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여성신자 비율은 약 60%를 넘는 것으로 통계수치에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로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보여준다. 주일미사를 비롯하여 전례에 참석하는 여성신자 비율은 60-70%가
되고, 구반장 교육, 성서모임, 고해성사에 참석하는 여성신자의 비율은 더욱 높아 80-90%에 이르른다. 그러나 정작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는 10% 이하의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다. 신부님의 영명축일이나 기타 본당행사가 있는 날이면 각 여성단체들이 나서서 음식장만과 뒷설거지 등
온갖 궂은 일을 담당하지만, 그 일은 가사노동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현재 한국가톨릭교회 안에서 평신도 여성의 지위는 피라밋구조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 잘 내고 성직자의 말에 순종하는 여성신자들이 신앙심이 깊은 신자로 간주된다. 여성신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순종과 인내와 겸손이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직자-평신도라는 구별과 남성-여성이라는 구별은 당연시되고, 그것은 단순한 구별의 차원을
넘어서서 차별의 벽을 두텁게 만들어 놓았다.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가 오늘날 이처럼 뿌리깊게 자리잡은 배경에는 이러한 여성신자들의
순종주의가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온 것과도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교회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고 성직자를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을 구분하지 못한 신자들의 무지가 오늘 한국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를 부추켜온 셈이다. 여성들 스스로 복음의
메시지를 올바로 알아듣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는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다.
남녀평등사상과 민주적 사고방식으로 교육받은 젊은 여성들은 가톨릭교회에 들어왔다가 많은 실망을 안고 교회를 떠나간다. 본당신부라는 한
남성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결정되는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보고 그들은 놀라워한다. 외부에서 볼 때 사회정의를 열심히 부르짖는
가톨릭교회가 실상 내부적으로는 일인독재체제로 군림하는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아직까지는 순종하고 헌금 잘내는 신자들이 성당에
가득가득 차기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남성중심적인 가부장 문화가 가톨릭교회 안에 지속된다면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표징들을 올바로 알아보고 새로운 방식으로 가톨릭교회가 거듭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없는 곳에 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시대의 징표들을 읽어내고, 교회여성들의
문제를 짚어내면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 보고자 한다.
2. 시대의 징표 미래학자들은 삼천년기 특징 중의 하나로 인간관계의 수직구조가 해체되고 대신
수평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전망한다(C. Gilligan). 피라밋 구조의 사회체제가 원형의 그물망 조직으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수직구조
속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적이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순종함으로써 그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수평구조에서는
경쟁의 관계보다 협력의 관계를 중시한다.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이 중시되고 개인의 기능들이 얽혀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해 나갈 것이다.
정보화시대에는 수직적 구조보다 이러한 수평적 구조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독점한 정보는 왜곡될 위험이 있지만, 정보를
함께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 상의하면서 일을 해나갈 때 공동체에 보다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정보화사회를 또한 3F의 시대라고 명명하기도
하는데 3F란 Fiction(가상), Female(여성), Feeling(감성)을 말한다. 첨단기술을 이용한 가상의 공간(fiction),
그물망으로 짜여진 수평구조 속에서 잘 발휘될 수 있는 여성의 능력(female). 다른 사람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협력할 줄 아는
감성(feeling)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흔히 여성과 남성이라는 도식적 구조 속에 고정관념으로 담아 두었던 특성들이 있다. 여성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감성적이고, 남성은 강하고 이성적이고 용감하다고 말해져 왔다.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 세대가 지닌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에는 그런 고정관념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할 것이다. 여성의 특성으로만 생각되었던 남을 잘 돌보아주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자애로운 성격을
갖춘 사람이 이 사회를 이끌고 나갈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떠나서 인간이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서 그러한 특성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세기가 바뀌고 천년기라는 거대한 물결을 넘기면서 우리의 시대는 격변하고 있다. 이천년기를 마무리짓는 이 시점에서 수직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요청되는 사실을 주의깊게 보아야 하겠다.
3. 여성문제 최근까지 한국 여성들은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 안에서 '훌륭한 어머니, 사랑받는
아내, 순종하는 며느리'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교육을 받아왔다. 유교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여성은 홀로 설 수 없고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늙으면 아들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자신의 이상형을 현모양처(賢母良妻)라고만
규정짓는 것에 대해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현대 여성들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서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결혼을 하더라도 직업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면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결해 나가고자 노력한다. 남성에게 빌붙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는" 존재이길 희망한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문제란 "여성이 단지 남성과 다른 성(性)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적으로 부당하게 차별받고 억압받는 문제를 말한다. 여성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여성의
지위가 변화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문제는 사회경제적 조건과 더불어 발생하는 문제임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와 불평등한 상태에 놓여 있다. 여성은 각종 공공분야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취업과 승진의 기회에서 소외당하며 차별적 저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신체적,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여성을 비하하는 왜곡된 성차별문화와 이데올로기로 여성들은 억압받는다. 이와같이 불평등한 사회제도,
이데올로기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과 경제적 활동을 무시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가정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사노동은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다.
4. 교회 안에서의 여성문제 교회 역시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일반적인 여성문제가 교회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여성신자들은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모습을 참 많이 닮았다(10,38-42). 교회 안에서 우리 여성들은
마르타의 역할을 참으로 충실히 해내고 있다. 만일 성당을 새로 지어야 할 본당이라면 그때부터 여성단체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성전건립모금운동이라는 목표가 세워지고 세부적인 실천사항들이 정해진다. 수익성있는 각종 판매사업과 바자회가 열리고 혼배국수를 열심히 말아서 생긴
수익금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러한 피땀어린 정성과 더불어 개인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함께 이루어냈을 때, 여성신자들은 자긍심을
느낀다. 어떤 건물과 같은 형태로 눈에 드러나는 결과가 나타나면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같아 뿌듯함마저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신자들의 노력은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 모든 성과는 성직자의 능력으로 평가된다. 오랫동안 여성단체장을 맡아온 여성평신도들의 한맺힌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하느님만은 내가 한 일을 아시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 여성들은 눈물을
삼킨다. 또한 본당내의 단체들은 자율권이 없다. 무조건 봉사하고 희생할 것만을 강요당한다. 여성평신도들은 인격을 지닌 성인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던 마리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예수님은 전혀
교육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성을 가르쳤고 마리아는 그녀가 늘 담당해야 했던 온갖 일을 젖혀두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는 최초의 여성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전해주는 것은 마리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세계, 자신에게는 두터운 담으로 막혀있다고 느껴왔던 세계이다. 말씀을 듣는 일은 정신과 관련된 일로서 남성들이 담당해야 하고, 그것이 여성이
하는 살림살이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고정관념같은 것은 예수님에게 아예 없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하느님 나라의 일은 남자만이
하는 것도, 여자만이 하는 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나 여타 봉사활동 사이의 대립, 혹은 그중 하나의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르타의 불평으로 부끄러워진 마리아의 얼굴을 세워주었으며, 두사람의 일이 모두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임을
일깨워주었다. 예수님에게서 놀라운 사실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역할, 새로운 위치, 새로운 일들을 열어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경우 한국 천주교 여성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유교적인 신분제, 가부장제적인 이념이 사회보다도 교회 안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마리아의 몫을 오늘날 교회 여성들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교회공동체 안에 오늘날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 구분되어 있고 여성들은 마르타의 일에만 전념하도록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한국 교회에서 여성신자들에 대한 가르침들을 살펴보면, 주로 가정 안에서의 여성신자의 역할을 강조해
왔다. 가정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여성신자는 신앙 안에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어떤 주교님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성모님을 본받아 「가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가톨릭신문, 1997. 5. 25일자). "처녀로서 어머니가 된
마리아처럼 모든 멸시와 지탄을 한꺼번에 받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던 성모님처럼 오늘의 어머니들이 성가정을 꾸미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담고
받아들이는 가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줄 것"을 그 주교님은 권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문제에 비추어본다면, 어머니, 아내로서의 역할을 강화시키기
이전에 여성 자신의 존엄성을 찾아주고 신앙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주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현대 여성들은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존재의 근거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여성의 존엄성을 되찾고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뿌리내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려냄으로써 현대 사회의 위기 안에서 여성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어야 하겠다. 공의회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들의 소명이 완전히 인정되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또
실제로 도래하였다. 이제 여성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이 여태까지 획득한 적이 없었던 지대한 세력과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가
매우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 이 시기에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된 여성들이 인간성의 상실을 막는 데에 대단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본다."(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서한, <여성의 존엄> 1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여성의 존엄성은 원천적으로 하느님의 모상과
모습대로 남녀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은 있으되 차별은 없다.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해
있는 남녀차별은 창조신앙에 위배된다. 성서는 인간의 죄된 상황을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창세
3,16)는 말로써 구사하고 있다. 즉, 남녀의 인격적 관계가 파괴되고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함으로써 남녀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의 상황에
떨어졌음을 말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소유물로 간주할 때, 지배하는 편이나 지배당하는 편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망가뜨리게
된다. 다시말해 성서는 남녀차별의 상황이 원천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남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이
실현되었음을 선포한다.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으로 말미암아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로 세례받은
이들은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이랄 것도 여성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차별은 무너져 버린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성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 땅에 복음의 씨가 전해졌을 때 유교문화권 안에서 남녀 차별로 말미암아 신음하던 당시 여성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에 의한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고,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틀을 닦아주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과연 여성의 존엄성이
인정되고 그리스도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 계속해서 전달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세례를 통한 존엄성으로 인해
여성평신도는 성직자들, 수도자들과 함께 교회의 사명을 공동으로 책임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받은 모든 이들은 동등하며 존엄성을 지니기에,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는 인종이나 민족, 사회적 조건이나 성차별에서 오는 차별성은 없다. 여성신자들은 세례와 견진성사에 힘입어 사제요 예언자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 사명에의 참여자가 되고, 그리하여 교회의 근본 사도직, 즉 복음화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아 복음화에
투신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회의 70%를 차지하는 여성신자들이 변화할 때, 한국천주교회는 변화될 수 있다. 변화란 항상 아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5. 전망 수직적 사회구조 속에서 당연시되던 원리들이 오늘날 물음에 부쳐지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물음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서구사회에서는 여성사제직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표징을 제대로 읽어내고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세기에 여성들은 가톨릭교회를 떠나고 말 것이다. 삼천년기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정신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전망들을 그려보아야 하겠다.
1)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남녀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는
남성성직자가 모든 권한을 독점하면서 여성신자들을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성신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사라질 때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도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수렴과정이나 결정과정에서 여성신자들을 배제해서는 안되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참여가 요청된다. 여성신자를
교계의 하부구조로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례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복음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전체 여성신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하겠고, 평신도들을 대표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 대표기구가 설치되어야 히겠다. 성직자, 수도자, 남성신자들은 여성신자들을
무시하는 언어, 행동은 삼가해야 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상호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또한 여성 자신도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성직자,
수도자에게 굴종의 자세로 임하는 것을 고쳐나가야 한다.
2) 여성의 존엄성을 일깨우기 위한 신앙교육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니는 여성의 존엄성을 일깨워주고 여성이 지닌 가치를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하겠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어야 한다.
3) 교회 내
여성지도자들을 길러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가오는 삼천년기의 특성으로 미래학자들은 수직적 사회구조가 해체되고 수평적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들은 피라밋구조의 사회체제가 원형의 그물망조직으로 변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교회도 이제는 한사람의 지도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교회가 대형화됨에 따라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냉담자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은 성당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대중을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함으로써 의미를 찾는다. 21세기의 교회는
소공동체가 활성하는 생동하는 교회가 될 것이며, 여기서 여성지도자들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은
앞으로의 세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교회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길 원한다면, 이제 여성신자들이 교회의 쇄신과 사회의
복음화에 앞장서야 할 때이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차별의 벽이 무너지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차별의 벽이 철폐될 때,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