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자공동체~/데꼴로레스!!

꾸르실료 운동의 시작과 전개

꾸르실료 운동의 시작과 전개

 

꾸르실료 운동은 1940년대에 탄생했다. 공식적으로는 1949년 1월 7 실시한 꾸르실료를 세계 제1차 꾸르실료라 명명하고 있지만, 이 꾸르실료 운동의 씨앗은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열렸던 제3차 꾸르실료 세계대회(1972)와 카라카스에 서 열렸던 제4차 꾸르실료 세계대회(1988)에서도 확인되었고, 한국 서울에서 가졌던 제5차 꾸 르실료 세계대회(1997)에서도 재확인된 바 있다.

19
세기 초부터 말 사이에 있었던 세 차례의 내전(1821∼1823, 1833∼1840, 1869∼1876)은 스페인 전역을 혼란과 무질서로 만들었고 그 틀 사이에서는 무신론적 경향을 띤 세력의 발생 그 리고 그에 가세된 이념주의 곧, 좌익 혁명적 노선의 세력 등이 고개를 들었으며, 1930년대까지 접어들게 되었을 때 가톨릭 교회 일각에서 내전 이전에 향유했던 교회의 강하고 신앙으로 가득 찼던 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시의 사회 현실을 극도의 무질서와 그 무질서 안에서 발생된 죄의 권세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고, 그로 인하여 만들어진 반그리스도적· 비그리스도적 환경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역전시켜 그리스도적인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그 무렵에 개최되었던 스페인 가톨릭 청년 연합회 제2차 총회(1932)에서 다음 제3차 총회를 1937년에 개최하면서 그 기간 동안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젊은이들과 함께 산티아고 데 콤 포스텔라로 대대적인 순례를 시행하기로 확정했으나 1936년 내전이 다시 일어나 중단되고 말았 다. 1939년 내전이 끝나자 젊은이들은 즉시 조직을 정비하여 산티아고 순례를 위한 계획을 세우 고 발표했다. "100,000명의 모든 젊은이들 산티아고로!"라는 구호 아래 목표 달성을 위하여 국 가위원회의 주도 아래 모든 교구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상급반 꾸르실료"를 실시했고, 각 교구 에서는 모든 성당에서 "순례 지도자들을 위한 꾸르실료"를 실시했다. 그중 마요르카 교구는 "순 례자들을 위한 상급반 꾸르실료"를 요청한 첫번째 교구였다
.
최초의 꾸르실료는 1941 4 Nuestra Senora del Liuc에서 열렸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마 요르카 교구 청년 연합회 젊은이들은 별도로 순례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해순례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9번의 또 다른 꾸르실료를 그들 독자적으로 실시했다
.
한편 상급자 꾸르실료(전국 협의회)에 봉사했던 젊은이들 중 에두아르도 보닌 형제와 몇몇 마요 르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순례가 시행되기 이전부터 순례만을 위한 꾸르실료보다는 교회의 운 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

꾸르실료의 과정은 침묵 피정 등 이냐시오의「영신수련」의 주요 내용을 종합하여 7일 간의 일정 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7일 간의 일정은 실제로 꾸르실료 주말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는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렵다는 것을 알고 1943년부터 마요르카에서는 순례 지도자 꾸르실료의 일정을 3 4일로 조정하게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의 대장정의 순례 준비를 적극적 으로 도와주었고, 마요르카 젊은이들의 자유와 창조력을 존중해 주었던 후안 에르바스 몬시뇰이 1947년에 마요르카 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순례를 위한 꾸르실료의 준비는 더욱 더 활기를 띠었고 매주 금요일 사제관에서 준비 위원들과 함께 미사와 준비 모임을 가졌다
.

1948
년의 순례는 성공리에 끝났다. 순례가 끝난 후 에르바스 주교를 중심으로 봉사자들은 이제 껏 실시했던 모든 꾸르실료를 통해 얻은 중요한 요소들을 더욱 훌륭하게 조화시켰다. 그리고 교 회 운동으로 발전시켜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1949년 1월 7 산 오노라또 수도원에서 실시한 꾸르실료를 현재의 크리스찬 생활의 꾸르실료로서 세계 제1차 꾸르실료라 명명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954년까지 100차에 걸쳐 꾸르실료가 실시되었는데, 그때부터 14개 강의와 5개의 묵상으 로 구성된 현재와 같은 꾸르실료가 정착되었으며 스페인 전국 각 교구로 확산되었다
.


그러나 1956년에 마요르카 교구의 교구장이 이동되면서 새로 취임한 교구장은 자신이 선종할 때 까지 약 10년 간 마요르카 교구에서는 꾸르실료를 할 수 없도록 명하였다. 결국 그러한 조치는 꾸르실료 운동이 남미로 더욱 빠르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확산되는 동기가 되었다
.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교계 제도 내의 성직자 주도의 경향이었던 꾸르실료 운동 을 본래의 모습인 평신도 운동으로 활성케 하는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현재는 평신도 성직자 협 력형 신심 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직후인 1963년에 교황 바 오로 6세로부터 교회 내의 신심 운동으로 인정받았으며, 꾸르실료의 주보 성인으로 바오로 성인 을 정해 주셨다
.
1966
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제1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와 교황은 여러분을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다
.
1차 꾸르실료 세계대회에는 세계 20여개국 대표들이 참석했고 세계 울뜨레야도 함께 거행되었 다. 멕시코에서는 제2차 세계대회가 개최(1970)되었고, 그 후 2년 후에는 스페인 마요르카에 서 제3차 세계대회가 열렸는데, 3차 세계대회까지는 세계 울뜨레야도 함께 열렸다. 1988년에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제4차 세계대회가 열렸고, 한국 서울에서는 1997년에 제5차 세계대회 가 열린 바 있다
.
현재 꾸르실료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나라는 세계 60여 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