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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이해~/묵상 자료

부활의 영성 - 성삼일로의 초대 1

    부활의 영성 - 성삼일로의 초대 1 루카 복음서는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부활체험을 길게 서술한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어 십자가형을 받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린 채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실망하고 흩어진다. 엠마오로 낙향하던 제자들은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다. 그들은 거기에 한 몫 끼여 자기들이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빵을 쪼갤 때 알아 뵙게 된 일을 설명한다. 그들이 그렇게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에 나타나시어 평화를 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런데 여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님이 부활하여 나타나신 것이 놀랍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보자 그들에게 갑자기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놀랍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들뜬 마음으로 서로 이야기 나누던 그들이 아닌가? 당연히 서로 기뻐하며 환영해야 마땅할 터인데 어찌하여 그들은 그분을 보자 겁을 먹었을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왜 놀라느냐? ... 바로 나다.” 하고 그들을 진정시켜야 했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가리어 있다(루카 24,16).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를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나타났다는 사실이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남이 아니기에 알아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구멍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다. 주님께서 못 자국으로 뚫린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는 것은 사흘 전에 못 박힌 흔적을 보여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의 손과 발이 군인들의 못질로 구멍이 나던 성금요일의 현장으로 그들을 초대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찾으신 것도 당신의 몸을 쪼개어 주시던 성목요일의 현장으로 그들을 초대하시는 것이다. 부활의 생명은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성토요일을 지나쳐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들이 지금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이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아직 성삼일로 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 46)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강조하신다. 그분께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놓지 않고 골고타에 오른 것은 골고타에서 부활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겁을 내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성삼일의 현장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성삼일의 죽음을 무서워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승이 붙잡히자 도망을 쳤다. 도망친 그곳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는 그들은 아직도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온 실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한, 그들은 부활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그분은 성삼일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성삼일로 초대하신다. 당신의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시며 성삼일에 일어난 일을 깨닫게 하신다. 성삼일에 있었던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은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 외국인 노동자, 매 맞는 여인,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사람 등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놓으셨다. 그러므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쳐서는 그분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하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남을 위한 고통, 남을 위해 자기의 몸을 쪼개는 그 현장을 상기시키는 것은 이들의 아픔에 동참함이 없이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이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기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겠다는 꿈꾸는 한,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의 세계는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자가 만든 이상의 세계가 아니다.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위하여 고난을 겪어야 하고 남을 위하여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분은 제자들로 하여금 남의 고통에 연대를 느끼고 동참하게 하여 그들을 먼저 부활시킨다. 부활하신 그분은 부활한 자만이 체험할 수 있다. 부활하고 싶은가? 죽은 다음 살아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픈 이웃에 동참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심을 두고 고민하라. 부활 신앙이란 죽은 다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열심히 기도하며 산 대가로) 어려운 이웃에게 자기 목숨을 나눌 때 얻게 되는 새 생명에 대한 확신이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자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부활한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심을 체험하였다면 그들이 그분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완전히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일은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그들의 실존을 완전히 향하는 것이다. -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