예를 들면, 꾸르 실료 운동의 탄생 동기를 부여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지)는 중세기 이슬람 시대의 성역이었고 이슬람 시대 후에도 그리스도교의 메카였다. 이곳은 모슬렘을 공격하는 목표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성전(聖戰)의 의미를 가졌으며 그 성전은 순교이고 천국으 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바로 꾸르실료를 탄생시킨 투쟁적 기질이 되었다. 또한 내전 후의 혼란 속에서도 스페인의 종교적 환경이 지적으로는 고풍의 중세기적 전통이 짙 었고 학자풍이었으며 신심은 수덕 중심인 수도원적 전통이었다. 반면에 스페인 문화 역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스페인적 현상인 반성직자 중심주의인 진보주의적 성향이 여전히 잠재해 있 는 이중적 환경 속에서 특별히 유태계인들이 많았고 증거자의 사상이 강한 모슬렘이 오래 머물 렀던 스페인 남쪽에서 꾸르실료가 탄생했다.
꾸르실료 창시자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해결책은 바로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진정한 크리스찬 정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안이한 것만 찾고, 비활동적이며, 사회 풍조에 영합하려는 정신을 배격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세상을 구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졌다. 바오로는 성령의 능력만이 오로 지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지혜와 정의와 거룩 함과 구원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세상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꾸르실료 창시자들은 또 사도직이란, 크리스찬 생활 가운데 덤으로 하는 직분이 아니라 크리스찬 생활 자체의 요구이며, 크리스찬 생활이 바로 사도직 생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외형적인 활동 기구만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의 누룩이 되고 소금이 되려는 정수 분자로서 그룹을 형성하여, 행동적이고 활기 있고 전투적인 크리스찬 공동체로서 생활하려 는 신념이었다. 후안 에르바스(Juan Hervas) 주교와 보닌(Bonin) 형제 등 꾸르실료 운동을 시작 했던 사람들은 물론, 그 후 계속하여 꾸르실료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념적 배경, 곧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념적 배경을 가진 꾸르실료 운동의 창시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꾸르실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공의회가 갖는 정신으 로 살고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 꾸르실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일치 사 상을 강조하여 교회 공동체 확립에 역점을 두었다. 공의회가 제시한 정신을 공의회에 앞서 반영 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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