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의 이해~/하느님 사랑

2012년 11월 수사님의 첫번째 편지 - 마르띠니즘

                                                                                           사진: 서영필 안젤로수사,SSP 

가을을 수놓는 원색의 꽃들과 어느덧 짙어진 낙엽들이 한데 어우러져 쌓이고 바람에 휘날리며
수도원 뜨락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요즈음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와 그 정연한 조화로움으로 눈을 황홀하게 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넌지시 일러주는
이 뜨락의 꽃들과 낙엽들처럼 함께하는 수사님 한분 한분이 아름다운 꽃이고 낙엽입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도 다르고 개성도 제각각이지만 예수님을 좇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수도원의 깊어진 가을과 늦은 꽃들과 날리는 낙엽들을 보면서 몇몇 기억들이 떠올라 슬그머니
절 미소 짓게 합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잦은 말실수와 엉뚱한 말이 빚어낸 일들입니다.
수도원에선 이런 저의 행동을 일컬어 ‘마르띠니즘’이라고 하지요.
대체로 아주 훌륭한 사람들 이름 뒤에 붙는 ‘이즘 ism'이 저를 수식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만큼 저의 ’아우라’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겠지요.

 

몇 년이 흘러 지나간 이야기지만 지금도 수사님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의 에피소드입니다.
물론 ‘전설의 고향’ 류와는 다른 진짜 실화입니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몇몇 수사님들은
강의나 강론 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제 얘기를 양념으로 섞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아침 미사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 전날 하필이면 한일전 축구가 벌어졌지요.
그렇습니다.
늦은 밤까지 저의 본분을 잊게 만든 건 한일전이란 타이틀이었습니다.
볼 때는 아주 좋았습니다.
‘보편적 인류애’를 잊고서 마구 편파적인 응원를 했습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죠.

다음 날 미사 전례 중에서도 ‘성찬의 전례’ 감사송 부분에서 사단이 벌어집니다.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0 또한 사제와 함께
+ 마음을 드높이
o 주님께 올립니다.

이래야 정상이겠지요.

 

그런데 제 의지와 상관없는 말이 튀어나와 거룩함에 젖어있는 형제들의 귓전을 어지럽힙니다.

지금도 기억하지만 아주 또렷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갑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려”야 하는데
왜 갑자기 저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그것도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말이죠.

 

큰 소리에 스스로 놀라고 동시에 실수를 깨닫고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가 잠시 싸늘해지더니 이내 웃음소리로 가득해졌습니다.
고통스럽게 웃음을 참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습니다.
원장님께서도 뭔가를 억지로 억누르고 계셨음은 물론이고 미사를 드리던 사제형제들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고 제대 위에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미사에 참석하신 평신도 분들도 많이 계셨는데 망신살이 제대로 뻗친 것입니다.
평소 거룩하고 우아한 수도자로서의 저의 품위는 산산조각이 난 것이죠.
머릿속이 하얗게 아득한 것도 잠시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내 온갖 생각이 들락거렸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묵상을 하려고 앉았는데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묵상 후에는 바로 식사 시간이 이어지고 대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원장님과 수사님들께서 ‘할배 수사’가 공동체에 큰웃음을 줬다고 즐거워들 하시더군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식당 안은 커다란 웃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거룩해야할 미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비난보다는 따듯한 위로를 보내주신 형제분들,
수사님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왔습니다.

 

지금에 와서 얘기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려 했고 수사님들 앞에서 그걸 참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야 했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불에 얼굴을 묻고 제 마음 속에 북받쳐 오르는 참을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감정을 지나친 비약이라고 조롱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수사님들의 이해와 위로 속에서 공동체의 넉넉함과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전 어린아이가 되어 예수님 품에 안긴 것입니다.
결혼을 했더라면 대학생 이상의 자녀가 있을 장년의 제가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어린아이가 된 것입니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 안에서 누군들 아이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 15-16)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 15)

예수님은 제 주변을 맴도는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살아가는 양식입니다.

 

성바오로 인터넷 서원 지기

하느님의 보톡스를 맞은 할배 수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