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양파를 까보신 적이 있습니까?
양파의 노랗고 얇은 표피를 벗기면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그 양파를 과감하게 절반을 칼로 뚝! 자른 후
다시 겹겹이 감싸인 알맹이들을 벗겨 봅시다.
한겹, 한겹 벗길 때마다 꼭 그만큼 희고 깨끗한 속살을 보여주는 양파...
양파를 벗기는 행위는 겉만 번드르하게 과대 포장된
선물의 포장을 벗기는 실망감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충족감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겉 멋 꾸미기에 여념없는 우리들 앞에 놓인 양파는
속이 알차고 견실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줍니다.
얼마전 정신지체 장애인으로부터 정성껏 만든 새해 카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카드의 내용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카드의 양쪽면에는 'ㄱ' 비슷한 글자로
빽빽하게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생각해서
아주 정성껏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그 어떤 카드보다도 소중이 그 카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꾸밈없고 순수한 천사가 건네 준 작은 선물은 저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아직은 짧게 걸어온 사제의 삶이지만
가장 겉포장된 저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과연 일치되고 있는가?
중국 격언에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 동안 소인의 모습으로 살아오지 않았는가? 반성해 봅니다.
온갖 좋은 말은 혼자 다 하고 다니면서 행동이 뒷받쳐 주지 못한 나의 삶.
어느 자리에 가든지 늘 좋은 말을 해야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사제로서의 고고한 품위(?)를 지켜야 하기에,
늘 긴장하고 준비된 모습으로 나를 추스려야 하는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가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니다.
그런데 양파를 벗기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양파를 한겹 한겹 벗겨 나갈수록,
그 하얀 속살을 깊이 들어낼 수록
눈은 더욱 자극되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 앞에 진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참다운 회개와 진솔한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는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걸으셨던 그 고난의 길, 영광의 길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보잘것 없는 죄인임을 온전히 드러내고
겸허하게 고백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성덕입니다.
먼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보다 앞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비우고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필립 2,6-8)
이렇게 하느님께선 우리에게 더 이상 드러낼 것 없이
완전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우리를 위하여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삶의 자세를 본받아,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이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허울들을 하나 하나 드러내고 벗겨내는
회개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앞에 비우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의 눈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얕보지 않으시고(시편 51,17)
오히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것처럼
진정한 참회의 눈물로 자신의 허물을 벗어 던지는
은혜로운 사순 시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실로써 부활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성왕 다윗은 한때 죄를 짓고
하느님께 자신의 희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이렇게 참회의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이 몸은 깨끗해지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시편 51)
다윗왕이 위대한 성왕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의 죄를
참다운 회개의 눈물로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는 은총의 때이며 구원의 시기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미움과 거짓으로 포장된 허물을 벗어 던지며,
참다운 회개와 보속으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떼이야르 샤르뎅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없고 영광없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김지영 (사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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