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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이해~/하느님 사랑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오늘은 기쁨 주일이다. 그리고 기쁨의 원천은 주님이시다.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며 어려움 중에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돕는 것이 사순절의 정신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말씀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인데 15장의 도입 부분에서 밝혔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 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1~2절 참조). 이 세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그리고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우선 세리와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님께 모여든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비유는 작은 아들의 타락과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다시 관계를 회복했는지, 그리고 동생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큰아들의 반응에 대하여 간단히 나열한다. 작은 아들의 타락은 자기 고집과 이기심으로 인하여 아버지로 부터의 이탈에서 시작된다. 그 결과는 끔찍한 비천함과 쓰라린 굶주림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아들은 육적인 빈곤뿐만 아니라 영적인 빈곤까지 겪게 된다. 그런 빈곤의 고통 속에서 비로소 아들은 깨닫는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7~20 참조). 회복과 복귀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회개가 필요하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고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을 온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뉘우침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비유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자식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다시 돌아온 것 자체를 기뻐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반하여 큰 아들의 태도와 반응은 우리가 흔히 보이는 정의이다. 큰 아들은 비유 전체에서 별 상관없지만 동생의 잘못에 대하여 관용과 용서 대신 정의의 잣대로 심판하려는 우리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본다. 복음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이 정의라기보다는 자비임을 강조한다. 심판하기 보다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탕자가 자신의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으로 인하여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용서하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 참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모든 인간에 대한, 특히 주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탕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이다.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하느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자녀가 되어 ‘새 사람’이 된 우리는 탕자로서의 묵은 삶을 버리고 화해의 새 삶을 살아야하는 의무를 가진다. 전주교구 현유복 베네딕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